용서해 놓고 기다리신다 2002-08-20 11:42:13 read : 4614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08.11 // 누가복음 15:11-24
I. 예수님의 자기 변호 비유
역사상 많은 크리스챤 화가들이 돌아온 탕자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림이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입니다. 높이 3m 넓이 2m 크기로 그린 수채화인데 아버지와의 만남의 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신발이 다 헤어져 왼쪽 신발은 아예 신을 수 없어 벗겨져 있고, 오른쪽 신발은 다 닳아서 밑창은 없고 구멍이나 발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입니다. 신분을 상징하는 겉옷은 없고 남루한 속옷 한쪽을 걸치고 있습니다. 고상함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은 마치 죄수나 범죄자처럼 박박 깎아 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마치 왕처럼 보이는 아버지의 가슴에 왼쪽 귀를 대고 안겨있지요. 아버지는 빛나는 황금 팔찌로 온 팔을 장식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냄새나는 아들을 따뜻이 감싸안고 마냥 행복해 하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이 그렇듯이 많은 주경가들도 뉘우치고 돌아온 아들을 본문의 주인공으로 삼고 「탕자의 비유」라고 일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아들을 탕자나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잃은 아들이 돌아왔다" "죽은 아들이 살아왔다" 죄인, 탕자 배신자가 아니라 잃은 아들로 인정해 주고 계십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이 누구일까요?
두 아들 중에 주인공을 찾는다면 오히려 집에 남아 있던 큰 아들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을 깨우치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놀고 죄인을 용납하는 자라고 비난할 때 예수님 당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즉, 이 비유는 「예수님의 자기 변호 비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면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용서해 놓고 기다리신다」입니다.
지난 주일 은혜의 영성 여섯 번째 - 이겨놓고 싸운다,
오늘 은혜의 영성 일곱 번째 - 용서해 놓고 기다리신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용서의 비유라기 보다는 용납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계속된 「은혜의 영성」 씨리즈를 통해서 예수 안에서 발견된 나의 영광스러운 신분이 무엇인가? 나의 새로워진 신분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삶, 은혜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이 누구신가? 신(하나님)의 개념에 대한 많은 오해 때문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죄사함받고 용서받고 용납받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잘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II. 잘못된 하나님 아버지 개념
여러분, 혹시 놀이공원이나 복잡한 길에서 어린 자식을 잃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자식과 부모 가운데 누구의 마음이 더 아플까요? 애간장이 녹고 가슴을 태우는 쪽은 길 잃은 자식이 아니라 잃어버린 부모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는 본문의 말씀은 아버지의 심정을 나타낸 말입니다.
집나간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결단한 후에 아버지를 만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시나리오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되풀이 준비도 해 두었습니다.
① 정말 아버지가 나를 받아줄 것인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② 세상에서는 어떻게 말을 하고 상대를 어떻게 이해시키고, 어떻게 감동시키느냐 여하에 따라 일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했습니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더라. 말로 설득 여하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성취로 업적으로 공로로 율법으로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 오해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준비한 대사, 시나리오를 첫 대사를 해보는 신인 배우처럼 연습하고 또 연습했습니다. 드디어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큐! 신호가 떨어진 것처럼 준비한 대사를 읇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 다음 성경 말씀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 준비한 첫 문장도 채 맺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그리고 급하게 종들을 부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 손에 가락지를 끼우라.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사실 돌아올 때는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주저리 주저리 여러 말들을 준비했더랬는데 - 아버지에겐 그 말들이 아무런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왔다. 죽었던 내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만 중요했습니다.
③ 시나리오를 준비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자식은 자기가 한 일이 얼마나 크게 잘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한 것도 그 유산을 제멋대로 처분한 것도 그 재산을 다 날린 것도 얼마나 끔찍한 잘못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배신에 대한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용납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도 하나님이 누구인가? 그분의 성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 어떤 분인가? 하나님 개념은 사람마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경험을 하며 살아왔는가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프로이드는 "사람은 아버지의 이미지에 따라 그의 신관이 결정된다."
즉, 어떤 아버지 밑에서 살았느냐에 따라 하나님 의식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마틴 루터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자주 호되게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 진노의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루터가 "하나님을 꼭 아버지라고만 부르지 말고 하나님 어머니라고도 부르자"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개념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하나님을 「악덕 기업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고용주 정도로 생각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령, 북한 주민들은 자신들을 종업원으로 생각합니다. 일을 조금 하고도 감시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늘 생각합니다. 야단 맞지 않을 정도로 일하고 늘 눈치만 살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종업원으로 받아 준 것이 아니고 상속자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덕 기업주가 아니라 우리를 가정으로 자녀로 받아주신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재벌의 아들이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일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그 보상이 다릅니다. 7-8년 일했는데 그 재산이 몇 조원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분은 이 세상의 재벌 정도가 아닙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시며 만왕의 왕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부요로움은 조, 그의 아들이 재벌의 아들이었던 몇 조원은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 좁쌀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 개념에 대한 두 번째 오해, 하나님을 가혹한 심판자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나를 지켜보면서 저 놈이 언제 실수를 하나 지켜보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어쩌다 실수를 합니다. "너 또 실 수 했구나. 너 언제 철이 들래?" "내 그럴 줄 알았어. 너는 그것 밖에 안되니까!" 하나님을 심판자, 감시자 정도로 생각합니다.
사람관계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지옥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가혹한 심판자로 생각해서야 어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겠습니까? 비복음적인 생각들입니다.
하나님을 혹독한 심판자로 이해한다면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주어지는 풍성한 삶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 개념에 대한 세 번째 오해는,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감히 내가 가까이 할 수 없는 멀리 있는 왕처럼 가끔 나에 대해 보고를 받는 분 정도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기도도 구체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작은 일은 의논조차 하지 않습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보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에베소서 2장 13절을 통하여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여기 "가까와졌다"는 원래의 뜻은 그분의 품안에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분은 손바닥에 우리를 새겨서 매일같이 들여다 보고 계신다구요.
III.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개념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은 무조건 용납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돈을 어떻게 탕진했는지, 지금까지 불만이 무엇이었는지 묻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 "죽었다가 살아온 아들"이란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가져 오너라. 온전히 용서해 버립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이제는 나의 풍성함이 모두 네 것이라. 제일 좋은 것, 제일 좋은 것 -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락지를 끼워라. 옛날 가락지는 오늘 한국 사회에서의 인감도장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권세를 돌아온 아들에게 맡겨버립니다.
·신발을 신겨라. 종이 아니라 온전한 아들로 용납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말 성경에 생략된 단어 하나가 원문에 있습니다. 영어의 quick 이란 단어입니다. 빨리, 속히! 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속히 입혀라! 급히 잡아라! 소리쳤을까요? 이것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 그분은 우리가 완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용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시는 분입니다. 용서해 놓고 오늘도 기다리십니다.
"네가 신앙생활을 얼마나 잘 하는가를 보아가면서 구원시켜 주마"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용서하기는 한다. 그러나 네 잘못은 댓가를 치러야 할게야." 엎드려 뻗쳐 푸샵 100개, 반성문 100장 매일같이 100날 동안 써와. 이런 것 없습니다. 무조건 용납하십니다.
2. 하나님은 나를 볼 때마다 늘 사랑으로 웃으시는 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에는 늘 심각하고 우울한 일이 많아서 웃으시는 하나님을 이해 한다는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모든 껄끄러운 것들을 다 치워버렸습니다.
본문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기쁨에 너무 흥분이 되어 손익계산을 따질 겨를도 없습니다. 입혀라. 잡으라. 신기라! 퍼부어 주십니다. 아버지는 흥분한 나머지 들에 나가 있는 큰아들 불러올 생각조차 못합니다. 아버지는 그 기쁨을 혼자 기뻐하지 않으시고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 함께 기뻐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영혼이 돌아오면 한 가족, 한 아들이 내 품에 돌아오면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천군 천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인다.
오늘날 교회의 과제가 있다면 이처럼 웃으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이 기쁨이 없기 때문에 교회가 병들고 날로 차가워져만 갑니다.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가정, 교회, 사회, 정치엔 은혜의 주님이 아니계십니다. 거기서는 사람이 깨어나지 못하고 죽어만 갑니다. 우리는 웃으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이 아침 새롭게 만나기를 원합니다.
3.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나에 대해 실망하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실망이란? 기대치에 못 미칠 때 오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기대가 있어서 나를 선택하시고 구원해 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너,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줄 알았어. 나 너에게 실망했다. 나도 이제 너를 포기하고 말겠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분도 아니시지만 나에 대하여 실망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나를 절대로 포기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구약성경에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었을 때에 유대민족은 참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태양신을 섬기는가 하면, 각종 우상숭배와 매춘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암몬을 거쳐 요시아 시대를 맞이합니다. 뜻 있는 사람들은 나라의 멸망을 예견하고 풀 죽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스바냐 선지자가 나타나 심판과 재앙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절망과 낙담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어두운 상황, 암울한 메시지 속에 한줄기 희망의 빛을 선포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너희들의 행위를 보면, 멸망 받아 마땅하지만 너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메시야가 오시면 그 메시야가 너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다 짊어지고 사하실 것이기 때문에. 네가 예수 안에 있고 예수가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가 성령 안에 있고 성령이 너희 안에 있으면 나는 너를 율법의 눈으로 바라보지 아니할 것이다. 예수님의 안경으로 너를 볼 것이다. 용서의 안경으로 너를 볼 것이다. 예수님 보혈의 피의 안경으로 너를 바라볼 때에 나는 너 때문에 기뻐하며 어찌할 줄 모르는 내가 될 것이다. 할렐루야.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를 기뻐하리라.
IV. 공의·자비·은혜
우리가 예수 안에서 얻은 영광스런 신분을 발견하고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의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 두 번째,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이 용서의 개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원리는 뿌린대로 거두고 심은대로 모든 "공의"와 "인과응보"의 원리에 의해 움직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엔 은혜의 원리, 하나님의 영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영성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집을 나갔던 아들은 아버지 집에 돌아오면서 자신은 공의대로 보면 아들의 신분을 상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품군의 하나로, 종으로 돌아가리라" 이것이 공의입니다.
공의란, 내가 잘못한 행동에 대하여 마땅히 벌을 받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용서받았지만 죄의 댓가는 치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복음 밖의 생각입니다. 십자가 밖의 생각입니다.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어리석은 생각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공의를 주장하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공의로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 아니고 자비로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대문을 닫아 걸고 종들을 시켜 몽둥이로 내어 쫓으라. 그래야 옳지만 그 아들을 다시 받아 주시는 것 그것이 자비입니다.
어떤 젊은 여 신도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교만했습니다. 교만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가 얼굴이 조금 예쁘다는 것 때문에 목사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제가 얼굴이 조금 예쁘다는 것 때문에 여전도 회장을 무시했고. 얼굴 조금 예쁘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목사님이 안경을 닦고 보니 얼굴이 별 볼일 없었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은 교만죄가 아니고 착각죄입니다."
이런 비슷한 죠크가 영어에 있습니다.
한 여인이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이 제법 잘 나왔는데 막상 본인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습니다. "나는 날씬한데 좀 통통하게 나왔고, 주름도 없는데 주름살이 나왔고, 머리가 매끈한데 흰머리가 있는 것 같으니까 이 사진은 공의롭지 못합니다." 사진사가 보니까 아주 잘 나온 사진입니다. 정확히 나왔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에게 필요한 것은 공의가 아니고 자비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드리지요." 흰머리를 지워버렸습니다. 주름살을 펴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쁜 사진으로 만들어 뽑아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돌아온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의가 아니고 자비입니다. 만약 우리가 공의를 따른 다면 우리 모두는 지옥에 가야 하지요. 지옥 가야 할 우리가 지옥가지 않는 것 이것이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여기서 끝나면 반쪽 자리 구원에 불과한 겁니다. 죄사함 받고 지옥 가지 않는다. 이것은 온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자비 다음에 나타나는 축복이 은혜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몽둥이 대신 송아지를 잡아라. 새 옷을 입혀라. 신발을 신겨라. 가락지를 끼워라.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냈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세상 인심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그래 네가 보따리 있어야 살지 없는 보따리까지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은혜라고 하는 것이지요.
제가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차를 몰아 가는데 시간이 좀 늦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슬쩍 중앙선을 넘어 추월합니다. 또 길이 좋으면 과속을 합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교통 경찰차가 달려왔습니다. 이때, 스티커를 발부하고 벌금을 물고 감점을 받습니다. 이것은 공의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교통경찰이 "목사님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인데 그래도 교통법규는 지키셔야 합니다. 스티커는 끊지 않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그리고 깎듯히 인사를 합니다. 이것은 자비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목사님 너무 급하신 것 같은데 제가 에스코트를 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삐용~ 삐용~ 앞질러 요리조리 갑니다. 경찰차 뒤를 따라갔더니 목적지에 무사히 제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교통 경찰이 나를 쳐다보더니 "목사님 얼굴이 피곤해 보입니다. 이걸로 보약 사 드십시오." 봉투를 하나 줬는데 20만원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의로만 다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비에 머무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없는 보따리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피곤한 우리 인생 보약 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V. 아직도 정죄의식에 사로잡혀 몸부림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정죄의식에 사로잡혀 몸부림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2000년전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져가 모두 소멸시키셨습니다.
골로새서 2:13-14에 보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셨도다"
우리의 몇 가지 죄가 사함받았다구요? 모든 죄를 사해 주셨다!
우리가 지었던 모든 죄, 지금 짓고 있는 죄, 미래에 지을 모든 죄가 종이에 일일이 씌여져 있습니다. 수천 수만 페이지에 우리의 모든 죄가 씌여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몇 개를 선택적으로 골라서 용서하셨다구요? 아니요. 모든 죄를 소멸하였도다. 불에 태워버렸도다.
우리가 지었던 몇 가지 중요한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구요? 아니요. 우리의 모든 죄를. 과거에 지은 여러분의 모든 죄, 현재 짓고 있는 모든 죄, 미래에 지을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못 박았느니라. 할렐루야.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 사함 받았다. 이해가 안된다구요. 우리는 하나님을 시간 속에 묶어둘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시간의 제약 속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런 분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완성되어졌습니다. 내가 태어날 때 나의 모든 죄는 이미 미래의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 죄가 사해진 그 시점으로 보면 내 모든 삶은 모두 2000년후 일어나게 될 미래의 사건들입니다. 과거의 모든 죄, 현재의 모든 죄, 미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할렐루야.
시간, 장소, 상황 -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디로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내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초등학교, 중학교시절, 부족한 저는 사무엘처럼 교회에서 주로 일과를 보내고 거기서 잠을 자곤 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고등학생이 되어서 하나님에 대해 반항했습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도둑이 들기도 했고 학교 행정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원망했고 하나님께 항의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나가지도 않았고 짤막한 시간이지만 폭력 써클에 가담했습니다. 학생의 도를 넘기도 했습니다. 돌아가야지. 어느날 나를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많이 거꾸로 달려와 있었습니다.
어떡하나? 하나님은 나를 받아주지 않을거야.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거기 내 곁에 와 계셨습니다. "아들아, 이제 불만을 다 토했니. 이제 화가 멈추어졌니. 화가 끝났니." "네. 하나님 제가 참 나쁜 사람이지요. 하나님 앞에 돌아가려고 하는데 나는 너무 많이 달려왔어요. 한 3년쯤 회개하고 내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한 다음에 어린 시절 하나님과 약속했던 신학교에 가 목사가 될래요." "아니다. 현재의 네 모습 그대로, 부족한 모습 그대로, 아파하고 불만에 가득찬 네 모습 그대로, 나는 인정하고 받아주기를 원하노라. 아들아 내 손 잡아라. 나와 함께 가자." 그래서 그 날로 신학교에 원서를 쓰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이 - 죄의 법,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느니라. 할렐루야.
지금부터 57년전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얻었으면 일본나라 법에 우리가 메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해방을 얻었습니다.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본문의 둘째 아들은 돌아올 때에 본래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종으로 돌아가리라. 그런데 아들로 받아줍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송아지를 잡아라.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가락지를 끼워라. 신발을 신겨라. 동네 사람 불러 모아라. 잔치를 벌여라.
도무지 염치가 없습니다. 분명히 잔치의 주인공은 나 자신인데 그 앞에 버젓이 고개를 들고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면이 없습니다. 받아준 것만도 감사한데 집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나한테 준다. 내가 무슨 염치로 그것을 받는단 말입니까? 그래서 거절하는 것 그것이 은혜인줄 알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있는 그대로 아버지가 주는 사랑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 믿음이요 은혜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로 받아주시고 아버지의 풍요로운 세계 모든 것을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줄 때에 염치없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이 복음이라고 하면 주님이 날 위해 예비해 주신 은혜라고 하면 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할렐루야.
이 시간까지도 만약 당신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살아왔다면,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편협된 느낌을 가지고 살아왔다면, 하나님의 그 무한한 은혜를 염치 없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탄은 거기에 붙어 앉아 나를 묶어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감히 하나님을 수용하고 용서를 인정하십시다. 그분의 은혜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십시다. 나는 자유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힘으로 살아간다. 할렐루야. 선포할 때에 여러분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부요로움이 바로 여러분의 몫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은혜의 삶을 은혜의 영성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은혜의 영성, 은혜의 삶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