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실제적인 핍박이 헤롯왕에 의하여 실행되게 되어서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가 죽게 되고, 베드로도 잡혀가서 옥에 갇히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헤롯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은 단지 유대교에 깊이 빠져서 기독교도들을 멸시하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뿐이었다.
즉 자신의 통치적인 편의를 위해서 무죄하고 선량한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일에 서슴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 그 몸에 벌레가 생겨 그 벌레에 먹혀 죽는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는 모두 네 명의 헤롯왕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대헤롯으로서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자이고(B. C 37~A. D 4, 마2:16-18).
둘째는 헤롯 아켈라오 인데 그는 대헤롯의 4째 아내인 사마리아 여인의 소생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나 곧 폐위되어 정배 당한자이다(A. D 4~6, 마2:22).
세 번째는 헤롯 안타파스 인데 그는 갈릴리와 뵈뢰아의 분봉왕으로, 아켈라오의 동복동생으로 제수이며 질녀가 되는 헤로디아를 빼앗고, 세례요한을 목 베어 죽인 자이다(B. C 4~A. D 34, 마14:1-12).
네 번째는 헤롯 아그립바 1세로 대헤롯의 손자이며 헤로디아의 동복 오라비였다.
이가 바로 본문에 등장한 헤롯 왕으로 기독교인과 교회를 핍박하다가 그 몸에 벌레가 먹어 죽은 자이다.
1. 야고보의 순교를 배웁시다.
1) 야고보는 헤롯의 박해를 받았다.
헤롯은 사단의 사용되는 악의 도구로 사용 되고 있었다.
1절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라고 하였다.
사탄은 어찌 하든지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게 한다.
헤롯은 이 사탄의 사용물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도 세상의 권력이나 물권이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사탄은 권력의 위력과 그 활용성을 잘 알기 때문에 이처럼 권력을 동원하여 기독교인을 잔해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 권력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탄이 권력이나 금력을 동원해 기독교도들을 잔해하면 오히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 발전과 선교발전의 기회를 삼으신다.
또한 하나님은 그 박해의 고난을 통해 성도 개인에게는 확고한 신앙을 뿌리 내리게 하시며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믿을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하신다.
3절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를 잡으려 할새”라고 했다.
헤롯이 야고보 사도를 칼로 죽이자 유대교의 유대인들은 매우 기뻐했다.
왜냐면 그들이 하고자 했던 일을 헤롯왕이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롯은 베드로마저 죽이고져 옥에 가두고 말았다.
헤롯왕은 순조로운 통치를 위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져 했으나 우리는 그의 무지함을 발견한다.
그는 사람들에게는 칭찬 받지만 이미 하나님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총명이 어둡고 지혜가 막힌 무지한 자들은 항상 자기의 꾀에 자기가 속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악한 자도 조심해야 하지만 이처럼 무지한 사람들을 더욱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2) 야고보는 누구입니까?
o. 순교자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인 사도요한의 형제이다.
o. 그러므로 “주의 형제 야고보”(갈1:19)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10:3)와 구별해야 하는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작은 야고보”라 하고, 여기 순교한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큰 야고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다.
o. 특별히 큰 야고보는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형제 요한과 더불어 “보아너게”(우뢰의 아들)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성격이 급했다(눅9:54).
o. 막10:35-44에 나타난 것을 보면 요한, 야고보 이 두 형제는 명예욕이 강하여 주님의 좌우편에 앉고 싶어 했으며,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막10:39)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이 말씀 속에는 이미 그의 순교가 암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본문의 야고보는 큰 야고보로 헤롯의 칼에 의하여 12사도 중에서 첫 순교자가 되었다.
스데반집사의 순교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는 비교도 안 되리만큼 야고보의 순교에 대한 기록은 너무 짧은 한 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짧은 기록에서도 초대교회 사도들과 집사들과 성도들은 한결 같이 신앙을 제일로 여겼으며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령에 충만하여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바로 마10:28 대로 “몸은 죽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라고
구성지게 이 찬송을 부를 수는 있으나 실제로 그런 믿음을 실천하고 살아가는지요?
세상에 난발되는 부도 수표처럼 우리의 신앙도 “부도 신앙”이 되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계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사대 교인들을 향해 지적하셨듯이 우리를 책망하시지 않고 칭찬 하시도록 행함과 진실함으로 신앙생활하며 서로 섬기며 격려하고 주를 증거 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교회 태동부터 주님의 죽음을 통해 세워졌으며 그가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초대교회 시초에 집사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그 후 야고보 사도를 비롯해서 Paul, 베드로 등의 순교로 인해 열매를 맺게 되었으며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름 없는 성도들의 수많은 순교의 피로써 기독교는 맥을 이어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주님은 야고보 사도와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다.
여기에 비겁자, 배신자, 배도자가 되지 않고 예하며 따르는 자 되시기 바라며 그러려면 지금의 삶이 성령의 감동마다 예라고 하면서 실천적인 삶이 따라야 된다.
성도에게 있어서 순교는 축복에 해당 한다.
성도의 살 곳은 이 땅이 아니요 저 하늘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우리의 본향이요, 고향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적 죽음은 본향에서의 삶을 위한 것이요, 큰 상급과 면류관을 받은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은 “나는 하늘나라의 향수병에 걸려 있다”고 했다.
성도의 신앙적 삶이란 야고보를 본 받는 순교를 각오한 생활이어야 한다.
2. 베드로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3-4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고 했다.
우리는 베드로의 생애를 십자가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십자가 현장, 그리고 그 이후로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십자가 이전에의 베드로는 고난의 의미를 몰랐다.
십자가 이전의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받아야할 참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요6장에서 예수님께서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는 이적 기사를 읽을 수 있다.
그때에 많은 무리가 왕으로 삼으려 하니까 주님이 피신해서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다.
이튿날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의 떡과 음료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참된 고난의 의미를 알려 주셨다.
그 말을 듣고 모든 무리들은 주를 위한 고난이 두렵고 싫어서 다 흩어져 버리고 제자들까지도 머뭇거리고 있을 때 “너희도 가려느냐?” 하는 예수님의 침통한 질문에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는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로 믿고 알았습니다”
이것은 믿음직스럽고 훌륭한 신앙고백이었다.
그밖에도 베드로는 언제나 맨 먼저 나서서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수차 다짐까지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를 위한 고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럴듯한 감정과 고백은 있었지만 그것이 곧 피와 생명까지 희생하는 죽음의 길이라는 사실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했다.
여러분!
진부한 질문 같으나 고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꼭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십자가지지 않고도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영생을 얻으며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마귀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사이에 무서운 전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전에 알지 못했던 특별한 고난이 찾아오게 된다.
이 고난은 전에 느꼈던 세속에서 받는 그 고난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 없이 예수님을 믿으려 하거나 십자가 없이 구원 받으려 하는 것은 마치 등산하지 않고 산에 오르려 하거나, 십자가 없이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으려 하거나 배를 타지 않고 망망대해를 건너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특별한 의미의 고난을 분명히 깨닫고 주님과 함께 이 고난의 능선을 넘어 겟세마네 동산까지 올라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베드로는 십자가 현장에서 고난을 회피했다.
십자가 사건 이전의 베드로가 고난에 대해 자신만만한 태도를 취했다면 십자가 현장에서 고난을 감당해야할 시점에서는 너무도 비겁하고 나약하기만 했다.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가 너무도 쉽게 포기하고 배신하였으며 심지어 주님에 대해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하고 고난의 자리를 피하여 갔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고난의 길 앞에서 소리 없이 주저앉고만 베드로의 비겁한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후에 크게 회개하고 자신이 쓴 서신들에 보면 그 기록의 내용의 절반 이상이 고난에 대한 권면과 경고로 되어 있다.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했고
벧전3:14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말며 소동치 말라”고 했으며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가르친다.
왜 베드로가 이와 같이 고난에 대해 거듭해서 언급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베드로가 쓰라린 자신의 부끄러운 실패의 역사를 통해 고난의 참된 의미와 고난을 이긴 자의 축복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다가 실패의 쓴잔을 마셔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혹 신앙의 실패이든, 인간관계나 사업상의 것이든 그 실패의 장에서 피하거나 자꾸 도망가려하지 마시고 겸손히 주님의 손을 잡으시고 주님과 함께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서 성공과 승리의 자리로 가게 되었다.
3) 십자가 사건 이후의 베드로는 기꺼이 고난을 감내했다.
오순절의 성령 충만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도 베드로는 극심한 박해를 받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승을 배신하고 구원자 주님을 부인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옛 어부 생활을 계속하고 있던 베드로가 이제는 당당하게 고난의 무대 위로 나서고 있다.
이미 헤롯왕은 칼을 들어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를 죽였고, 베드로도 무교절이 지나면 처형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형 받을 당사자인 베드로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저는 신대원 3학년 시절에 서울 서대문 형무소 사형 집행장에 견학 간적이 있다.
그때 형집행시에 입회했던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형수들은 이미 반은 죽은 상태에서 끌려나와 최종 심문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잠을 자고 있었다고 했다.
아니 내일 아침이면 죽어야 하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아마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신뢰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런 상황에서 평안한 단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삶도 죽음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런즉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당신의 이름에 찬송을 드립니다”하는 실천적 신앙고백을 가지고 자신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겨 버렸기에 그는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했을 만큼 깊은 단잠에 빠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o. 왜 우리는 삶이 풍요롭지 못하고 각박해지고 마음속에 참된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사라져 갑니까?
o. 왜 밤잠을 자지 못하고 초조와 불안 가운데 몸부림치며 초췌해집니까?
그 이유는 내 모든 것을 베드로처럼 주님께 다 맡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인생의 여러 경험들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염려를 주님 앞에 맡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배울 수 있었다.
훗날 베드로는 벧전5:7에 고백하기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다.
무슨 뜻입니까?
“나의 경제적인 어려움도, 자식들에 관한 염려도, 내 삶의 절박한 문제도, 내 사업상의 염려, 내 진로의 염려도 다 주께 맡겨버리라”는 뜻이다.
내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 버리면 즉시 그 모든 문제를 주님이 다 받아 맡으시고 끝까지 책임지시고 다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해결 받는 경험을 쌓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들은 어려울수록 기도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고 물어 보실 때 선뜻 대답하고 나서면서 주님과 함께 골고다 길을 걸어간 후에 영광의 새아침을 맞이하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