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칸 솟을지붕의 외삼문과 3칸 단층의 내삼문, 큰 조선배 모양을 한 터 위에 동서 방향으로 자리잡은 한옥 두채. 큰 본채 건물은 정면 4칸,측면 10칸의 40칸 장방형 2층 탑 모양이다. 팔작지붕의 단아한 추녀 자락,청·녹·황·흑·백색으로 단청한 서까래와 지붕위 12개의 치수두(置獸頭),처마끝은 물고기 모양의 막새기와로 마감하고 있다.
“처음과 나중이 없으나 모습과 소리를 먼저 지으셨으니 참 주재다. 어질고 옳음을 널리 펴서 무리를 구하니 큰 저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니 세상 만물의 참된 근원이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와 만물을 기르니 동포의 기쁨이다. 복음을 널리 전해 백성을 깨우치니 영원히 사는 길이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섬 강화도. 고려와 조선 두 왕조가 외세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현장을 묵묵히 눈물로 지켜봐야 했던 섬이다. 그러나 마리산의 정기 아래 몽골과 청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고 서구열강의 포화를 몸으로 막아낸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1893년 복음이 전해졌다. 성공회 워너 선교사가 진해루 밖에 집을 사서 기도처로 삼았던 것. 본격적인 선교는 1897년부터 시작됐다.
워너 선교사의 후임으로 강화에 부임한 마크 트롤로프 신부는 1899년 가을 강화읍 강화내성에 배 모양의 터를 닦았다. 배 머리쪽은 서향으로 출입문을 두고 배 한가운데에 예배당,배꼬리 부분에 사제관을 배치했다. 성공회 선교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자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트롤로프 신부는 신의주에서 백두산의 적송을 구해 뗏목으로 강화까지 운반했다. 경복궁 중건 때 도편수였던 사람이 목수를 맡았고 중국인 석수가 강화돌을 다듬어 담장 기단과 석물을 만들었다. 기와는 강화흙으로 구웠다.
1년여의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강화읍교회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교회 건물이기도 하다. 예배당 내부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이다. 내부에 중층을 만들어 창문을 달고 자연채광을 하도록 했다. 북쪽에 제단을 두는 우리 습관과는 달리 서양식 내부 배치에 따라 동쪽을 바라보고 예배하게 했다. 200여명이 동시에 예배드릴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지었다. 1914년에는 교회 뒤편에 성 미가엘신학원을 설립,성공회 성직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영국에서 종을 보내왔다. 이 종은 1945년 일제가 공출해갔고 1989년 성도들이 청동제 범종(높이 1.6m,무게 750㎏)을 마련했다.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찬 접시와 잔은 1900년부터 사용해오던 것이다. 교회 기(旗)는 보존을 위해 액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2000년 11월 축성 100주년을 맞았고 정부는 2001년 1월4일 사적 424호로 지정했다. 서울 정동제일교회 문화재예배당에 이어 두번째다. 천주교에서는 서울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이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관할 사제인 천용욱 신부는 “당시 기독교를 통해 유입된 신문화가 한편으론 전통문화의 계승을 가로막기도 했다”며 “강화읍교회는 피선교지의 생활과 풍습을 존중하는 성공회의 토착화 선교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