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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종려(고난)주일 참고 설교 5편
    2012-03-30 09:46:20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절기 설교는 어렵습니다. ‘뻔히 보이는 설교’ 때문입니다. 청중이 이미 본문의 내용을 다 알고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다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여러분들의 설교나 자료로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금년(2012)에도 종려(고난)주일이 변함없이 다가왔습니다. 몇 편의 목회자의 설교를 소개합니다. 더욱 뜻 깊은 설교에 도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편집자 주>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① 제목: 다 이루었다
    본문: 사 50:4-9, 빌 2:5-11, 눅 23:1-56

    * 석의적 접근

    1. 구약의 말씀(이사야 50:4-9):
    이사야의 세 번째 종의 노래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비극적 역사의 의미를 배운 사람들에 의해서 불려진 믿음의 노래이다. 구속을 위해 하나님의 오심을 기대했던 이스라엘의 망명생활이 경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노래는 믿음의 행위로 충성스러운 망명에 의한 이스라엘의 노래로 구성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경험 속에서 구체화된 개인적 망명이 예배에 사용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노래하는 노래는 이스라엘을 ‘종’과 동일시한다. 이곳의 종의 노래들은 이해하기 쉽다. 형식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탄원 형식이다. 그러나 개인의 시로도 정확히 불릴 수 있다. 7절 하반절에서는 시의 두 가지 동기를 부여한다. 하나는 하나님 안에서의 확신에 찬 열정이고 둘째는 존재의 확실성을 노래하는 것이다.

    4-5절은 개인적인 탄원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듣고 말하는 의미에서 제자이다. 하나님은 제자의 귀를 들을 수 있도록 열어주신다.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깨어 있다. 종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에게 적용되는 말씀을 듣기 전에 눈을 떠야 한다. 종은 전적으로 말씀을 수용해야 하며, 조정되거나 연습할 수 없다.

    하나님의 종은 제자로 묘사된다. 그는 이 고통을 받아들인다. 종은 고통의 수용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종의 얼굴을 부싯돌처럼 만드셨다. 그의 저항의 힘은 그가 만나는 불행과 치욕적인 취급의 수용에서 비롯된다. 8-9절은 하나님께서 종의 곁에서 확신을 주신다. 이 확실성은 율법의 과정으로부터 얻은 용어들을 사용함으로써 강력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2. 서신서의 말씀(빌립보서 2:5-11):
    이 본문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이 본문은 바울이 예수에 대해 쓴 것 중에 가장 위대하고 감동적인 본문 중의 하나이다. 본문의 중심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을 요약한 내용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개인적인 야망과 자만과 욕망을 멀리하고 하나 되는 일과 조화롭게 사는 것을 변론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의 자신을 헌신하는 것을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는 예수를 본보기로 한다.

    바울은 예수에 관하여 두 가지 묘사를 하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과 같은 근본을 가진 영광을 가지신 분이시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자신을 비워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까지 복종하시면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예수의 고귀한 그리스도로서 세 번째 면모를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3. 복음서의 말씀(누가복음 23:1-56):
    빌라도의 재판은 누가복음 23장 1-5절에서 예수에 대해 세 가지 비난을 제기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폭동을 일으킨 지도자이고, 로마에 대항해서 백성들을 흥분시키는 자이고, 왕의 자리를 계획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고소는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 조작한 진실의 왜곡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유대와 갈릴리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을 동요시킨다고 했다.

    12절에서는 유대(헤롯)의 법과 이방인(빌라도)의 법은 서로 원수였으나 예수의 피 때문에 당일에 서로 친구되었다. 13-25절에서 누가는 계속해서 네 번째와 마지막 재판에서 예수의 무죄를 강조한다. 그러나 군중의 요구에 의해 한 죄인은 석방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정했다.

    여기에서 빌라도는 바라바를 석방하고 헤롯이 예수에게서 어떠한 죄도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부정한 판결을 내렸다. 26-56절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도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말씀하신다. 십자가에서의 누가복음에서 중심 사건은 메시야로서의 높임의 예언이다. 39-43절에서 두 강도의 사건과 44-56절에서 예수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이 증거 되고 있다.

    * 설교를 위한 조명

    1. 보라. 주님은 나를 도우신다.
    - 주님은 순종하는 종을 가르치신다.
    - 종은 그의 사역을 위해 수치를 당하고 압제를 받는다.
    - 종은 부끄러워 않으며 그의 얼굴을 부싯돌같이 한다.
    - 하나님은 종을 도우시고 누구도 그에게 죄를 선고할 수 없다.
    - 종의 적대자들은 멸망할 것이다.
    - 하나님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시고 성령에 의해 우리를 도우시기를 약속하셨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다.
    - 그는 자신을 인간의 몸으로 오시기까지 종의 형체로 겸손하게 하셨다.
    - 그는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순종하셨다.
    -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고 주가 되게 하셨다.
    -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에게 겸손하게 순종하여야 한다.

    3. 예수께서 기도하시기를 “다 이루었다”
    - 예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감람산에서 기도하셨다.
    - 예수께서 무릎으로 기도하시며 가능한 한 고통과 죽음을 옳길 수 있기를 간청하셨다.
    - 예수께서는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셨다.
    - 예수께서는 기도를 마치시고 잠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 크리스천의 삶은 기도로 유지되며 충성스러운 순종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 설교 후 기도

    십자가상에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시어 종의 형체로 오시고 심자가 상에서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의 삶이 현장에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따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장복, 1995년 예배와 설교 핸드북, 1994, 홍성사, pp.165-168


    ② 제목: 침묵하시는 주님
    본문: 마태복음 27:11-14

    언어라고 하는 것은 생활을 위한 수단이고 교제와 의사 전달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매개 수단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졌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같이 소중한 언어일지라도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아질 때는 하나의 공해일 수밖에 없습니다. 말 때문에 발생되는 불화와 오해와 갈등은 분명 이 시대의 공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웃과 교제하면서 말을 적게 하여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말이 필요 이상으로 많으면 경망스럽습니다. 그리고 말이 너무 많으면 자연히 실수하게 되고 품위와 무게를 잃게 되기 쉽습니다.

    오늘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행동과 실천에 미치지 못하면서도 많은 언제나 앞서 가기 때문에 온갖 불신과 조소를 받고 신용을 상실한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힐난을 받게 되고 언제나 말이 앞서고 무책임하다는 말까지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침묵이 금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침묵이 금일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꼭 말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말을 꼭 하여야 할 때는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급입니다. 그러나 꼭 말을 하여야 할 때 말을 하지 못하면 그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용기가 빛을 잃습니다. 책임감이 없어집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을 때 시내산 밑에서는 부패한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불평자들과 반란자들이 힘을 모아 하나님을 거역하고 애굽에서 하던 그 습관대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는 절하고 야단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아론은 끝내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말 한마디를 하지 않습니다. 그 어디를 보아도 항거하고, 항의한 일이 없습니다.

    그 때의 침묵은 금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같은 행동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들 앞에 나서서 지금 하고 있는 그릇된 일을 가로막지 못하고, 할 말을 다하지 못한 아론은 두고두고 비겁자의 낙인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가 말을 잘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도 인정하셨던 일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함께 애굽의 대사로 파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짓밟히고 하나님의 권위가 사뭇 욕을 당하고 무너져 내려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으면서도 한 마디의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두고두고 아론이 질책을 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고 침묵이라고 다 금이 아니라는 교훈을 받습니다. 침묵하여야 할 때는 침묵하여야 합니다. 그 때 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말을 하여야 할 때는 고가의 값을 치르는 일이 있어도 말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언어로서의 값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지닌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용이고, 힘이고, 진리인 것이며, 동시에 지도자의 길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속에서 끝내 침묵하시는 주님의 침묵이야말로 말 많은 오늘의 사람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침묵하시는 경륜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침묵은 어떤 침묵입니까?

    첫째는 “비난 앞에서의 침묵”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이유 없는 비난을 받는 일은 기분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변명하느라고 애를 씁니다. 그것이 안 되면 다투기도 하고 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비난, 원색적이며 훼손적인 악의에 찬 비난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주님은 언제나 침묵으로 대처했습니다. 그들의 비난에 끝까지 변명을 하거나 해명하려 하기 않았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들의 비난과 모함 앞에서 그때마다 변명을 하였거나 해명을 열심히 하였다면 그의 운명은 어느 정도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의 시간도 어느 정도는 지연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비난 앞에서 주님은 여전히 일관되게 침묵으로 대처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침묵하시는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과 같이 모함과 오해와 험담과 모략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침묵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침묵은 말을 해야 할 때 위험을 무릅쓰고 말을 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고, 용기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그만큼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침묵하지를 못하고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유가 많고 말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침묵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만이 승리의 제일가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끝내 침묵하신 결과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생활이고, 인내의 극치이고, 주님이 주신 교훈입니다.

    둘째는 “약자 앞에서의 침묵”입니다.

    사람은 흔히 강한 사람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고 약한 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강한 사람이나 힘이 있는 권세자 앞에서 흔히 많은 사람들은 교활해지기 쉽고, 아첨하기 쉽고, 비굴해지기 쉬우며,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약자로서 맹종하기가 쉽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또한 약한 자에게는 무자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약한 자 앞에서 당당하고 강하고 호령하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고, 생리이고, 부패한 근성입니다.

    이것이 두 개의 인격 그리고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숨겨진 모습입니다. 사람이 교활할수록 아첨과 호령을 잘하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의 대다수 많은 사람들은 이 범주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모습 속에서 아주 신선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당시 강자였던 빌라도 앞에서도, 헤롯 앞에서도, 단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온갖 누명과 질시와 오해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굳이 변명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변명을 했고 자신을 변호했더라면 그의 운명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약자들 앞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손에 돌을 들고 와서 입에 거품을 내며 욕하고 비난하며 죽이려 들던 간음한 여인 앞에서도 말이 없었습니다. 질책하지도 않으시고 묵묵히 바라만 보실 뿐이었습니다.

    또 강도의 욕지거리를 들으시면서도 단 한 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항변하거나 분노하거나 탄식하지도 않으십니다. 모두에게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그 길이 주님이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진리의 삶과 선구자의 삶은 이렇게 침묵하는 생활입니다. 할 말을 다하고, 자기변명을 일삼다 보면 정작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선구자들의 삶은 일찍이 모두 그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침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강자 앞에서도 아첨하거나 비굴하지 않으며, 약자 앞에서도 무례하지 않으며 업신여기지 않으며, 칭찬하는 자 앞에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우쭐하지 않으며,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굳이 변명하려 들지 않으시는 주님의 모습은 오늘 하고 많은 세상의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해 낼 수 있는 방법같이 보입니다.

    우리는 너무 말이 많습니다. 자기변호가 너무 지나칩니다. 불필요한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삶에는 진지함이나 내용 있는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침묵하는 모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십자가 위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더욱 무거웠고, 몸소 지시기에 어려웠던 것은 십자가의 형틀이 그 중량이 무거웠고 거칠었고 또 그 길이 험난한 언덕길이었기 때문이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차마 인간으로서는 감당해 내기조차 어려웠던 일련의 일들 때문입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배신, 가룟 유다의 배신, 곁에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강도의 욕설, 그리고 군중들의 배반들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자들의 배신행위는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더욱 고되고 아프게 만들었던 서글픈 일들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무게를 한 층 더 무겁게 만들었던 요인이었고, 베드로의 배신은 주님의 마음을 허루하리만큼 허탈하게 만들어 버린 어이없는, 분노할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죄를 지어 죽어 마땅한 강도의 욕지거리는 골고다를 더욱 황량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할 말이 많고 변명할 것이 많은 주님은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죄인처럼 말이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고독입니다. 할 말이 없어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은 많으나 할 수가 없는 주님의 처지이기 때문에 골고다의 고난과 고통은 더욱 큰 아픔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침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할 말을 다 하고서는 갈 수가 없는 길입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고 좁은 문을 통과하여야만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변명을 하고, 따져가며, 할 말을 다 하면서 십자가를 질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침묵하는 삶, 그것 자체가 십자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먼저 이 침묵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 이정익, 교회력에 맞춘 절기설교(상), 1994, 생명의 말씀사, pp.107-112


    ③ 제목: 수난은 환희의 씨앗

    본문: 사 52:12-15, 빌 2:5-11, 막 11:1-11

    * 구약의 말씀(이사야 52:12-15):
    본문의 말씀은 여호와의 종의 네 번째 노래이다. 이것은 공의로운 통치와 평화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메시야 예언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난 받는 종의 노래”라고 불리워지는 메시야 예수의 수난 사건을 가장 상세하게 묘사하는 말씀으로서 이 글을 대하는 독자들은 의심 없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임을 믿게 된다.

    또한 이 고난 받는 종의 노래는 수난뿐만 아니라 수난 후 존귀케 되는 역설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도 있어, 오실 메시야의 구속 사역에 대한 성취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고난의 종의 네 번째 노래는 전체의 분위기가 슬픈 분위기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이 아니라 승리와 소망의 느낌을 갖게 한다. 본문은 우리에게 수난은 값싼 감상이 아니라 완전한 구원으로 말미암은 승리의 기쁨 속에서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보여준다.

    * 서선서의 말씀(빌립보서 2:5-11):
    본문의 앞부분 중 1절에서는 먼저 성도들이 하나 되는 원리로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자비’를 제시하고 있다. 이어 그 원리를 기초한 성도들의 마음의 태도를 제시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 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으로서 겸손을 제시한다. 나아가 바울 사도는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겸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겸손의 모범으로 제시한 것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야말로 겸손의 극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의 본제시다. 그는 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로서 신적인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받으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인류 구원을 위한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육신의 비하를 체험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온전한 자기부인과 놀라운 겸손의 모습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다.

    * 복음서의 말씀(마가복음 11:1-11):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부터 주님의 당하신 고난을 묘사하기 위하여 마가복음의 1/3분량에 해당하는 지면 그것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마가복음이 수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함으로써 엄청난 박해 가운데 있던 당시 로마 그리스도인을 위로하려는 기록 목적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이 부분은 예수께서 베뢰아 전도를 마치시고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하여 성경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나타나신 때는 그를 체포하려는 험악한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움직임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죄인을 위해 죽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완수하시려는 침묵의 전진이었다. 본문에서는 고난 주간 중에서 첫째 날에 일어난 사건이 소개되는데 이 때 예수께서는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이는 만왕의 왕이요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승리를 상징하는 백마가 아니라 초라하기 짝이 없는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자신이 어떠한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 설교를 위한 조명

    1. 서론

    창세 이후로 생명의 태동은 죽음ㅇ로 말미암아 시작된다. 희생을 거부하는 생물 종족은 보존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얻는다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희생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그 희생의 모범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2. 정의

    예로부터 사람들의 속성을 표현한 말들이 있다. 그 중 ‘앉으면 눕고 싶어 하고 말을 타면 종을 부리고 싶어 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반대되는 모습니다. 우리는 높아지는 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겸손을 원하신다. 우리는 안락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겸허한 자세와 헌신과 고난을 원하신다. 비록 지산의 짧은 생애 동안이라 할지라도….

    3. 동기부여

    고난을 피해 잠시 동안의 영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일 수 없다. 주님은 자신과 온 인류의 영생을 위하여 잠깐 동안의 수치와 고난을 감내하실 수 있었다. 영생하는 환희의 날을 보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주의 사람들이 볼 때에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는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철저하게 고통을 당하며 슬픔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며 죽기까지 낮아지셨다. 그것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고, 그의 감출 수 없는 자비심 때문이었으며 말씀하신 대로 이루고자 하는 소망 때문이었다.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처럼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가?

    4. 방법론

    (1) 믿음에 굳게 서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수난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이었다. 주님은 이 세대 가운데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를 원하신다.

    합당하게 당해야 할 수난의 현장을 회피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회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확실한 주님의 뜻은 수난 중에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다. 쉬지 않고 기도하며 말씀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분별하는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주님은 “애매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 주님은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하여 죽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죽으면 살리라고 말씀하신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영생의 환희를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존심을 버리며, 물질을 사용하고, 시간을 바치며, 지식을 드리면서 씨앗을 뿌리면 그것은 죽어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자세를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세를 가지셨다. 이방인들이 보기에는 미련하게 보였다. 초라하게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즉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일념이었다. 육체의 고통도 수치도 종이 됨도 마지막 죽음까지 모든 수난을 감수했다. 이렇게 말씀과 믿음이 충만할 때 그리스도처럼 낮아질 수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겸손한 자를 높이 세우실 것이다.

    5. 결론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덕목 중에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겸손을 배우고 닮아 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여생의 면류관을 줄 것이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이제 환희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그날까지 겸손하게 썩어지고 죽을 씨앗이 되어 살자.
    ** 정장복, 97예배와 설교핸드북, 1996, 홍성사, pp.191-194


    ④ 제목: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본문: 삼하 7:1-17, 계 19:11-16, 요 19:17-22

    오늘 세 본문을 통해 증거 할 말씀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것이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는 왕이라고 증언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어떤 왕이신지 살펴보자.

    1. 고칠 수 없다.

    요한복음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매단 십자가에 죄목을 적어 놓은 명패를 읽었다고 한다. 또 이 명패는 히브리 말과 라틴 말과 그리스 말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20절). 즉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의 죄목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빌라도는 이 명패에다 예수님의 죄목을 “유대 사람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썼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죄목을 보았다. 이것을 본 반응이 엇갈린다. 끄덕이는 사람도 있고 못마땅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즉각 빌라도에게 항의가 들어왔다. 대제사장들이 ‘유대사람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 사람의 왕’이라고 고쳐 쓰라는 항의를 했다. 그러자 빌라도는 “나는 쓸 것을 썼다”하고 대답했다(21절).

    여기서 요한복음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발라도는 대제사장들이나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을 인정한 점은 같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진짜 왕이 아니고 예수는 왕을 사칭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왕권을 가짜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빌라도는 예수의 죄목을 고쳐 쓰려들지 않는다.

    예수가 유대인의 왕처럼 행세하다 잡혔다는 것이다. 요한은 놀랍게도 빌라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규정한다. 물론 빌라도는 예수님을 로마의 지배에 반기를 든 정치적인 선동가로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을 것이다. 아무튼 예수는 누구인가? ‘유대인의 왕이시다’하는 것이 요한의 증언이다.

    2. 영원한 왕권

    사무엘하 본문에 이 왕권이 잘 소개되어 있다. 이 본문은 다윗의 왕권에 대한 나단의 예언이다. 나단은 다윗에게 큰 약속을 준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는 왕권은 빌라도와 대제사장들이 생각하는 왕권과는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빌라도나 대제사장들은 왕권, 통치권을 그야말로 힘을 가지고 멋대로 다스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팍스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가 이를 잘 드러내 준다. 황제가 힘을 가지고 온 백성과 나라들을 통치한다. 황제의 뜻에 거스르거나 반기를 들면 군사를 동원하여 뿌리를 뽑는다. 이것이 그들의 왕권이다. 인간이 쟁취해서 거머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단은 다윗에게 말한다. 왕권의 소재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다.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은 것은 바로 나다”(8절) 그리고 이 왕에게 백성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다(10절).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안을 왕조로 만드시고(11절), 그 자손을 후예자로 세워서 왕위를 영원케 하신다(12,13절).

    여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왕권은 인간이 쟁취해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과 백성을 위해서 주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세상의 군주처럼 권력을 휘도를 때에는 언제다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나단이 다윗에게 요구하고 복을 약속한 왕권은 아주 이상적인 왕권이다.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고, 군사 징집을 위해 호구 조사를 하는 현실의 왕권이 아니다. 다윗 왕가는 나단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약속 받았음에도 하나님을 잊고 백성을 잊었기 때문에 끝내 명망하고 말았다.

    참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적을 위해,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몸소 뽑은 사람이다. 이런 택함 받은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공의로 통치할 때 그 왕권이 영원한 것은 물론, 백성들도 생명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다.

    3. 그분이 심판하신다.
    나단이 예언한 참 왕권이 요한복음에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분(계19:13)을 ‘신실하신 분’, ‘왕 되신 분’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이분은 왕권을 가지실 것이다. 그러나 역시 세상의 왕들처럼 전쟁 무기를 가지신 왕은 아니다.

    그분의 입에서 날카로운 칼이 나와서 민족들을 치고 다스린다(15절). 즉 진리의 말씀이 그분의 무기이다. 이 진리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실로 그리스도는 ‘왕 중 왕’(16절)이시다. 나단이 예언한 이상적인 왕은 오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시며, 장차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갖 죄와 악의 세계를 심판해서 무찌르고 하나님의 선하신 세계를 이루실 것이다.

    ‘예수께서 왕이시다’하는 생각은 요한의 생각만은 아니다. 마태 또한 예수님을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고(마 1:17), 구약의 예언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셨고(마 2:6), 왕들이 받는 선물을 동방박사들로부터 받으셨다(마 2:11). 그러나 이 왕의 임무는 세상적인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하는 것이다(마 1:21).

    우리는 이번 주간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묵상하며 보내게 된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처럼 그분은 ‘왕’이시라는 고백을 해야 할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삶을 통치하신다. 경제도, 신체도, 정신도, 문화도 통치하신다. 그러나 힘을 휘둘러 내리누르고 멋대로 하는 그런 방법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랑으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주시는 방법으로, 오직 주 하나님의 정의로운 말씀을 무기로 삼아 불의한 모든 것들을 심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다스리신다. 왕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 보자.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세계가 실로 그분의 다스림 가운데 들어가 온전한 생명을 누리도록 기도하자.
    ** 생명을 빚어가는 해(2001년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자료), 2000, 대한기독교서회, pp.166-169


    ⑤ 제목: 죽음을 죽인 죽음

    본문: 마 27:26-53

    * 수난일 설교를 위한 실제제안
    1. 설교자가 직면하는 문제 - ‘빤히 보이는 설교’

    수난일이나 부활절 같은 절기설교를 해야 하는 설교자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는 청중이 이미 다 알고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본문과 메시지를 어떻게 새롭게 설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는 각 절기에 따라 본문선택의 범위와 핵심메시지가 이미 다 결정되어 있어서 예년과는 다른 본문과 메시지로 ‘새로운’ 설교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한 마디로 ‘빤히 보이는(predictable) 설교’의 문제에 부딪히기 된다. ‘빤히 보이는 설교’란 본문이 낭독되기만 해도, 심지어 제목만 보고도 ‘오늘 무슨 설교하실지 이미 알았다’고 생각하여 아예 듣지 않게 되어 역동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하고 마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절기설교의 어려움은 본문선택, 해석, 핵심메시지의 확정 그리고 신학적 입장 등의 어려움이라기보다는 똑같은 내용을 어떻게 새롭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다.

    이 새로움은 처음 듣는 ‘낯설음’(이것은 이단일 수 있다)이 아니라, 익히 아는 말씀이지만 ‘신선함’의 새로움이다. 사실 ‘뻔히 보이는 설교’의 문제는 절기설교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는 아니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도 여러 방면에서 제시될 수 있다. 설교자는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나름대로 여러 시도를 해 보는 게 좋다.

    2. 가능한 한 시도 - 고백적 스타일의 도입

    교회의 절기들은 교리 확립에 결정적이었던 역사적인 사건들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절기설교는 교리 선포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자연히 논리적 변증, 교리적 설명, 제 3자적 입장에서의 해설로 그 스타일이 고착되는 경향을 띈다. 그러나 한번쯤은 객관적인 사건과 그 사건이 함축하고 있는 교리를 논리적 설득이나 설교자 자신의 고백적 스타일을 도입하여 설교함으로써 같은 메시지의 신선한 새로움의 전달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

    3. 본문 - 마태복음 27잘 26-53절

    절기설교를 염두에 두고 본문의 단락을 정하거나 본문의 각 절과 단락의 주해에 많은 할애를 하지 않고, 전체적인 장면의 파악과 총괄적인 언급의 방법으로 본문을 취급하였다. 본문의 인물배역을 정하여 낭독하게 하는 것도 지루함을 없앨 수 있다. 또 절기의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 수난 설교의 실제

    1. 고난의 현장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일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신 현장의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아우성치고 총독 빌라도는 이 여론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줍니다. 현장에 모여 있던 로마 병정들, 군중들, 그리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온갖 짓으로 예수님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갑니다. 군중 앞에서 옷을 벗겨버립니다. 가시로 왕관을 만들어 씌워놓고 조롱을 퍼붓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침을 뱉습니다. 쥐어주었던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칩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비웃으면서 빈정댑니다. 극악무도한 살인자나 강도를 죽이는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아 매달았습니다. 옷을 벗겨 제비 뽑아서 나누고, 앉아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자존심까지도 깔아뭉개는 온갖 희롱을 다 퍼붓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구경꾼들도 머리를 흔들면서 모욕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자장들,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2. 예수의 반응

    그러나 예수님은 그 괴로움과 고통과 모욕을 말없이 다 견디고 계십니다. 전통제 역할을 하는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거절하시고 스스로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잘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철저하고 극심했는지 본문 46절에서는 십자가에 달린 채 절규처럼 말씀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비명서로요 신음소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기의 마지막 순간을 하나님께 의탁한 신뢰의 고백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육신과 영혼이 당하는 고통의 극치에서 토해내는 예수님의 절규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다시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50절).

    3. 갈등의 유발(끌어들이기)

    여러분,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당하신 멸시, 천대와 고통, 그리고 죽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아,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하여 지금 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있구나, 참 감사하다. 감격스럽다” 그런 마음이 드십니까? 그래서 감격의 눈물이 나오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대단한 분들입니다. 아니면 언젠가 배운 교리가 생각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위해서 라더라’고 하면서 배운 대로 덤덤하게 이 장면이 받아들여지십니까?

    저는 처음 얼마동안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는 장면을 볼 때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울화통이 치밀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예수님을 괴롭게 하고 마침내 죽게 하는 그 사람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정말 화가 나고 울화가 치민 것은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정면으로 부정당하고 있고,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데도 예수님은 아무 대책도 없이 마냥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로마 병정들이 입을 놀립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차며 빈정댑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게 내려와 보라”, “46년에 걸쳐 지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친구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너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퍼부어댄 말과 행위의 핵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불신과 비웃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가만히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일개 멸망당할 죄인들이 감히 이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너무 무능력한 모습으로 그것을 당해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화가 납니다. 울화통이 치밉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 따위 죄인들이 당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 얄미운 인간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한 번 나타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보란 듯이 한 번 잠깐만 내려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면 안 됩니까?

    그래서 이 인간들이 꼼짝 못하게 해 주고 올라가셔서 죽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만 이 사람들이 원하는 방법대로 증명해 주면 안 됩니까? 이것이 얼마나 좋은 전도의 기회입니까? 이 인간들이 예수님이 누군가를 모르고 감히 까불고 있잖아요.”

    이것인 한 동안 저의 고민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의 모습, 십자가에 달린 후의 예수님 모습,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보면서 저를 사로잡는 고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도 압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가 그분의 한 마디에 잠잠해졌던 것을 우리가 압니다. 거라사의 한 남자 속에 있던 군대귀신이 그분이 걸어오는 것만 보고도 벌벌 떨다가 쫓겨났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송장을 명하여 일으킨 분입니다. 오늘 이 일이 있기 불과 며칠 전의 일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까짓 십자가에서 잠깐 내려오는 일쯤, 이분에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원하시면 지금 십자가 밑에 모여 주님을 조롱하고 겁 없이 까불고 있는 이 무리들을 말씀할 필요도 없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사해바다에 몽땅 빠뜨릴 수 있는 그런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친히 그럴 수 있는 분이라는 말씀을 잡히시기 직전에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치니까 베드로를 나무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그런데도 예수님은 자신을 놓고 겁 없이 까불고 있는 그 가소로운 누리들을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십니다. 저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4. 해결의 실마리

    그래서 한 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런데 그렇게 고민하면서 읽고 또 읽고 기도하던 어느 날,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 기가 막힌 말을 우리가 들은 것이 여기가 처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힘없는 모습으로 원수에게 이러한 도전을 받는 이 기가 막힌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은 예수님이 사역을 막 시작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사탄의 시험은 “네가 만을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말도 똑같고 장면도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조건을 충족시켜줌으로써가 아니라,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고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누가복음 4:13절은 사탄이 얼마동안 예수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6장에 가면 이 사탄이 돌아와 또다시 예수님을 시험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한참 있다가 베드로가 “예,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그러는 겁니다. 칭찬을 하신 후, 이때로부터 이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비로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가 죽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얼른 하는 말이 “주여 그러지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돌이키며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오늘 본문은 다시 사탄과의 한판 싸움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 동안 잠시 떠났던 이 사탄과의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탄은 광야의 첫 시험에서 내걸었던 그 조건을 똑같이 던지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결국 예수님은 단순히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 뱉고 고개를 흔들며 비웃고 빈정대는 이 유대인이나 로마 군사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말의 의미도 모른 채, 사탄의 도구 노릇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쏟아놓고 있는 말이나 행동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5. 절정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탄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더 울화통이 터졌습니다. 지금 주님이 십자가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보고 깨닫게 되니까 이제는 오히려 주님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절대로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저 무리들이 아무리 꼬이고, 아무리 주님 성질을 건드려도 참아주세요.”

    주님이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다 견디시고 거기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마귀가 세력을 잡고 있던 우리 인간의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을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14)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뱀으로 뱀의 문제를 해결하셨듯이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분이었음에도 끝까지 고난을 당하시고 그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을 저는 사랑합니다. “나 죽어 너 살라”하여 죽으신 그 사랑 때문에 오늘도 저는 산 자가 되어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사랑을 함께 고백하고, 이 찬양을 함께 드리기 위하여 오늘 이곳에 모였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우리 가운데 임재하여 계시는 주님의 은혜가 생생하게 실감되는 이 시간이 되길 기원합니다.
    ** 정창균, <그말씀> 1998년 4월호, pp.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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