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5월 14일 (수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    美 대법"트랜스젠더 군 복무 금지 행정명령, / 일영연수원으로 옮긴 기감               카이캄, 51회 134명 목사안수식 / 4페이지 설교법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에 김우준 목사 청빙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명성교회에서               빗속에서도 울려 퍼진 부활의 기쁨 / 지구촌교회 제4대 담임 후보에 한인 목회자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 '무장공비→ 목사' 김신조 별세 / 이재명 지지율 1위               헌재 전원일치로 윤석열 대통령 파면 /교회 건물 명의만 소유했던 목사…법원               산불 피해 한국교회 지원 총력 / 고령 교인 10명 중 6명               기독교인 수, 감소 멈추고 안정세 /일제 침략으로 예수 믿었으니 '수고했다'고 말해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 이마에 십자가 인터뷰 출연               사순절에 대한 흥미로운 5가지 사실/ 트럼프 2기 첫 내각 회의, 목사·장관인 터너의 기도로 시작              

  홈     강대식     강문호     계강현     고신일     곽선희     곽창대     권오선     권오진     김경진     김광일     김기석     김도완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상수     김성광     김성수     김승규     김양인     김영훈     김용혁     김원효     김은호     김의식     김재곤     김정호     김진수     김진흥     김창규     김창진     김형익     김홍도     남수연     노창영     노환영     류영모     명설교(A)     명설교(B)     명설교(C)     문기태     박병은     박봉수     박신진     박요한     박일우     박진호     박한응     박형근     배영진     배의신     배진기     배혁     서명성     서진규     손재호     송기성     스데반황     신만교     신현식     안두익     안효관     양인국     양향모     염두철     오주철     오창우     옥한흠     원영대     유기성     유민용     유은호     유장춘     유평교회     이강웅     이건기     이국진     이규현     이기복     이대성     이동원     이동희     이백민     이삼규     이상호     이성우     이성희     이양덕     이영길     이영무     이우수     이윤재     이은규     이익환     이일기     이재철.박영선     이재훈     이정원     이정익     이종철     이준원     이지원     이하준     이한배     이호준     임현수     장부완     전승문     정근두     정오영     정준모     조봉희     조상호     조성노     조영식     조용기     조학환     조향록     주준태     지성래     지용수     차용철     채수일     최동규     최인근     피영민     피종진     하용조     한경직     허창수     홍문수     홍정길.임영수     홍종일     외국목사님     .     괄사(왕)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주례사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구약사건     신약사건     구약삽화     신약삽화  

:: 로그인 ::
 ID   
 PASS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설교작성법(여기누르면 다나옴)
  설교잘하는 방법(여기누르면 다나옴)
  김기홍 설교학
  동영상.간증자료(여기누르면 다나옴)
  교계 뉴스 ------- (전체보기)
  생활전도(여기누르면 다나옴)
  전도편지
  참고 설교(성구)
  장례식 설교(내부에 많이있음)
  웃음치유와 영업
  기타

설교내용검색

성경 찾기

네이버.다음.구글


검색



Daum


(방송)설교 교회

해외교회사이트

예배와 찬양


목회자 컬럼
  • 교회와신앙칼럼
  • 뉴스미션칼럼
  • 뉴스엔조이칼럼
  • 당당칼럼
  • 기독공보칼럼
  • 기독목회칼럼
  • 크리스천칼럼
  • 타임즈칼럼
  • 김명혁목사
  • 김형준목사
  • 양인순목사
  • 이동원목사
  • 조현삼목사
  • 밤중소리

  • Home

    예수를 믿게 된 사마리아인들
    2002-07-15 15:47:30   read : 3280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4:39-42절 // 02/07/07


    월드컵은 끝났지만 그 열기는 아직도 식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서점가에서 베스트 셀러로 팔리는 책은 히딩크와 관련된 책이라고 합니다. 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선수선발과 4강 신화를 이루기까지 보여주었던 리더쉽에 관한 내용이라든지 그가 보여준 리더쉽을 경제나 사회 심지어 정치에 어떻게 연결시켜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의 책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월드컵을 얘기할 때 그의 탁월한 지도력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이 그의 지도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운동장에서 열심히 달린 우리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그 신화를 이룰 수 있도록 목이 터져라고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친 우리 국민들의 단합된 모습이 없었더라면 이런 결과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거리로 나오라고 억지를 부린 적이 없었습니다. 강제로 동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이번 월드컵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들이 함께 모아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응원에 나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목이 터져라고 외친 이유는 한가지였습니다. 즉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몇 년전만 해도 우리 대표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면서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그렇게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붉은 악마'라는 명칭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월드컵의 개최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시점에서 많은 염려들이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국민들이 호응을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국민이 적극적으로 동참을 해서 월드컵은 성공적으로 그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세계언론에서 찬사를 보내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역시 거리응원에 나선 우리 국민들의 단합된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열심히 응원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국민들은 '한번하자'라는 공감대가 형성이 되면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수년 전 건국이래 최대의 경제위기에 직면했던 우리들이었지만 함께 극복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져서 외국에서는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는 '금모으기 운동'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 일은 누군가의 제의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한가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월드컵의 열기에 가려져 정말 우리가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고 생각을 모아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월드컵 기간 중에 미군장갑차에 치여 우리의 여중생 2명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사람이 죽었는데 정작 사고를 낸 당사자들은 그 일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고, 사고를 낸 자들을 기소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방지를 위한 어떤 조치를 취하고자 하는 일에 우리가 함께 힘을 결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청 앞에서 수십만 아니 일 백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축구응원을 위해 모인 시각, 미군장갑차에 치여 죽은 여중생을 위해 미국의 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위한 모임에는 기껏 수백명 정도만 모였을 뿐입니다.

    물론 모인 숫자만을 가지고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 라고 부정적인 생각을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기간동안 거리 응원전에서 보여주었듯이 이 일에도 함께 생각을 공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을 만난 한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수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강요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믿음을 가질 것을 종용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서도 안됩니다. 내가 만난 예수에 대해 증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를 만난 한 여인의 증거로 인해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본문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39절에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난 예수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사마리아여인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을 그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동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한 사람의 증거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과 둘째로 우리가 증거하고자 할 때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의 한 마디가 하나님 나라 확장에 무슨 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수 만평이나 되는 땅에서 추수하는 일에 나 한사람의 힘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수 만평에 달하는 땅에서 엄청난 곡식을 거두어 들여야 하는 일에 나 혼자의 힘이 얼마나 보탬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영적추수의 현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증언이 수 많은 사람들을 회심케 했던 일들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예를 든다면 구약의 요나 선지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성을 향해 외쳤습니다. '사십일 후면 니느웨 성이 멸망당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사실 이 메시지는 죽음을 각오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 한 사람의 증거가 온 니느웨성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니느웨성 전체가 회심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교회사를 통해서 살펴보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의 증언은 수많은 사람들을 회심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여인의 증거가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주께로 나아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추수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엄청난 추수를 계획하고 계시며 우리들을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힘이 될까?" 하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잘못입니다. 그저 주께서 모든 것을 하시리라 믿고 주께 쓰임 받는 도구가 되면 됩니다.

    또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추수의 현장에서 나의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증거하신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에 내려가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말한 것을 증거했습니다. 자신의 말을 덧 붙히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지도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했습니다. 사실 그 일은 굉장히 부끄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녀가 다섯 번이나 결혼한 사실과 지금 살고 있는 남자는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녀만의 부끄러움이며 상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 일을 언급하셨기에 그녀는 그 사실을 말했습니다. 자신에 대해 주께서 말씀하신 그 내용을 그대로 동네사람들에게 증언했습니다. 물론 같은 동네사람들인지라 그녀에 대한 얘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그 일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약점을 말로 표현해버리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버린다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그것을 드러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상당한 치명적 손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말씀이기에 그녀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도 드러내 놓았습니다.

    종종 우리는 영적추수의 현장에서 나의 말을 한다든지, 없는 얘기를 선한 뜻에서 꾸며내어 하려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려는 태도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주를 의지하며 신뢰하고 있다면 내 계산에 의한 말과 행동보다는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여인의 말을 듣고 이렇게 쉽게 사마리아인들이 주께 나아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만난 사람의 증언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쉽게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올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여인뿐 아니라 모두가 다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상처입니까? 그들이 유대민족으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상처일 것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도 섬기고, 예배도 드렸지만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들이 축복의 산이라고 생각했던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만났을 뿐 정말 살아있는 감격의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배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들이 처해 있는 현실은 그런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는 것과는 너무도 멀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도 마음에 큰 상처로 자리를 잡고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답답함이 그 심령 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예배에 대해 그들에게 너무도 속시원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여인은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문제가 속 시원하게 풀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모두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동안 목말라 했던 예배에 대한 열망이 해결되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둘러 주께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풀리지 않는 문제들은 어떤 것입니까? 속 시원하게 해결을 받고 싶은데 해결되어지지 않는 것들이 어떤 것입니까? 어떤 분들은 설교를 통해서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치유되어질 것에 대해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설교를 통해 우리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부정과 부패가 척결되어질 것을 소망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인 삶과 시대를 읽을 수 있는 냉철한 비판력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런 것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축복을 말하는 곳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몰립니다. 정의를 말하는 곳에는 젊은이들이 모입니다. 냉철한 역사의식을 말하는 곳에 의식있는 사람들이 몰립니다. 그런데 참된 복음이 선포되어지는 곳에는 의외로 반응이 없습니다. 죄를 지적하고 예배의 삶을 회복하라는 곳에는 왠지 부담스러워하고 가지 않으려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혹 질병의 치유에 대한 목마름이 아닙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목마름이 아닙니까? 왜 우리사회가 이렇게 부패한 것일까? 하는 생각과 더불어 부정부패가 추방되는 사회에 대한 목마름이 아닙니까?

    물론 그렇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우리의 진정한 목마름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로 나아오게 하는데 있어서 진정한 공감대일까요? 예배의 회복에 대한 공감대가 과연 저와 여러분에게 형성되어져 있습니까?

    사마리아여인이 동네에 내려가서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사실을 사람들에게 고백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자신의 개인적인 부끄러움 보다 모든 사람들의 삶의 회복되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회복되어지고, 예배에 대한 열망이 채워진다면 나는 좀 불편하고, 나는 좀 힘들어도, 참고 인내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내가 피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못합니다. 뛰어들어도 이미 자기의 방호벽을 구축해 놓고 뛰어듭니다. 그러다가 내가 힘들어지거나 내가 감당키 어려우면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슬그머니 빠져 버립니다. 이런 태도는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설령 내가 좀 힘들어도 다른 사람이 기뻐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가 어려움을 겪어도 다른 사람이 그 일로 편안해 질 수 있다면 참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사마리아여인은 자기의 가장 부끄러운 과거를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왜 그것을 드러내 놓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그 일을 자신에게 언급하셨고 자신은 그것을 통해 주를 만나는 감격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보다는 남을 생각한 사마리아여인의 솔직한 고백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즉각적인 공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40절을 보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 곁에 오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였습니다.

    마치 4강 위업을 달성한 히딩크 감독을 우리나라에 계속 머물게 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명예시민증도 수여하고, 귀화할 경우 '희동구'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려 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요청에 따라 이틀을 더 그곳에서 유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왜 이틀을 더 유하시게 되었는가? 라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흘일수도 있고 하루일수도 있는데 왜 이틀을 유하였는지를 질문합니다. 그런 질문은 의미없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했다는 점과 주님께서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요청하면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멀리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말로는 '가까이 있고 싶다.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라고는 하지만 실제의 삶 속에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 하는 마음들이 많습니다. 혹시 내가 그런 마음의 소유자가 아닌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들은 실제로 주님이 나의 삶에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일까요? 주님이 어려운 분이기 때문이라구요? 물론 어려운 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권위주의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벗'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분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일까요? 혹 내가 감당해야할 몫이 많아지게 될 것이 염려되어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기대에 내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한때 황영조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금의환향(錦衣還鄕)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 국민이 그가 계속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본인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돌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퇴선언이 부담감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부담감이 얼마나 그를 괴롭혔는지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감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은퇴를 선언해 버리는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다 준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설령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지신 기대감에 내가 부응하지 못할까봐 염려된다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께 더 큰 실망감을 안겨다주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사실 이 본문에서 왜 이틀을 계셨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41절에 보면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라는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믿는 자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전도하면서 내가 그 사람을 믿게 해보려는 생각이 많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전도를 했는데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한 실망감입니다. 물론 전도를 했더니 교회에 바로 나와서 등록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믿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결국 내 중심의 시각에서 비롯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을 무조건 잘못되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은 거기까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고난 후 나에게 일어나게 된 변화에 대해서 말할 뿐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며, 그분을 통해 우리가 어떤 삶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인지를 말할 뿐입니다. 그분을 믿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오직 그 분이 하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분을 믿게 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간증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아그립바 왕앞에서 자신의 간증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간증은 간증일 뿐입니다. 믿음을 갖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것은 주의 말씀입니다. 간증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간증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경우 주의 말씀에 대해 올바른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의 활력과 무장을 위해 때때로 간증이 필요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간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이 간증에 매달리는 자세는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42절에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이 여인의 간증이 너무 은혜스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이 경험한 것들이 너무도 신비스러웠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것은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확인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이 말씀만 듣고도 예수를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면 실로 대단한 믿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그들 앞에 있는 분은 유대인 청년임에 분명하지만 단순히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유대인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이분은 세상의 구주이셨습니다. 그 사실을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말씀을 듣는 자리에 최우선적으로 나아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좋은 줄은 알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어 버리는 경우 많습니다.

    "말씀이야 다음에 또 들으면 될 것 아닙니까? 많고 많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굳이 오늘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주일 오전에 한번만 예배를 드리면 되지 무엇 때문에 주일 저녁이다 수요예배다 거기에 금요기도회까지 나올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나 그렇게 하지,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일주일에 한번 예배만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런 분들의 오해가 무엇입니까? 언제나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집안에서도 설교들을 수 있는데 굳이 예배에 참석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금이 어떤 때라고 했습니까?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추수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농부들은 그곳에서 손을 놓아버릴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아직 넉달이나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를 것이라고 했는데 주님은 지금이 추수의 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사람이 생각하는 때와 주님이 생각하시는 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생각하시는 기회가 지나가면 더 이상 기회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루면 안됩니다. 다음에 들을 수 있겠지 하면 이미 때가 늦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듣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일주일에 한끼 식사만 하고 일주일을 버텨보겠다는 사람과 같습니다. 물론 한끼 먹고 일주일 못 버틸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끼 먹고 일주일을 견디는 것은 말 그대로 견디는 것입니다. 버티는 것입니다.

    가끔 금식을 하시는 분들 중에 말 그대로 버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금식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하지 않고 자신이 정해놓은 기간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티기 작전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40일 금식기도한 사람들 중에서도 40일 금식기도하고 얻게 된 것이 겨우 '인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40일기도를 할 때는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계획과 자신을 향한 선하신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 였을터인데 버티기 작전으로 나가다 보니까 깨달아지는 것이 그 수준밖에 이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삶에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그 말씀이 자신의 삶을 지탱케 하는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또 그 말씀을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줄 알았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지난번 중국 선교는 참으로 의미 깊은 시간들이었습니다. 모든 공부를 마친 후에 질문을 주고받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질문은 매우 날카롭고 때로는 저로 하여금 당황케 만드는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우리들이 잘 다루지 않는 레위기의 말씀으로 저에게 질문하는데 질문이 너무도 예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강의를 마치고 그들은 저를 향해 축복송으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어떤 학생들의 눈가엔 눈망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편지를 써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물론 한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으로 그 편지 글을 읽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말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두고 돌아온다는 것이 무척 저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지금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알았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알았다는 것은 단순히 주님의 말씀만을 들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이틀동안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무엇을 보았겠습니까? 그분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에 관심을 가지고 살폈을 것입니다. 만약 말만하고 이틀동안 전혀 구세주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누가 그분을 구주로 고백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서 '앎이니라'고 말할 때 알았다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그분에 대해 알았다는 말씀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치 부부가 함께 지내면서 그의 실체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통해 환상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던 아내가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곱니다. 깔끔하게 보였던 남편이 붕붕 방귀를 끼어 대면서 의외로 지저분한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또 함께 생활하다 보면 꿈 같은 환상에서 깨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결혼 전에 알지 못했던 인품과 자상함이 결혼생활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더 깊은 신뢰와 사랑이 결혼을 통해 쌓여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도 바칠 수 있노라는 각오도 하고 아내는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남편을 사랑하겠노라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주를 알았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이틀동안 그들은 말씀에 일치하는 그분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로 인해 그분이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세상의 구주로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분을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는 삶의 모습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의 삶을 어떠하십니까? 주님이 여러분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니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고백하는 삶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계십니까? 한 사마리아 여인의 증거는 수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렇게 쓰임 받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독자 설교

    설교작성하기 (3년 후에는 자동삭제됩니다.)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설교


    이전으로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오병이어의 기적
    미래를 준비하는 삶
    사람에게 구하지 않는 영광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두종류의 부활
    아버지와 아들
    두번째 만남과 안식일 논쟁
    네가 낫고자 하느냐?
    두번째 표적
    예수를 믿게 된 사마리아인들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
    우물가의 여인 (4)
    우물가의 여인(3)
    우물가의 여인(2)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 김효자 /사업자번호831-29-0156/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 /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4394-4414 /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