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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카페 마담이 된 까닭은? / 교회를 위한 성경 2007-10-13 19:14:15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노컷뉴스 2007-10-09 18:02:02]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민들레영토의 희망스토리 - 지승룡 대표(1)
서른여섯 나이에 직업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가 종업원에게 ‘자리 차지 그만하고 빨리 나가 달라’는 면박을 당합니다. ‘내 돈내고 맘대로 쉬지도 못하나?’'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정성이 담긴 카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그는 결심했죠. 가래떡 장사, 옷 장사로 종자돈을 마련하고 신촌 기찻길 옆에 ‘민들레영토’라는 카페를 냈습니다. 자칭 ‘다방 마담’ 지승룡 대표…. 그는 어머니의 마음을 나눠주는 원칙을 끝까지 지켜 냈고, 독특한 경영으로 ‘민들레영토’를 전국에 수십 개의 체인점을 갖춘, 카페 브랜드 인지도 1위, 고객만족도 1위의 외식업체로 만들었습니다.
‘가난은 찬스일 뿐이다’고 말하는 ‘민들레영토’ 지승룡 대표가 무일푼의 실직자에서 CEO로 성공하기까지그 성공 노하우와 따뜻한 감동 스토리를 10월 9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 ‘민들레영토’
▶ 스스로를 ‘다방 마담’으로 부르시던데요?(웃음)
가을이 깊어지면 고향이 생각나고 또 고향의 풍경도 생각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다방이고, 그곳에서 열심히 살아갔던 마담의 모습이 우리가 갖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것 같아요. 그런 풍경들이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고향의 한 모습이었으면, 그런 이미지를 주면 좋지 않을까 해서 다방 마담하면 저도 왠지 모르게 정겹게 느껴지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 민들레영토 카페가 여러 가지로 독특해요. 처음 10평으로 시작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무려 400배나 커졌다고요?
개수의 의미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처음 시작할 때는 10평이었는데 지금은 전부 합하면 6천 평정도 될 것 같아요. 처음 시작할 때보다는 많이 성장했죠.
▶ 민들레영토가 혹시 영토 확장을 의미하나요?(웃음)
성경에 보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이 있어요. 제가 부드럽고 다른 것을 수용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니까 조금씩 공간이 늘어난 것 같아요. 그래서 온유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과 땅은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욕심을 갖아도 땅을 얻을 수 있고 욕심을 버려도 땅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민들레가 세상을 향해서 펼쳐가는 희망의 영토, 사랑의 영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어떻게 해서 이렇게까지 성장하실 수 있었을까요?
친구 따라 강남에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실제로 친구 따라서 강남 간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되었잖아요.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것에 대해서 마음을 여는 것, 자기 고집을 너무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또 다른 사람이 하자고 하는 것을 하다 보면 스케일이 커지고 마음의 폭도 넓어져서 새로운 것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성공의 가장 중요한 것이 ‘열린 지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열린 지식’을 가슴에 뜨겁게 담고 더운 가슴으로 사랑하다 보면 새로운 것을 향해서 나가게 되는 것 같아요. 실제로 행복한 성공을 하신 분들을 보면 마음이 많이 비워져 있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사랑하는 마음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저는 어느 영화가 재미있다고 하면 봅니다. 또 학교에서 어느 교수님 강의가 재미있다고 하면 듣거든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걸 잘 안 해요. 죄송스런 말이겠지만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사람들이 교수님이나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일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 지식을 한 번 갖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지식을 갖지 않고 자기의 지식만을 이야기하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다방 마담들은 새로운 지식이 떠돌아다니면 그걸 이 사장, 박 사장, 김 사장에게 전했다고요. 그런 정보들이 전해져서 우리나라 많은 중소기업 사장님들이 7,80년대 경제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요즘 우리가 어려워진 이유 중의 하나가 완고해지고 고집스러워져서 그런 것 같아요. 인터넷에서 토론하는 것만 봐도 자기주장만 하고 있더라고요. 그걸 깰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열린 지식이 아닐까, 그게 마담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 목회자에서 카페 마담으로 시작된 인생 2막
▶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을 졸업한 목사님이 어떻게 카페를 하게 되셨어요?
제가 두 가지 이유에서 직업을 마담으로 바꾸게 되었어요. 하나는 5리를 가는 자에게 10리를 동행하라는 말씀을 설교하는데, 말씀은 좋은데 듣는 분들이 와 닿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목사님이 대단히 이상주의적인 목회를 하시는 것 같다고 해요.삶의 현장에서 언어의 설교가 아닌 삶의 설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목마르게 하고 있었지만 그런 결단을 하기가 어려웠어요.
제가 행복한 가정생활을 갖지 못하고 이혼을 하게 됐어요. 이혼을 하고 나서도 목회를 계속하려고 했는데 현실적으로 이혼한 목회자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핸디캡을 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이런 문제로 계속 고민하는 것보다는 원래 꿈꾸었던 삶 속에서 복음을 나눌 수 있는 게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해서 직업을 바꾸게 된 거죠.
▶ 그 와중에 2천여 권의 책을 읽으셨어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첫째는 의지였어요. 장애가 올 때 마침표를 찍지 않고 장애는 이정표라고 생각하고 위기는 위대한 기회일 뿐이거든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지식이라고 생각해요. 우연히 도서관에서 읽은 책이 잔잔한 감동을 주었고 또 특별히 방송이라든지 잡지를 보면 아픈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을 때 정말 저도 행복할 수 있고 먹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래서 그분들을 위로할 수 있는 책들을 읽다 보니까 어느덧 책들이 쌓이게 된 거죠. 그때 3년간 이 카페를 경영하기 전에 도서관에서 집중적으로 읽었던 책이 지금의 저한테 많이 힘이 되는 것 같아요.
▶ 어느 카페에 들어가서 종일 있으니까 어느 종업원이 면박을 주었다고요?
책을 읽고 집에 오다가 마음이 쓸쓸하더라고요. 그래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마음을 위로받으려고 토요일 오후에 인사동의 어느 카페에 들어갔는데 토요일이라 손님들이 많잖아요. 제가 혼자서 오래 있었나 봐요. 처음에는 행주로 제 테이블 위를 닦더니 누구 안 오시느냐고 자꾸 눈치를 주더니 나중에는 솔직하게 이야기하더라고요. 토요일에는 손님이 많이 오시니까 다른 날 오시면 어떻겠느냐고...
그 말을 들을 때 제 나이가 서른여덟이었는데 이 나이가 돼서 혼자 그런 일을 당하니까 창피했어요. 후다닥 일어나서 내려오는데 갑자기 가슴이 찡한 거예요. 그래...카페에 오는 사람 중에 이렇게 외로운 사람이 많겠지? 그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이야기를 해 주는 주인아저씨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계단을 내려와서 제 가슴이 시원해지더라고요. 그날부터 카페가 신이 저에게 준 새로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하게 되었어요.
▶ 레스토랑도 있고 대포집도 있고,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왜 카페였나요?
카페는 신이 우리에게 준 사회의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차 한 잔 하자고 보통 그러는데 차 한 잔속에 인생이 담겨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서로 이야기하고 행복을 나눌 수 있고 왠지 모르게 따뜻하고 좋은 분위기를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감성을 채워줄 수 있는 게 도시의 행복한 공간이 아닐까 해서 그때부터 카페지기, 카페 마담으로 직업을 갖고 살아가게 됐죠.
◇ 가래떡 장사로 종자돈 모아 시작된 민들레영토
▶ 신촌에서 10평으로 시작하셨는데 소위 말해서 종자돈이 필요하잖아요.
가게를 내겠다고 하니까 주변에서는 목회하던 사람이 가게를 낸다고?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하고 비아냥대기도 했어요. 제가 봉급은 받아봤어도 직접 돈을 벌어본 적은 없잖아요. 돈을 빌려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공하는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걸로 돈을 벌어보자 싶었죠.
제가 좋아하는 것이 어렸을 때 생일날 상에 차려주신 가래떡이었어요. 저는 지금도 가래떡을 먹을 때 행복합니다. 한국 사람이 떡볶이 싫어하는 사람들이 없겠죠. 가래떡을 뽑아서 잘 산다는 압구정 현대아파트, 미성아파트 입구에서 좌판을 했어요. 제 목소리가 마담으로서 하늘이 준 목소리 같아요.강남주부들한테 따뜻한 가래떡을 방금 뽑아왔다고, 이 떡 집에 갖고 가면 아이들이 좋아할 거라고 이야기했더니 주부들이 정말 많이 사주시더라고요. 하루에 20만원씩 남겼으니까요.그게 6개월 정도 되니까 나중에 2천만원 정도 모았어요. 2천만원이 종자돈이 되어서 신촌에 가게를 얻어서 시작한 거죠.
▶ 흔히들 장사를 하려면 목이 좋아야 한다고 하는데 신촌에 목이 좋은 곳이 있던가요?
지금부터 13년 전인데요. 물론 큰 돈으로 사람이 성공할 수 있지만 저는 작은 돈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거기에는 지혜가 동반되어야 하는데 저는 버려진 곳에 보물이 있다, 쓰레기통 위에서 장미꽃이 핀다,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 있다는 메시지를 항상 가슴에 갖고 있어요. 그래서 장소는 좋은데 주인이 게으르다든지 이런 저런 이유로 가게를 잘 살피지 못한 곳을 눈여겨보고 그런 가게를 집중적으로 공략을 했는데 마침 주인이 게으르게 경영했던 가게가 있었어요. 그 가게가 2천만원으로는 얻을 수 없는 가게였는데 좋은 목에 자리 잡게 된 거죠.
▶ ‘민들레영토’라고 이름을 지으셨는데 의미가 있겠죠?
민들레꽃이 구덕초라고 해서 9가지 덕을 갖고 있어요. 이 민들레가 조선인을 상징하는 꽃이기도 해요. 그래서 해외에 있는 한인들은 스스로를 미국의 민들레, 러시아의 민들레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꽃이 바람을 이용해서 멀리 멀리 날아갑니다. 어느 기사를 보니까 240km를 날아간다고 해요. 땅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꿈을 향해서 도전하는 조선민족의 이미지가 아닐까,
이런 민들레가 새로운 지식사회에 또 문화사회에서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퍼져가는 뜻으로 민들레영토라고 지었어요. 그걸 줄이니까 ‘민토’가 되더라고요. 영어로 ‘민’이라는 말이 낮다, ‘토’는 발이잖아요. 다른 사람의 발을 닦아주는 서비스하는 사람, 세상을 서비스하자는 의미로 지었습니다.
▶ 그 장소가 허름한 양장점 자리였어요.
저도 나중에 알았는데 이 건물이 건축물대장에 없어서 무허가 건물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 무허가로 영업을 했습니다. 불법영업이었죠.(웃음) 그러니까 구청, 위생과, 주택과, 파출소, 소방서 등 고발한다고 해서 제가 그랬죠.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 건데 법을 몰라서 그런 거니 시간을 좀 달라고요. 이분들이 얼마나 지나야 다 지킬 수 있겠느냐고 해서 8개월만 달라고 했더니 그러면 그 안에 꼭 하라고 무사히 지나갔는데 이분들이 8개월이 되기 전에 다른 부서로 가시더라고요.(웃음)어려울 때 가장 중요한 게 버티면 돼요. 그런데 사람들이 어려울 때 촐싹대거든요. 조금만 위기가 오면 불안해하고. 물론 지금은 영업허가를 받고 영업을 하지만 버티면서 사람들한테 부탁하고 근성으로 버텼던 것 같아요.
▶ 처음 가게를 차리실 때 얼마나 들었어요?
보증금 1천 5백만 원, 인테리어 4백만 원으로 시작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조카가 인형을 갖고 있었는데 공중에 인형을 매달면 멋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조카한테 인형을 달라고 해서 인형을 매달기도 하고 또 우리 어머니가 이북에서 피난 올 때 갖고 왔던 새우젓 항아리가 있었어요. 새우젓 항아리에 꽃 하나를 얹었더니 그게 이상하게 멋있어요. 테이블 같은 경우에는 의자를 놓고 유리를 깔았더니 그걸 또 고객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궁 즉 통’이라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통한다고 생각해요. 가끔 어떤 분들이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느냐고 물어보시는데 저는 간단해요. 가난해서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 같아요. 어머니들이 줄 게 없을 때 이것저것 모으시잖아요. 그래서 미나리도 나오고 쑥도 나오는데 그게 다 가난해서 나오는 음식이라고 생각해요. 가난은 아이디어의 보고인 것 같아요.그런데 요즘 제가 아이디어가 궁해요. 옛날보다 돈을 좀 벌었나 봐요.
◇ 이색적인 문화 공간, 한 달 만에 흑자경영으로 돌아
▶ 얼마만큼 지나니까 자리가 잡히던가요? 6개월은 버텨야 한다고 들었는데요.
저는 처음에 가게를 시작할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40일을 버틸 수 있고 물을 마시면 120일을 버틸 수 있다고 해요. 그 얘기가 저한테 와 닿았어요. 제가 물장사를 한 거잖아요. 물만 먹으면 120일을 버틸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120일 동안 고객한테 목숨 걸고 서비스한다는 각오로 물과 컵라면만 먹으면서 120일을 버텼는데 한 달 만에 흑자경영으로 운영이 되었어요.
▶ 그 때 메뉴는 뭐가 있었어요?
메뉴는 없었고 손님들이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셨어요. 우리 공간에 와서 문화비만 내시면 음료들, 물도 있고 주스도 있었는데 그걸 드실 수도 있고 먹을 것을 갖고 오셔서 드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또 어떤 분들은 같이 계신 모든 분들이 나눌 수 있도록 하기도 했어요.옛날에 탤런트 이훈 씨 같은 분들이 친구들과 저희 카페에 오셔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어요.
▶ 그럼 장소만 빌려주시는 셈인데 뭐가 남으셨어요?
문화비라서 해서 고객들이 일정기간 돈을 내면 물론 저희가 준비한 것도 드시지만 가져오신 거 드시면서 저희가 상담도 해드리고 작은 미니공연도 합니다. 저도 살아온 가운데서 재미있는 이야기들, 토크쇼도 하고 또 고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도 나누고 해서 카페가 한 지역의 문화공동체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의도적으로 기획했던 것은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더라고요.
▶ 이색 문화 공간 같은데 다른 분들은 아직 그런 사업을 하지 않으실 때였나 봐요.
새벽 4시에 문을 열었어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모이를 먹는다고 하잖아요. 새벽에 문을 왜 열어? 찾아오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런데 클럽에서 나오는 많은 젊은이들이 술 깨려고 들어오기도 하고 이른 새벽에 도서관에 가기 위한 하숙생이나 대학생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또 택시운전을 하시는 분들이 잠깐 졸음을 피하기 위해서 들어오시기도 해요.
들어와서 책 한 권 보시고 공부하는 카페, 세미나 카페, 그리고 이른 아침에 올 수 있는 카페로 변화가 되었어요. 연극이나 영화 등의 공연문화는 아직이었지만 삶 속에서 마음을 열고 대화하고 행복을 느끼는 생활 속의 문화 공간 10평이 요술을 부렸던 것 같아요.
▶ 그 공간에 책이 있었다는 게 당시로서는 신선했던 것 같아요.
아는 선배님이 출판사를 하다가 망하셨어요. 선배님이 돈을 못 갚으신 적이 있는데 이 책을 갖고 가라는 거예요. 이 책을 어떻게 하겠어요. 가게에 갖다 놓고 오시는 분들에게 한 권씩 드렸죠. 그랬더니 어떤 분들이 이사 간다고 또 컴퓨터화가 되니까 책들은 별로 인가가 없어요. 제가 한 권 드리니까 열권씩 주세요. 매일 같이 손님들에게 책을 드린 적도 있어요. 버리면, 주면 더 많이 얻는다는 것을 가게 하면서 더 느낀 것 같아요.
◇ 차별화된 리필 시스템 ‘드시고 더 드세요’
▶ 카페가 젊은이들에게 사랑을 이어주는 공간이기도 하잖아요. 에피소드가 있으면 이야기해 주세요.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에 가게 앞에 머리가 긴 여대생이 서 있었어요. 제가 우산을 가져다 주었더니 여학생이 안 쓰겠대요. 그러면 들어와서 차를 마시라고 했더니 그 여학생이 저한테 그림을 그려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여기서 늘 만났는데 그 친구가 유학을 가서 다른 여자를 만났대요. 그러나 그 친구를 기억하면서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서로 대화하면서 제가 그 친구를 위로하고 또 가게에 오시는 손님을 소개를 했어요. 그러면서 즐겁게 만나면서 친구가 되었고 또 여대생이 졸업해서 취업을 하고 첫 봉급을 타고 저한테 와서 조그만 선물도 주었던 아름다운 에피소드, 사랑의 이야기들이 있는 공간이었죠.그런데 요즘에는 급격하게 커지니까 그게 잘 안 돼요.
▶ 요즘 젊은이들의 트렌드나 라이프스타일이 많이 바뀌기도 했어요.
다른 사람을 멋있게 해주기보다는 자기를 더 튀게 하려는, 보완이나 여유가 없는 것이 우리 시대의 약점이죠.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그렇게 변해가니까요. 내가 조금 뒤로 물러나서 다른 사람을 돋보이게 해 주는 게 깊은 감성일 텐데 우리가 다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아요.
▶ 당시에는 리필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인데, ‘민들레영토’에서는 리필을 많이 해주셨어요?
아이들의 깊은 가슴에 어머니의 영혼으로 들려주는 음성은 젖을 주면서 ‘먹고 더 먹으렴’하는 음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간에 오시는 고객들이 ‘드시고 더 드세요’하는 멘트를 하거든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사실은 음료 더 먹어야 배 나오고 살찌죠. 그 물질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말하는 내용 때문에 어머니를 기억하고 고객들이 행복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대화를 하다 보면 30분 정도 지나면 목마르잖아요. 그럴 때 마실 게 없어서 일어나서 나가는 게 아니라 대화할 때까지 대화하도록 2,30분에 한 번씩 저희가 회진을 다니기도 하고 손님들이 오시기도 해서 음료를 드리면 목마르지 않고 이야기를 하실 수 있죠.또 저희들이 배고프지 않게 라면, 떡, 빵 같은 걸 드리거든요. 그래서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드리자는 리필 시스템으로 차별화된 서비스를 하게 되었어요.
▶ 그러다가 2호점 내신 건 언제쯤인가요?
2호점을 내려고 해서 냈던 건 아니고 신촌이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많이 오니까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저희 가게에 와서 왜 연대에만 민토가 있느냐고, 우리 학교 앞에도 가게를 세워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2호점이 생겼는데 제가 내고 싶어서 낸 게 아니고 고객들이 내 달라고 무언의 압박을 많이 했어요. 만약 안 내면 다들 어른이 돼서 저희를 많이 미워할 것 같더라고요.
얼마 전에 광주 전남대학교에도 냈는데 부산하고 대구는 있는데 지역 차별하느냐는 얘기들이 있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었는데(웃음) 그렇게 해서 하나 하나씩 세워지고 있고 앞으로는 해외에도 생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현재 중국의 사천성 수도 ‘성도’라고 있는데 중국의 아주 표준적인 도시입니다. 그곳에 현지 중국인들이 직원이고 오시는 분들도 100% 중국인들이고 올 연말이나 내년 초에는 워싱턴에도 새로운 민들레영토가 생겨서 나름대로 국위선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이나 뉴욕 같은 경우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그런 곳에 생겼을 때 세계적인 이미지나 영향력을 준다는 의미에서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런 물밑작업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는 중입니다.
◇ 불안한 공존관계를 평화의 지역으로 바꾸고 싶어
▶ 우리나라에 스타벅스나 커피빈 등 외국 브랜드가 많이 들어와 있어요. 그런 곳과 민들레영토가 어떤 점이 다른가요?
제가 외국에 가서 시장조사를 하면서 물어봤어요. 왜 이렇게 스타벅스나 커피빈을 좋아합니까? 그랬더니 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푹신한 의자에 살던 사람들이 이렇게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과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편안했던 것 같아요.우리나라는 반대로 열심히 살다 보니까 불편함 속에 있는 편입니다. 한국은 오히려 편안하고 푹신한 의자가 편안함을 주지 않을까, 편안함이라는 건 같은데 풀어가는 방법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단 한 가지, 만약 워싱턴에 ‘민토’를 낸다면 이 기금으로 바그다드 어린이를 위한 교육기금으로 쓰려고 해요. 워싱턴과 바그다드의 불안한 공존관계를 한국 사람이 시작한 한 카페가 평화의 지역으로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 13년 전 10평에서 지금은 엄청나게 넓어졌는데 다 일일이 관리하실 수 없잖아요. 그러다 보면 처음 생각했던 분위기나 의도와는 동떨어질 수 있는데요.
공간이 확장되면서 고객과 만나는 임팩트가 많이 떨어지더라고요. 한동안 이런 부분 때문에 많이 혼돈스러웠어요. 그러다가 찾았어요. 저보다 더 순수하고 열정적인 젊은이, 제가 사랑하고 함께 하는 직원들을 만나고 만들어 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직원들이 저를 위해서 일하는 수단이 아니라 저와 함께 같이 걸어가는 동역자이고 그들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동반자인 거죠.
▶ 워싱턴에 지점이 생긴다고 하니까 바그다드뿐만 아니라 방글라데시, 아프리카 지역 등 그런 곳에 연결이 된다면 더 뜻있는 일일 것 같아요. 그런 일을 하시니까 잘 되는 것 아닐까요?
커피라는 말의 원어는 ‘카파’입니다. 이 카파는 이디오피아의 어느 가난한 도시의 이름이거든요. 그 도시의 한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서 커피 열매를 볶다가 발견된 것이 커피가 된 건데요. 커피 생산지를 보면 전부 가난한 나라에서 커피가 나요. 아마도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과 커피를 마시는 잘 사는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나눌 수 있도록 나누신 것 같아요. 커피 한 잔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여유를 넘어서 제3세계 어린이들과 그들의 어머니를 기억하는 특별한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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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성경읽기
한국성서학연구소 주최 ‘교회 위한 성서해석’ 학술대회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김중은 총장 / 장로회신학대학교
Ⅰ. 한국교회 신앙과 신학의 성격
금년 2007년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교회부흥의 역사를 사모하고 간구하는 뜻 깊은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한국성서학연구소도 이제 창립 16주년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에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러한 성서학 학술마당을 개최하게 된 것은 뜻 깊은 일이다. 교회의 올바른 역사 진행과 그 방향성은 “성경을 어떻게 믿고 있느냐?”라고 하는 성경관에서 그 판가름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성경관에 대한 물음은 또한 신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오늘 한국교회와 신학이 혼란스럽고 혼돈과 위기감을 느낀다면, 그 증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성경에 기초한 바른 신앙과 성경을 중심한 바른 신학에서 멀어진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와 신학교가 오늘 세계교회로부터 주목받는 교회와 신학교로 성장하게 된 그 성격과 특징이 다른 데 있지 않고 처음부터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와 성경을 사랑하는 신학교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비밀은 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고 생활하는 데 있었다고 본다. 특히 한국 장로교회의 목회와 신학은 성경을 기초로 하는 성경중심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 초창기부터 성경공부를 중심한 사경회가 성행하였으며, 이러한 사경회에 대한 열심은 어느 교회나 지역에 국한 된 것이 아니고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위시하여 전국 교회적인 현상이었다. 그래서 한국교회사에서는 이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매우 중요한 평가를 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성경 중심의 신앙이 대부흥운동의 동인(動因)이 되었으며, 또한 그 후 복음주의적인 한국교회의 정형을 이룬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한국교회의 성격 형성과 그 부흥의 비결은 성경에 있다. 한국 장로교회가 특히 복음주의적인 신앙과 신학을 그 정체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곧 성경 말씀대로 믿고 그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을 힘쓴다는 의미이다. 복음주의의 다른 이름은 성경주의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와 신학이 나아가는 방향을 조정하는데 마치 망망대해를 향해하는 배의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 우리 교회와 신학은 위기의식을 느낄 때 마다 다른 무슨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행사나 교육과정에 관심을 쏟기 보다는 성경 말씀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가 상실되면 다른 모든 권위도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오늘 현대사회의 권위부재로 인한 무질서와 혼란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한 결핍증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암8:11-13;신8:3 등) 세계 교회사에서 우리 한국 장로교회는 16세기 서구 종교개혁운동, 특히 스위스 개혁교회의 후예이며, 역사적으로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은 로마 천주교의 잘못된 교리를 회복하는데 언제나 성경을 그 중심에 놓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우리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앞세우는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동안 1907년 이후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다. 기독교는 한국에서 그 본질적 성격을 상실하였고, “지금 대다수 한국 기독교의 특징은 유교, 불교, 특히 무속의 여러 요소가 섞인 민간 종교의 습성이 기독교적인 껍질을 쓴 꼴로 나타나 있다.”는 지적이다. 정재식은 “평양대부흥운동”과 “백만구령운동”이 오늘 한국교회 주류의 기본적인 성격과 방향을 결정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잘못된 것으로서, “한국의 기독교는 감정적인 흥분을 통해 현실의 정치나 사회를 떠나 자기 자신에 몰두함으로써, 공공의 윤리와 정치-사회적 책임을 등지고, 개인의 주관적 심령의 차원에만 전념하는 전통을 낳았다”는 것이다. 예수재림과 천년왕국을 고대하는 믿음, 열렬한 새벽기도, 축어적 성서해석, 열의에 찬 부흥회가 한국 기독교의 두드러진 성격인데, 한국교회의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의 문화코드를 따름으로써 예언자적인 정신을 망각하고, 도덕적인 감수성과 사회적인 책임감을 저버린 데 있다”고 꼬집었다. 또한 기독교도 ‘이득의 수단’이 되고, “노골적으로 경제적이며 타산적인 동기에서 심령의 힘을 빌려 현실의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다 맞는 말은 아니라고 해도, 오늘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길은 없고,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을 진단하면서 일찍이 임택진은, 일제 식민지 탄압 아래의 역사를 거쳐 6․25의 고통을 겪고 오늘에 이른 현재 한국교회는 과거의 한국교회가 아니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면서, “교회도 변했고 교인도 변했고 따라서 목사도 변했다…그런데 잘 변했는가, 잘못 변했는가가 문제일 뿐이다…오늘의 교회 현실은 잘못되어도 여간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고 기술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서도 이러한 목회 현장의 잘못은 여전히 시정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임택진은 오늘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가 전반적으로 부정과 방종으로 인해 침몰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다른데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한국교회 자체에 도덕성이 약하고 영적 생명력이 시들고 있다는데 그 근본 문제가 있다고 올바로 지적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목회 현장의 현실이 이토록 악화된 데에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건전한 신학이 없었거나, 아니면 신학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변질되는 과정에서 신학마저도 잘못 변질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학은 독일에서 만들어지고 영국에 건너가서 수정된 다음 미국에 가서 부패된다는 말이 있다. 오늘 한국의 신학 현실도 목회 현실 못지않게 신학 아닌 신학이 난무하고 있으며, 무분별한 수입 신학 사조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신학도 다시 성경의 기초로 되돌아가야 한다(히 5:12-14).
특히 목회와의 관련에서, 소위 “성공적인 목회”를 표방하는 목회 신학의 타락상은 한마디로 한국교회 21세기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여기서 목회 성공의 척도와 기준은 철저하게 인본적이며, 어디까지나 물량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것 없이, 최소한 천명 이상 수만 명에 이르기까지 교인 숫자를 늘려야 하고, 수십 아니 수백억 원을 들여 화려하고 안락한 교회당을 지어야 하며, 목사는 현대인인 교인들의 종교-문화적인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히 “신학”의 설 자리는 없어지고, 어느 틈에 “인간학”의 기능과 가치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목회는 현대 기술 사회에서 또 하나의 종교적 “기술”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현실 목회에 세상 적으로 예민한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아무 쓸 데가 없다”고 불만과 자만의 소리를 외치며, 세상 적으로 똑똑한 신학생들이라면 케케묵은 신학교의 교육과정(커리큘럼)에 반기를 들고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신학적인 다양한 “기술”을 가르쳐 줄 것을 요구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교단 기관지 『기독공보』에서도 21세기를 맞이하여 우리 한국 교회가 시급히 그리고 반드시 개혁해야 할 10가지 과제를 조사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한 바가 있다:
1)신앙과 생활의 불일치 2)판치는 파벌주의 3)새어나가는 교회 헌금 4)계획성 없는 정책 5)무너진 교회교육(및 신학교육) 6)성장지상주의 7)빗나간 선거문화 8)대사회적 예언자 역할 상실 9)뿌리 없는 기독교 문화 10)개혁 없는 개혁교회. 그 중에서도 교회교육이 무너지고 신학교육이 무너졌다는 지적은 우리 모두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점이다. 왜냐하면 교육이 무너진 교회와 교육이 무너진 신학은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길은 없고, 성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Ⅱ.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의 신학노선
본 교단이나 장신대는 그 역사를 통해서 지금까지 한번도 “신정통주의”를 그 신앙의 중심이나 신학노선으로 발표하거나 내세운 적이 없다. 목회자나 신학교 교수 개인에 따라, 근본주의나 신정통주의나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는 점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본 교단이나 장신대의 신앙과 신학노선은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가 분명하다. 예장총회는 1979년 이점에 대해 이종성학장에게 다음과 같이 해명을 요구한 적이 있다. “귀하는 신정통주의를 장로회신학대학의 신학노선으로 삼겠다는 뜻입니까?” 여기에 대한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아닙니다…본 대학의 신학노선과 방향은 본 교단의 노선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에큐메니칼 운동노선에 근거하여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을 영위해 나가는 것입니다”(제64회 총회 회의록, 1979년, 101-08쪽). 역사적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 그 기초가 되어 “성경은 영감 되고 계신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성경관을 가지고, 성경중심의 설교, 성경중심의 목회, 성경중심의 신학교육을 하는 것이 그 장점이며 특징이다. 총신대는 개혁교회 정통신학의 “보수적 태도”를 가져갔고, 장신대는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의 “보수적 내용”을 중요시하며 지금까지 그 신학노선을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한숭홍 교수는 현 시점에서 장신대 신학노선은 “개혁 전통에 선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정리하면서 총신대의 “칼빈주의에 역점을 둔 근본주의 신학,” 또는 고신의 “근대화란 개혁주의에 기초한 근본주의 신학,” 기장의 “자유주의적 신정통주의 신학-진보주의 신학-신정통주의적 문화신학-민중신학”의 입장들과 구별한 것은 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Ⅲ. 성경읽기에서 성경관의 중요성
현 서울신학대학교 목창균 총장은, “20세기 개신교신학의 최대 전쟁터는 성경관이었으며, 논쟁의 핵심주제는 성경의 권위문제였다”라고 올바로 지적하였다.
과거 한국교회사에서 예장과 기장의 분열이 성경관의 차이에 그 원인이 있었다면, 오늘도 우리의 신학과 목회에서 성경관의 문제는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목회는 물론이고 신학교육의 내용과 모든 신학적 입장들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모든 신학의 출발점은 “성경”이다. 또 “성경”에 의해서만 우리는 목회와 신학의 잘잘못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목회와 신학의 현장에서 성경관의 중요성을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우리 목회와 신학 교육이 당면하고 있는 혼란의 또 하나의 현장이 있다. 책임 있는 신학자와 목회자라면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성경관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성경관의 문제는 물론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되고, 종교재판의 기소장이나, 개인적인 음해문서로 변질되어서도 안 된다.
성경관 문제를 정리하는 데는 먼저 성경의 무오(無誤), 유오(有誤)에 관해 정확한 개념 정리와 그에 따른 용어사용의 명확성이 필요하다. “성경무오설” 주장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신정통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유일무이한 법칙(준칙, 규범)이며 이 점에서 성경은 불오(不誤, infallibility)하나, 내재적인 사실 역사나 과학적인 지식에 관해서는 오류(errors, errancy)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와는 다르게, 근본주의나 복음주의는 “구원의 진리에 관해서는 물론이고, 과학적, 지리적 역사적인 지식에 있어서도 성경은 무오(無誤, inerrancy)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자유주의(또는 신자유주의)나 급진주의는 성경의 권위, 즉 영감과 계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불오나 무오를 원리적으로 따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한국 장로교 신학에서 기장의 초기 민중신학이나 종교다원주의 또는 감리교 신학의 급진적인 토착화 신학의 일부 탈성경적 성경관을 제외하고는 엄격한 의미에서 신학적 자유주의는 한국 신학계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신정통주의의 성경관이다. 신정통주의는 성경의 “불오(不誤, infallibility)”는 믿는데, 성경의 “무오(無誤, inerrancy)”는 인정하지 않는다. 신정통주의는 고등비평의 역사-비평적 방법을 성서해석의 예비지식으로 전제하고, 성경본문 해석은 최종적으로 신학적인 것(“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말하자면 영감(“사건 영감”)은 말하지만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은 반대하고, 기록된 성경은 계시가 아니라 참 계시인 예수그리스도 사건을 경험한 인간들(성서 기자들)의 “증언”일 뿐이라는 것이다. 성육신을 주장하지만 동정녀 탄생은 부정하고, 하나님의 창조는 말하지만 창세기 1-11장의 기록은 “원역사(Urgeschichte)”로서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이 아닌 상징적(또는 신화적)인 이야기로 해석하며, 출애굽의 구속사는 주장하지만 홍해(갈대바다)의 기적은 부인하고, <여리고>성의 함락도 실제사건이 아니고 믿음의 승리라고 설명하며, 요나서, 룻기, 에스더 이야기도 일종의 종교소설이며, 부활은 주장하나 육체적 부활은 부인하고(그러나 부활의 역사성에 관해서는 신정통주의자들 간에도 입장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예컨대, 바르트는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고수하는데 반해, 틸리히는 부정한다). 그리스도가 위대한 일을 했다고 주장하나 초자연적 기적을 행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때문에 신정통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고 가르치는 신정통주의가 한국 장로교회에서 자유주의의 아류(신신학)로 인식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 또는 유오설이 끝까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성경의 권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는 두 가지 요소들로 이루어지는데, 곧 계시와 영감이다. 계시는 성경이 인간의 종교적 체험이나 인간의 사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나타내신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 성경의 참 저자는 하나님(성령)이라는 뜻이다. 영감은 인간 기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할 때 잘못이나 오해가 없도록, 기록자의 사상과 말과 글을 성경의 참 저자이신 하나님의 성령이 친히 간섭하시고 돌보셨다는 뜻이다.(딤후 3:16; 벧후 1:21; 삼하 23:2 등)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은 백 퍼센트(100%) 하나님의 책인 동시에 백 퍼센트(100%) 인간의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성경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책이기 때문이다.
김명룡은 한국 장로교가 그동안 “신정통주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과 같은 것으로 가르쳐 온 것은 신학적 무지 내지는 근본주의적인 극단적 보수신학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신학적 왜곡”이라고 했는데,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성경관 문제에 있어서는 역시 왜곡된 말이다. 또 “성경내의 모순, 착오, 불일치, 오류들이 밝혀지면서 17C의 옛 정통주의 신학의 지주였던 성경의 축자영감설은 붕괴되었고…성경에 대한 역사비평학이 성경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결정적인 도구로 신학계에서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 것도 일방적인 주장이며 지나친 과장이다. 20세기에 세계 개혁교회와 장로교의 여러 신학교에서 주도적인 성서해석 방법론이 된 고등비평은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을 파괴하는 성격 때문에 경계의 대상이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 한국의 경우 이점은 1947년 조선신학교 학생들이 총회에 제출한 “51명의 진정서”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 당시 신학생들은 “우리가 유시로부터 믿어오던 신앙과 성경관이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하면서, “저들은 성경의 고등비평이나 자유주의신학은 결코 신앙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나 사실에 있어 파괴당하고 있는 데야 어찌합니까?"라고 호소했다. 이것은 과거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고 현재 우리 총회 산하 여러 신학교에서도 이러한 혼란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어쨌든 최근 미국 장로교의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구약교수 쿠트(R. Coote)는 미국 장로교회 목사 오어드(D. R. Ord)와의 공저 “성경은 사실인가?”를 통해 고등비평의 신앙파괴 문제를 “산타클로스 이야기”에 비유했다: 유아기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선물을 넣어 준다고 해도 믿었지만, 초등학교에만 들어가도 선물을 주는 것은 부모나 친척들이라는 것을 자연히 이해하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고 성서비평학이 가르쳐 준 대로 솔직하게 신학생들이나 교인들이나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초자연적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했다. 예컨대, 출애굽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고 팔레스틴에서 다윗왕의 종주권을 강화하고 팔레스틴 민족들의 공동의 적인 애굽의 압제를 함께 벗어날 수 있다는 신념을 주기 위해 다윗왕궁의 서기관들이 만든 서사시적 건국설화라는 것이다. 또한 신약의 복음서들은 역사적 예수의 삶에 대한 사실적인 진술이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성경의 영감은 무오성(inerrancy)과는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성경은 “경건한 허구”(pious fiction)일까? 세계 성서학계는 아직도 역사-비평적 방법이 참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도구”인가에 관해 계속 의심하고 있으며,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자서전을 출판한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도 일찍이 성서비평학의 문제로 심각히 고민하였으며, 결국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믿음의 결단으로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렸다고 고백하였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사람이라는 기독론의 명제에서, 우리는 예수가 백퍼센트(100%) 참사람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고, 죄가 있다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참 저자는 하나님이고, 성경은 계시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또한 백퍼센트(100%) 인간의 책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다고 선험적으로 규정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어폐가 있다(마 22:29; 막 12:27; 벧후 1:16 등 참조).
성경 문자의 우상화를 방지하고, 가현설적인 성경이해를 경계하기 위해서 성경의 역사적 성격과 그 형성사를 이해하는 것은 당연하나, 성경의 저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성경에 오류와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성경의 진정한 저자는 인간이 될 수 없고, 하나님(성령)이라고 하는 것이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입장이다. 박형룡이 바르게 말한 대로, “비평가들이 지적하는 소위 성경의 오류들은 난관들이요. 증명된 오류들이 아니다.” 복음주의 신학노선의 성경관에서는 성경에 “모순”(contradiction)이나 “오류”(error)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성경에 “난제”(Bible difficulties; Hard sayings)와 차이(differences)가 있다고 말한다. 역사적, 과학적, 지리적, 연대기적인 차이들은 “오류”라고 규정하지 않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 문화적인 시공의 간격에서 당연히 기대되는 지식정도나 관점의 “차이”로 인식한다. 그것은 오늘 21세기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 과학적, 역사적 지식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며, 성경의 오류를 최종적으로 판정할 만큼 만고불변의 절대적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 인간은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를 모르고 있으며, 우리의 판단은 상대적이며 잠정적이다. 신정통주의 신학이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그 장점들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한 아류로서 고등비평의 상대적인 지식을 성경본문의 명백한 진술보다 앞세우며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기 때문이고, 그것도 기록자의 실수나 본문 전승 상의 있을 수 있는 교정 가능한 착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역사성(historicity) 자체를 축소하는 데(reductionism)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정통주의를 대표하는 바르트의 성경관에서 결국 성경은 계시와 구별되며, 성경은 참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고, “성경은 단지 계시에 대한 인간적인 말일 뿐이다.” 이 성경의 인간적인 말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그 말씀을 통해 인간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성경은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영감은 “계시의 행위”지만, 그것은 성서의 인간적 증인들과 그 증언을 듣는 현재 우리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전체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때에도 “성서적 증인들의 인간적인 불완전성을 인정해야한다”고 바르트는 주장했다. 이것은 바르트가 종교개혁자들의 성경관을 20세기에 부활시킨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자들과 종교개혁전통의 성경관을 수정한 것이며,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언사(어)영감설(Wortinspiration)”에서 소위 “사건(또는, 실제)영감설(Realinspiration)”으로의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박봉랑도 이 문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말씀의 형식과 계시 자체 사이에 문자적인 동일이 있을 수가 없다. 성서와 설교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 즉 계시의 사건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이러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성경관은 성경 권위의 약화를 초래했고,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문학적 오류(errancy)를 주장하게 했다. 결국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던져진 폭탄이 아니라 폭죽임이 드러났다. 박형룡도 신정통주의의 장점들과 자유주의와 구분되는 그 성격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계시와 영감을 수정하고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신정통주의의 성경관을 “괴상한 성경관”이라고 했다.
어쨌든 성경의 친필원본(Autograph)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현실에서, 오늘날 사본 상의 증거만 가지고 본문의 의미파악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단어의 일점 일획, 토씨까지 영감 되었다고 주장하는 소위 문자적-기계적 “축자영감설”은 성경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성립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복음주의가 말하는 성경관이 아니다. 개혁자 쟝 깔뱅도 기계적이나 축자적 영감설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사본이나 본문 전승과정에서의 필사오류는 제한된 범위에서 인정하였으나, 오늘날 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가 전제하는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성경의 오류를 말한 적이 없다. 깔뱅은 그가 가지고 있는 성경본문이 본래 계시된 정확한 내용을 보여준다고 믿었고, 성경의 계시내용에 “진정한 오류”를 인정하지 않았다. “성경은 거짓말하실 수 없는 그 분이 말씀하셨음으로(딛 1:2), 우리는 그 말씀의 결국이 확실한 것으로 알고 그 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입 맞추어야 한다.”고 깔뱅은 말했다. 성서 해석사에서 깔뱅은 역사-비평적 주석의 원조(元祖)가 아니라, “현대 역사-문법적 주석의 창시자”(founder of modern historical-grammatical exegesis)로 평가받고 있다. 춘계도 “…칼빈은 틀림없이 성서기록의 영감설과 성서의 무오성을 강조한 것 같다”고 했다.
마삼락은 일찍이 1966년 51명의 세계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참석한 “성서권위에 대한 보스톤 회의”에 다녀와서 성경무오성과 축자영감설에 관해 주요한 보고를 했다: 이 회의에서 성경의 “무제한적인 무오설 교리”에 대해서는 일치를 보지 못했고, “성경은 성령에 의해서 받은 거룩한 책이며 축자적으로 영감을 받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이다”라는 성명서를 채택했으나, 여기서 “축자적으로 영감을 받았다”는 말은 “받아쓰기”를 의미하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고리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성경의 역사, 연대기, 문자적 해석의 어려움과 관련된 무오성(inerrancy)의 개념과 난해구절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으며, 성경 무오성이 곧 성경적 교리라는 데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축자영감”(Verbal Inspiration)이라고 번역된 “축자”(verbal, 逐字)는 한국어 번역의 오류이며, “verbal”은 “언사적”(言辭的), 또는 언어적(言語的)이라고 고쳐 번역해야 한다. 이 때 “언사적”이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계시하실 때 인간 기록자가 실수하지 않도록 그의 생각과 함께 그가 사용하는 언어도 돌보셨다는 뜻이다. 또 인간 기자를 기계적인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을 사용하셨다는 점에서 유기적이며, 부분적이거나 부족하게 영감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충족하게 하셨다는 것이 개혁교회전통의 복음주의 성경관이다. 그것은 언사적-유기적-완전 영감설(Verbal-Organic-Plenary inspiration)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다.
박형룡은 일찌기 정통주의는 복음주의와 같은 의미로 바꾸어 쓸 수 있다고 하면서, 정통주의는 “신구약 성경을 천계(天啓)와 영감(靈感)으로 말미암아 온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믿는 고등한 초자연적(超自然的) 성경관으로 출발한다”고 그의 견해를 밝혔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의 유오를 주장하고 신학사상의 자유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1920년대에 이미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서고도의 영향을 받아 조희엽 목사는,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문학적 오류는 물론, 다수의 역사적 오류와 과학적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고 발언하여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1934년 제23회 총회에서 모세오경 저작문제와 바울서신 해석 문제가 비화되었고, 고등비평의 영향아래 쓰인 <아빙돈> 단권 주석이 논란의 대상이 되면서, 보수적인 장로교 총회와 신학에 태도의 변화가 생겨났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의 변화를 “근본주의 입장의 등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한철하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보수신앙 전통이 1930년대에 와서는 그 성격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앞서 언급한 대로 보수주의가 내용적 신앙적 보수주의에서 태도상의 보수주의로 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미국에서 벌어졌던 보수신학과 자유신학의 싸움의 여파가 한국까지 파급되어 온 데 기인한다.”
같은 개혁교회 전통의 정통주의 보수신학을 계승 발전시키면서도, 한국 장로교회의 복음주의는 성서비평학을 소개하고 성서의 오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에 대해 염려하면서도 인내와 관용과 대화의 자세로 대안을 제시하는 입장을 취한데 반해, 근본주의는 그 상대를 적대시하고, 백안시하며, 전투적이며 배타적이고 분리적으로 그 태도를 취한 것이다. 예컨대, 1930년대 이후 박형룡의 태도에 비하면, 남궁혁의 입장은 복음주의 노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성서 유오설을 끝까지 주장하여 신신학(신정통주의)의 대변자로 알려진 김재준이나, 성경무오설로 끝까지 전투적으로 맞서서 한국의 메이첸이란 이름을 얻은 박형룡이나, 명분은 성경관을 내세운 진리싸움이었으나, 사실은 자기의(自己義)를 위한 다툼이었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김양선은, “만일 김재준교수가 계속적으로 보수주의 신학을 강렬히 비판하지 않았다면 금일과 같은 장로교회의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비평학자 자신들도 이 당시 상황에 대해, “영감설과 무오설에 저항하고 충돌과 분열을 야기시켰으나 그 귀중한 대가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학문적 연구의 개척을 위한 거점도 확고히 하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평장신의 신학노선과 그 성경관은 성경무오설을 분명히 하는 입장이었고, 성경유오설을 경계하고 고등비평의 방법론을 섣불리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결코 비평학을 백안시하거나 분리주의적인 전투를 하는 근본주의와는 구별되는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입장을 지켜나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평장신의 2대 교장이었던 라부열이다.
라부열은 이렇게 말한다: “대저 하나님의 말씀이 불착무오(不錯無誤)하거니와, 그 범위가 우주와 같이 광막하야 그 불착무오한 여부를 오인(우리)의 천근(淺近)한 식견으로는 요해(了解)키 어려울지니 망원경을 발명하기 전에 먼 하늘에 있는 성구(星球)를 발견치 못하였나니, 이는 성구가 없었던 것이 아니오. 천문학자의 육안력이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로다. 그런 고로, 과학을 선히 연구하는 자는 물리가 오묘함으로 그 연구함을 쉬지 아니하나니, 성경을 연구하는 오인도 오묘한 난제를 당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인정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나의 연구력이 박약함을 스스로 깨달을 것이니라.” 여기서 라부열은 복음주의의 성경 해석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나서, 그의 성경관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성경이 불착무오(不錯無誤)하다 함은 금일의 성경을 지칭함이 아니라. 모든 선지자와 사도가 신의 지도를 받아 첫 번 저술한 원본을 가르킴이라. 옛적에 인쇄법이 발명되지 못하여 다만 각 사람의 수필(手筆)로 등사하야 수천 년 동안 유전(流傳)하였으니, 등사자가 아무리 조심하였다 할지라도, 다소간 오서(誤書) 또는 낙자(落字)가 없지 못할지라. 열왕기와 역대기를 참고하면, 어떤 군왕의 연대가 피차 부동(不同)하니 이는 히브리 숫자가 자형(字形)은 비슷하나 지수(指數)는 크게 다른 고로 등사인이 오서하기 용이하였음이라. 이로 볼지라도 금일의 성경이 오서가 없다고 못할지니, 그 해석이 어찌 용이하리오. 그러나 금일의 성경이 착오처(錯誤處)가 다대(多大)한 것은 아니니, 그 보존된 각 사람의 사본을 참조함으로 원본 성경이 어떠함을 넉넉히 참작할지니 금일 성경이 원본과 크게 다르다고 함은 아니로다.” 나부열 역시, 무제한의 “축자영감설”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성경의 원본에 근거한 무오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개혁신학 전통의 성경관과 동질성을 나타내는 복음주의 신학의 입장이다.
평장신의 복음주의 성경관이 오늘의 장신대 성경관으로 연결되는 증거를 장신대 교수였던 김규당의 성경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장신 33회(1938년) 졸업생인 김규당은 그의 성경관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성서는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과, 정확한 사상전달은 정확한 문자로써야 달성된다는 사실과 성서의 내용이 매우 중요함에 비추어 성서에 잘못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장신대는 그러나 1964년부터 호주 장로교 선교사 변조은(John P. Brown)이 성서비평학을 조심스럽게 소개했으며, 1966년 미 남장로교 선교사 김기수(Keith R. Crim)가 요나서를 상징으로 해석해야한다고 가르치면서 총회에까지 물의를 일으켰다. 1972년부터 장신대 강단에 선 한국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인 문희석은 성서 비평학적인 입장에서 소위 “성서학적인 성서관”을 확립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강의와 저술 및 출판작업을 진행했다. 여기에 대해 김정준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1935년부터 우리 한국장로교 안에 있던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과 기계적 축자영감설…미국 메첸, 워필드, 하지 계통의 보수주의 신학만이 성서를 올바로 이해한다는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성서주의가 장로교회 신학교수에 의하여 무너지고 만 것이다.…문희석 박사는 예장 통합측 신학교수로서 세 번째 이러한 성서 비평학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이미 김기수란 이름을 가진 K. R. Crim 박사와, 같은 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친 변조은이란 이름을 가진 J. P. Brown 목사, 두 선교사가 있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만수의 성급한 판단과는 다르게, 총회(예장 통합)는 1979년 “신학대학 교수 강의 및 저서내용 사건”을 문제 삼았고, 그 해명을 받았다. 이것은 장로회 통합교단과 장신대가 성서비평학과 성서 유오설을 주장하는 신정통주의 신학을 신학노선으로 공식화하거나 무제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지를 거듭 천명한 것이다. 이미 1973년 신학춘추 “사설”에서는 “장로회 신학대학의 신학노선”을 비교적 자세히 밝혀둔 바 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역사적으로 장신대는 칼빈의 신학사상을 가장 중요시하면서 미국장로교회의 신학노선을 따르려고 애써 왔다는 것과, 총회가 1922년에 채택한 12신조와 1968년에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주축이 되어, 장신대의 신학적 입장은 “보수주의 정통주의”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때로는 교수들 가운데 이러한 입장에 부합되지 않는 말을 하는 이가 있기도 하나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본 대학의 신학노선은 성서에 기초를 두고 칼빈의 신학사상을 길잡이로 한 복음적 신학의 노선을 걷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한편, 장신대 교수회에서도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신학의 노선을 분명히 할 필요를 느끼고 “장로회신학대학 신학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서문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신학의 전제, 개혁주의 신학 전통과 에큐메니칼 신학, 신학과 교회, 신학의 선교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 신학의 자리의 방향, 신학의 한계와 신학의 대화적 측면에 대하여 7가지 명제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는 장신대의 신학 교육을 가늠하며, 교회와 사회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한다”라고 밝혔다. 그 7명제들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의 신학은 복음적이며 성경적이다.
② 우리의 신학은 개혁주의적이며 에큐메니칼하다.
③ 우리의 신학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봉사한다.
④ 우리의 신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