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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정말 12월 25일 태어나신 걸까 /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
    2011-12-15 22:20:10   read : 655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조덕영 박사
    예수님 탄생 시기는 언제인가

    베들레헴 별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준 별이었다. 이 별을 찾으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예수님이 언제 탄생하였는지를 밝혀내야한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이 언제 탄생하였는지를 알려주는 뚜렷한 실마리가 없다. 이것이 베들레헴 별을 찾는데 커다란 어려움이다. 예수님의 탄생 날짜에 대해서 3세기 초까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다. 3월 21일, 3월 28일, 4월 2일 혹은 4월 19일 등 다양한 주장들이 난무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Clement)의 주장

    ‘예수님은 5월 25일 탄생하셨다.’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교부(고대 기독교의 기초를 닦는데 큰 공헌을 한 성직자 또는 저술가)였던 클레멘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서기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공식으로 인정하였다.

    이때부터 로마의 국민들은 누구나 마음대로 기독교를 안심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 4세기 말에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할 필요를 느꼈다. 성경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의 탄생 날짜를 찾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예수님의 탄생 년도도 정확하지가 않았다.

    히폴리투스(Hippolytus)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12월 25일이라고 처음 정한 인물은 3세기 초 로마의 역사가였던 히폴리투스였다.

    ‘예수님의 수태고지(천사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잉태를 알린 것)가 있었던 날은 3월 25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12월 25일 금요일 태어난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히폴리투스의 견해는 당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근거가 희박했기 때문이다.

    동방 정교회

    그런가하면 동방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날이라고 생각하고 1월 6일을 기념하였다. 이것은 4세기 중엽 예루살렘 교회가 예수님의 출생과 세례 받으신 날을 베들레헴과 요단강이라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같은 1월 6일에 기념하던 데서 시작되었다. 이날이 되면 예루살렘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서로 25킬로미터나 떨어져있는 이들 두 곳을 돌아다녀야했다. 그렇지만 단 하루 동안에 이들 두 곳을 순례한다는 것은 그곳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고행이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조금씩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생일이 1월 6일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맞아, 성경에도 그런 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예루살렘 교인들의 불평은 점점 더 늘어갔다. 마침내 예루살렘의 주교 키릴루스는 로마 본부의 주교 율리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띄우게 되었다. ‘예수님의 실제 탄생일이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저희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율리우스는 사가랴라는 사람이 초막절(가을에 지키는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하나,장막절이라고도 한다)에 환상을 보았다는 것을 기초로 히폴리투스와 마찬가지로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본다는 답신을 보냈다. 서기 354년경의 일이었다. 그 뒤 37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날을 공식 휴일로 지정하였다. 이때부터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이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정하게 된 것은 이것이 모든 이유일까?

    당시 로마에서는 12월 17일부터 1주일 동안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는 농신제(농사를 짓는데 도움을 준다고 여긴 신을 기리는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가 열리면 학교들은 문을 닫았다. 이때는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범해도 큰 벌을 받지 않았다. 축제가 열리면 사람들은 <토가>라고 불리는 당시 로마인의 겉옷 대신에 아주 볼품없는 옷들을 입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가장행렬이나 거리 축제와 비슷한 면이 많이 있었다. 이때만은 노예든 귀족이든 신분의 차별이 없었다. 사람들은 함께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누곤 했다. 이때 거리는 소란해지고 흥겨움이 넘쳤다.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는 이와 닮은 거리 축제들이 많이 남아있다. 12월 25일은 그 마지막 날에 가까웠다.

    또한 그 당시 로마에는 세력이 큰 미트라교(Mithraism)라는 종교가 있었다. 본래 미트라는 조로아스터교와 같은 이원론적 종교의 근원이 된 고대 페르시아 땅의 빛의 신을 말한다. 이 이방 풍습을 유럽으로 가져온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에 따라나섰던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12월 25일 동지제(동짓날 지내는 제사)를 지내었다. 그래서 다음 해에도 태양이 다시 새 능력으로 자신들의 농사를 도와주기를 기원하였다.

    브룬말리아(Brunmalia)라는 또 다른 종교의 축제도 있었는데 이들도 12월 25일 태양의 탄생을 축하하였다. 이 축제는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고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지를 기념한 켈트 민족(오늘날의 영국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주로 살고 있는 유럽의 한 인종)의 축제와 연관이 있었다.

    성서에는 예수님을 ‘의의 태양’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섬기는 신과 예수님을 같은 의미로 여겨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그들은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로마를 통치하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으니 다른 신을 섬기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기독교와 자신들의 종교를 혼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축제의 날을 크리스마스로 여겼다는 설이 있다. 이렇게 예수 탄생 이전부터 12월 25일은 명절이었다. 그래서 과거부터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12월 25일로 지키는 것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1644년 영국 청교도들이 영국 의회를 장악했을 때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을 반대한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다. 청교도들은 이 날을 장날(market day)로 지키게 했다.

    심지어 미국 초기 청교도들은 이 날을 "교황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659년 미 매사추세츠 주는 공식적으로 성탄절을 금지하기도 했다. 이것은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1836년 앨라배마 주에서 성탄절은 공휴일이 되었고 남북 전쟁 이후 12월 25일은 이국에서 공식적인 성탄절이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탄생과 이 땅에 오심을 감사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그럼에도 이때가 되면 엉뚱한 사람들이 흥청거린다. 예수님보다도 산타클로스와 루돌프 사슴과 화려한 장식이 더 세상을 요란스럽게 만든다. 많은 나라에서 이때가 되면 휴가철이 된다. 그리고 세상과 거리들은 술 취함과 선물과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적된다. 이방 종교의 풍습과 섞이면서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이렇게 많이 퇴색되어버렸다. 이런 것들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가 고대 이교도들의 축제날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탄생 12월 25일에 대한 다른 반론

    그런가하면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탄생할 때 목자는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다. 12월 25일이면 이스라엘 민족이 사는 가나안땅의 겨울이다. 겨울에는 양떼들이 풀을 뜯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결코 양떼들을 들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언제였을까? 아마도 9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일지 모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날은 유대인의 큰 명절인 초막절의 시기로 이때에는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온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온다. 그리고는 작은 초막이나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 거주하면서 광야에서의 생활을 기념한다. 그러면서 다가 올 왕국 곧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시게 될 그때를 바라보게 된다. 이때는 날씨도 아직 따뜻하고 대부분의 추수가 끝나고 사람들이 여행하기 좋은 때였다.

    이것이 예수님 탄생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들르게 된 것은 호적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자신이 지배하던 모든 지역에 인구 조사를 명령하였다. 이 인구조사는 구레뇨라는 사람이 수리아의 총독이 되면서 당시 유대인들이 살던 이 지역에서도 실시하게 되었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다. 따라서 이 인구조사에 응하여야만 됐다.

    그래서 마리아와 함께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호적을 하러 올라가던 길에 그곳에서 예수님을 출산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추수가 끝나고 여행하기 좋은 9월이야말로 인구조사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때였을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는 이때의 초막절은 우리의 달력으로 추석과 유사한 9월 29일 정도가 된다. 초막절은 미래를 위한 절기이다. 즉 예수님의 재림(다시 오심)과 관련이 있는 절기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초막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게 되셨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거하게 되셨다는 말은 초막을 짓는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바로 초막절에 기다리던 하나님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렇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날은 영광의 날이었다. 하나님께서 평화와 기쁨을 동시에 우리 인류에게 선물한 날이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께서 인류를 죄와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지극히 낮고 천한 모습으로 말구유에 발가벗고 내려오셨다. 교만한 사람들 앞에 하나님께서 거꾸로 겸손히 오신 날이었다.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란 말인가!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다른 분이었다. 오늘날 예수를 알지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이상스레 기쁨이 넘치고 흥분되어 흥청거리는 것을 보게 된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물론 성탄절이 세상 사람들에게 방종과 흥청거림으로 보내라고 주신 날은 더욱 아니다.

    위대한 날! 영원한 날! 그날은 거룩한 밤! 거룩한 날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짜만을 섬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그 날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그날의 의미인 것이다. 그것이 베들레헴 별이 동방박사들에게 알려준 의미였다. 그럼 이제 우리는 그 베들레헴 별이 어떤 별이었는지를 좀 더 추적해보기로 하자.

    금성(?)

    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사람들은 바빠진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고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된다.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크리스마스카드를 여기저기 보내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때이다. 그럼 처음 크리스마스카드를 이웃에게 보내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최초의 크리스마스카드는 1843년 영국의 미술 선생이었던 헨리 코올이 호즐리라는 사람에게 그리게 한 것이 처음이었다고 알려진다. 헨리 코올은 훗날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 되었던 사람이다.

    이런 분위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웬지 모르게 흥겨움과 설레임으로 들뜨기 시작한다. 이런 평화와 기쁨의 분위기는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은 늘 상 누군가로부터 기쁨과 감사의 소식을 기대하기 때문일까? 그렇다!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우리 곁에 오셨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장 14절)

    누구든 크리스마스만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은 신비하고도 평화스러운 별빛의 인도하심을 따라 지극히 낮은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오셨다. 기쁨과 감사를 전하는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조용히 내려오신 것이다.

    크리스마드카드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그림과 축복의 글들이 담겨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흔히 등장하는 도안이 예수님의 탄생을 인도한 별을 그린 장면이라고 여겨진다. 낙타를 탄 동방 박사들이 먼 하늘의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사막을 여행하는 정경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 이런 카드를 보면 사람들이 늘 상 생각하는 별이 있다.

    바로 계명성이라고도 불리는 샛별이다. 샛별은 새벽에 동쪽하늘에 빛나는 금성을 말한다. 이 별은 저녁이 되면 서쪽 하늘에서 신비한 흰 빛을 낸다. 사람들은 가끔 이 금성의 유난히 밝은 모습 때문에 이 별이 UFO(미확인 비행물체)가 아닌 가 착각을 하기도 한다. 이 별이 저녁 무렵에 보일 때는 샛별이 아닌 태백성 또는 개밥바라기라고 달리 불려진다.

    새벽이나 초저녁이나 금성의 눈부신 흰빛은 여전하다. 서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이 별의 위치는 동방박사들을 인도하였다는 방향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 별을 동방 박사들이 바라본 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금성이 가장 밝은 빛을 낼 때는 운이 좋다면 낮에도 푸른 하늘에서 이 별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금성은 약 2년마다 이 같은 현상을 반복한다.

    고대의 박사들은 천문학의 전문가였다. 그들이 금성의 이런 현상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갑자기 나타나서 동방 박사들을 인도한 별이 금성이라고 보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하네스 케플러의 연구

    베들레헴 별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한 학자 중에는 ‘케플러의 법칙’으로 유명한 케플레(1571-1630)도 있었다.

    ‘천문학을 공부한 내가 예수님 탄생의 비밀을 한번 연구해 보자“

    케플러는 한때 목사가 되려고 신학을 공부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님의 탄생과 성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였다. 케플러는 1603년 목성과 토성이 가깝게 만나는 현상을 관측하게 되었다. 밤하늘에서도 유난히 빛을 내는 이 두 혹성이 가깝게 접근한다는 것은 천문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관심을 가지게 될 만큼 눈에 띠는 일이었다.

    ‘혹시 이런 현상이 예수님이 탄생할 무렵에도 있지 않았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천문학자 케플러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예수님 탄생 전후의 목성과 토성이 만나는 시기를 계산해 보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기원전 7년의 5월, 10월, 12월에 이 두 혹성이 물고기자리에서 연달아 접근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당시는 이미 유럽 지방 대부분에서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목성과 토성의 만남은 무슨 깊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기원전 7년 경 동방의 박사들이 이 신비스런 현상을 보고 유대 나라를 향하여 길을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

    예수 탄생은 실제로 기원전 3-7년 사이에 있었을 거라고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추정한다. 이 두 혹성의 접근을 계산하고 여러 문헌을 참조하여 성경의 연대를 세밀히 분석해본 케플러는 예수님께서 기원전 4년에 탄생하였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이 언제 탄생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들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케플러의 견해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예수님이 우리가 쓰는 서기 1년에 태어나셨다는 증거는 안타깝게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고대 점성술에서 목성은 왕 중의 왕별이었다. 토성은 가나안을 지키는 방패를 상징하였다. 물고기자리는 시리아와 팔레스틴과 연관된 별자리였다. 동방의 어떤 점성술 학자가 이런 내용을 염두에 두고 유대의 왕이 유대 땅 팔레스틴에 태어났다고 짐작하였다면 앞뒤가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태양계 안에는 우리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또 하나의 행성이 있다. 바로 붉은 색깔을 띠면서 빛나는 화성이다. 기원전 7년 목성과 토성이 가깝게 접근할 때 화성도 그 가까운 옆을 지났으므로 밤하늘에서 유난히 빛나는 이 세별이 가깝게 만나는 장면을 사람들이 예사롭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사실 별들은 맨눈으로 관찰하는 한 마치 그 늘어섬이 항상 일정하다. 그래서 별들을 항성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금성이나 화성, 목성, 토성 등은 우리의 눈에는 빛나는 별처럼 보이나 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혹성들이다. 태양과 같은 항성이 아닌 것이다. 태양을 돌면서 태양에서 오는 빛을 발하는 행성인 것이다. 물론 지구도 금성과 화성 사이에 있는 혹성 즉 행성이다. 물론 지구는 1년에 한 바퀴씩 태양을 돌게 된다.

    그런데 목성이나 토성은 지구보다 훨씬 더 먼 곳에서 태양을 돌고 있다. 그래서 목성은 약 12년, 토성은 약 28년에 한 번씩 태양을 돌게 된다. 이것을 공전주기라고 부른다. 이런 규칙에 따라 약 20년 마다 목성은 토성을 앞지르게 된다. 이 때 두 혹성이 지구에서 볼 때 가까이에 접근하는 듯 보이게 된다. 이런 접근은 보통 1번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때로는 반년 남짓한 사이에 3번 만났다 떨어지는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지구에서 볼 때 토성과 목성이 모두 태양의 반대편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면서 천구 상에서는 세 번을 만났다 떨어지는 것 같은 모습을 그리게 된다. 이렇게 3번 접근하는 현상은 약 59년에 한번 있는 아주 진귀한 현상이다. 이때는 지구와의 거리도 아주 가까워지므로 겉으로 느껴지는 혹성의 밝기도 최대가 된다. 즉 지구에서 아주 밝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사실은 밝기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다른 항성들은 위치의 변함이 없이 늘 일정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도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이들 혹성들이 가깝게 접근하면 누구든 관심을 갖게 마련이었을 것이다. 하물며 점성술가나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들은 더더욱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동방의 박사들은 좀체로 보기 어려운 이 별들이 한곳으로 모이는 움직임을 보고 유대 땅으로 달려갔던 것일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베들레헴의 별은 단수형으로 되어있다. 즉 한 개의 별이 예수님의 탄생을 안내한 것이다. 예수님은 한분이셨다. 그렇다면 두 행성이 만났다는 것은 한분 예수님을 인도한 별이 오직 한 개라는 의미와 잘 맞지 않게 된다.

    핸프리즈의 새로운 이론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핸프리즈 박사는 이런 사실에 몇 가지를 조합해서 다음과 같은 조금 새로운 이론을 내놓았다.

    “동방박사들은 기원전 7년 목성과 토성이 몇 달에 걸쳐 3번 연달아 만나는 것을 확인하였을 겁니다. 그리고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무언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해 목성과 토성과 화성은 천구(주: 땅에서 관측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늘을 공 모양으로 여기고 부르는 천문학의 용어)상의 좁은 곳에 모여들었지요.

    그런데 기원전 5년의 봄, 염소자리에 이상한 낯선 별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눈에 익숙하지 않은 별이었지요. 이 신기한 별은 중국의 옛 기록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이 별을 객성이라고 하였지요. 하늘에서 발생한 이런 일련의 신비스러운 현상을 동방의 박사들은 분석했을 겁니다. 그리고 어떤 결론에 도달합니다. 어떤 확신을 가진 거지요. 즉 동방 박사들은 팔레스틴을 향하여 길을 떠났을 겁니다.”

    중국 사람들이 객성이라 부르는 별은 혜성(주: 태양을 촛점으로 긴꼬리를 끌고 타원이나 포물선 등을 그리며 운동하는 천체, 꼬리별이라고도 부름)이나 신성(주: 희미한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환해져서 빛나다가 다시 서서히 희미해져 버리는 별을 일컫는 말)을 부르는 말이다. 이들 역사적 근거와 천문학적 사실을 결합해서 추정한다면 그들은 수개월 후 현지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이런 자료를 가지고 헨프리즈 박사는 예수님의 탄생은 5월경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성경은 양치는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이 사실이 유대 땅 5월의 풍경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 별의 수수께끼가 모두 풀린 것은 아니다. <계속>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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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

    “성령 잉태와 동정녀 출생 교리에 대하여”(누가 1:24-38; 마태 1:18-23) - 이병일 목사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날을 기억하고, 평화를 위해 오신 예수님의 오심을 여전히 기다리는 성탄절이 가까이 오면 교회나 신학의 저변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특히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서로 혼합되어 하나의 이야기로 각색되고 얽혀져서 연극이나 설교에 인용이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지금까지도 많은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과 마리아가 처녀(동정녀)로 예수님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CE 100년경부터 로마에서 고백되기 시작하여 사도신경으로 정착된 신앙고백문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에게 나시고” 라고 고백합니다. 이 성령으로 잉태와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든 반감을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공격하기 쉬운 표적이 됩니다.

    또한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현대의 생물학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두 교리를 믿음의 목록에서 제외시키는 이들도 있습니다. 개신교인들 중에는 가톨릭 전통에서 동정녀 탄생에서 시작된 마리아 숭배를 반대하기 위해서 두 교리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와 동정녀 탄생이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두 교리는 예나 지금이나 이해와 믿음의 기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이성이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두 교리는 웬만한 믿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잉태와 동정녀 탄생을 확실하게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117년 이그나티우스가 가현설을 비판하면서 주장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한 가현설은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로 태어난(generatio)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doceo)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마리아를 통한 육체적 출생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성서적 표현은 등한시 되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논의가 중세를 거치는 동안에 마리아 교리로 확대되어 논지를 잃었습니다.

    성서와 교회의 역사 사이에서 성서의 의미가 잘못 적용된 사례들이 많이 있는데, 그 유형을 보면 어떤 성서의 내용이 교리화 되어 왜곡된 경우와 성서의 의미 자체가 현실에서 왜곡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처녀(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하는 구절에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교리가 나왔습니다.

    더 나아가서 중세 교부들의 성과 여성에 대한 혐오와 원죄교리와 맞물려서 마리아는 평생동안 처녀로 있었다는 ‘동정녀 마리아’ 교리와 성모 마리아의 ‘무흠’이나 ‘승천’ 교리와도 연결됩니다. 물론 마리아에 대한 숭배가 역사 속에서 불교의 보살 신앙처럼 여신으로서 각 지역에서 토착화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은 그것이 교리화 되면서 파생되는 또 다른 교리 때문에 왜곡된 경우입니다. 그러한 왜곡 때문에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에 회의적인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은 헬라 철학자 켈수스(Celsus)의 주장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켈수스는 예수님은 마리아와 로마 군인 판테라(Phantera) 사이의 사생아였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하여 오리겐(Origen)은 “켈수스 반박서”에서 조목조목 비판하였습니다.

    켈수스에 의하면 물레질로 생계를 꾸려가던 시골의 가난한 여인인 마리아는 한 로마 군인 판테라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임신하였기 때문에, 목수인 남편에게 버림받고 떠돌아다니다가 예수를 낳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도 안티기독교 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해석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신화나 영웅탄생 설화 등이 인용되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Avesta)는 페스시아 신화를 담고 있는데, 세계의 종말을 앞두고 세 명의 구세주가 1,000년의 간격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난다고 합니다. 조로아스터 사후 천 년이 지날 때마다 아우쉐타르(Aushetar), 아우쉐타르마(Aushetarmah), 사오쉬안트(Saoshant)가 구세주로 출현한 후 세계의 종말이 시작되는데, 조로아스터는 이 세 구세주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조로아스터의 정액이 페르시아의 한 호수 속에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있다가 동정녀가 그 곳에서 목욕하여 위대한 인물을 임신하게 되어 태어나는 아들이 구세주가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대의 신화나 전설에서 영웅이나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잉태될 때부터 남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았다는 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증언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처녀”를 “젊은 여자”로 번역하면서까지 합리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현대인의 상식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렵다고 성서의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그 시대에 그 공동체에 어떤 의미가 있었고, 또한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과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같은 사건의 다른 표현입니다. 전자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적과 표적의 근거와 내용이고, 후자는 형식과 외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의 마리아 교리와 동정녀 탄생이 연결되면서 서로 분리된 것처럼 인식되어 있습니다. 성령에 의한 잉태의 의미를 찾는다면 동정녀 탄생의 의미도 함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서 잉태하지 못하던 여인들이 기적처럼 아이를 낳은 이야기들이 성서에는 많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비롯하여,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의 어머니 사라(21장), 리브가(25장), 라헬(창 29-30장), 그리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그렇습니다. 자녀 즉 대를 이어줄 후손이 없다는 것은 모든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그렇듯이 이스라엘에서도 큰 수치로 여겨졌습니다(창 16:4,11; 29:32; 30:1,23; 삼상 1:5-7). 이것은 여자에게는 더욱 심각하게 적용되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를 통해 구원의 때까지 생명을 이어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생명이 끊어지므로 구원의 때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때문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멸시와 부끄러움을 당한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유대 랍비들은 하느님 앞에서 파문 당하는 일곱 가지 유형의 사람들의 예를 들고 있는데, 그 목록의 서두에 “유대인으로서 아내가 없는 자 또는 아내가 있는데도 자식이 없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이혼의 정당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엘리사벳의 수태는 엘리사벳과 사가랴에게 구원의 때와 관련된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두 부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의 수태를 하느님의 개입으로 인정하며, 이제는 부끄러움과 수치에 잠겨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조금 상황이 다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기를 잉태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아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상황이었지만, 마리아는 아직 임신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더 엄격히 말한다면, 약혼한 여인이 남편과 무관하게 임신을 했다는 것은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8장의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친정으로 쫓겨난 후에 임신한 소식을 들었을 때, 유다는 다말을 화형에 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여자아이들은 12 혹은 13세가 되면 이러한 가족 간의 합의를 통해 약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이 일년이나 계속되면 결혼과 같은 구속력을 발휘했습니다. 약혼은 결혼과 동일한 성적인 제약을 여자에게 가했고, 남자에게는 그 제약을 어긴 여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약혼한 사이에 남자가 죽으면 그 상대의 처녀는 법적으로 과부로 간주되었고, 율법에는 “과부 처녀”라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천사로부터 잉태의 소식을 들은 처녀 마리아는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덮는 듯한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천사가 전해준 소식을 마리아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가 무엇을 위해 태어날 것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아이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소명을 가지고 잉태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거나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 아이의 소명에 극적인 긴장감을 줍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하느님의 성령이 가장 독특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탄생에 활동하셨다는 것을 보다 아름답고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이 가지고 있는 세 개의 열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를 내리는 것,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것, 그리고 여인의 태를 열어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모든 아이들이 출생하는 데에는 세 분의 동역자, 즉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성령의 역사 없이는 결코 아이를 출생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그 사건이 개인이나 가족 혹은 모든 사람의 구원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구원 사건이 이 땅에 펼쳐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게 하는 일이 하느님의 고유한 일인 것처럼, 하느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소명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아이는 성령에 의해 잉태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여인의 태를 열어서 아이를 낳게 하는 원천기술이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의 탄생은 하느님이 자기의 에너지를 나누는 일이라는 말처럼, 한 사람의 탄생과 그 사람이 생명을 누리는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해 펼쳐질 하느님의 뜻이 있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분명히 마리아가 처녀(동정녀)일 때에 거룩한 영에 의해서 예수님을 잉태를 하였고, 출산을 하였다고 말합니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습니다. 마태는 이 속담을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처녀인 마리아가 애를 배었는데, 마태는 이를 적극적으로 보도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위대한 사람의 치부까지도 보도하고 있는 것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그러면 마태와 누가가 굳이 마리아의 처녀 임신을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에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구원자로서의 로마 황제는 다른 영웅 탄생 이야기에서 많이 등장하는 것처럼 신적인 능력에 의해 처녀에게서 태어났다고 합니다(플라톤, 알렉산더, 시이저, 아우구스티누스 등). 그러나 마태나 루가는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탄생했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정복과 지배에 의해서 평화를 만드는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사람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는 가브리엘 천사는 이와 동시에 두 아이의 소명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줍니다. 이스라엘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로 인하여 구속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소명을 전달하고 일깨워 주는 것은 부모의 몫이고, 또한 그 소명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지요.

    인도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코함 코함’(ko ham, ko ham)하면서 운다고 합니다. 같은 울음소리인데, 우리에게는 ‘응애 응애’ 하고 들리는 것이겠지요. 코함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산스크리트어라고 합니다. 인도인들이 전해주는 <가르파 우파니샤드>에는, 어머니 자궁 속에 있는 태아가 일곱 달이 되면 그 영혼에게 과거와 미래의 지식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이 때 아기는 자신이 과거에 무엇이었으며 미래에 무엇이 될 것인지를 알게 되는데,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것을 잊고 ‘코함 코함’하고 자기를 찾는 것이라고 합니다. 태어나면서 시작된 물음이 점점 자라면서 진정한 자기를 찾고 소명을 깨닫기 위한 시작입니다.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른이 된 사람들이나 아직 어린 사람이나 이제 태어날 사람이나 자기의 존재와 소명을 깨닫는 그 순간에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 앞에서 성령의 움직임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숨 쉬는 순간순간이 모두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시간이고, 삶의 의미를 펼치기 위한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을 어떻게 펼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그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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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적인 지역 교회와 한국교회

    신약성경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115번 나오는데 이들 중 20회는 구원받은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통칭하는 교회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이 20회는 비가시적인 우주적인 전체 교회, 즉 오순절 날 교회가 탄생한 이후부터 휴거될 때까지의 모든 구원받은 성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나머지 95회는 믿는 사람들로 구성된 지역의 회중, 즉 지역 교회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지역 교회는 일정 지역에 있는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을 말한다(<한국 침례교의 신학적 특성>, 침례신학대학교, 124쪽).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KJV)"고 말씀하시며 여기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여기서 교회라는 단어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이 복음 시대에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을 의미하는 '우주적인 교회'를 가리킨다. 또한,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고 말씀하면서 교회에 대해 두 번째로 언급했는데, 여기서 언급된 교회는 '지역 교회'를 가리킨다.

    이처럼 예수님은 두 차례에 걸쳐 교회에 대해 언급했는데, 첫 번째는 '우주적인 교회'이며 두 번째는 '지역 교회'인데, 이같이 언급된 순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주적인 교회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지역 교회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인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마태복음>, 어니스트 타담, 한국엠마오성경학교, 102쪽). 왜냐하면, 서두에 언급했듯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는 '우주적인 교회'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의 두 가지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먼저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개척과 그 시작의 중요성, 그리고 교회 개척에 관한 몇 가지 모델과 지역 교회의 구성에 관한 성경 말씀'에 대해 살펴보고, 그 후에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진리(교리)에 대한 '실행적인 측면'에 대해 알아보자.

    신약성경에는 여러 지역에 지역 교회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테면 예루살렘 교회·안디옥 교회·고린도 교회·갈라디아 교회·에베소 교회·빌립보 교회·골로새 교회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지역 교회들을 합쳐 30개가 넘는데, 이 교회들 전부가 다 '순회 사역자'들에 의해 세워졌거나, 세워지고 나서 그런 사역자들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순회 사역자들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인, 바나바, 실라, 디모데, 디도, 에바브라 등이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 등 12사도도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위해 보냄을 받았다(<유기적 교회 세우기>, 프랭크 바이올라, 대장간, 143~144쪽).

    신약성경 에베소서 4장 11절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한 다섯 가지 유형의 은사자들, 즉 사도·선지자·복음 전도자·목자·교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은사자들은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명은 '전체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한 지역 교회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영구적인 은사자들인 복음 전도자와 목자와 교사는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한 지역 교회에 국한하지 않고 전체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일꾼들인 것이다(<신약 교회의 조직>, 도날드 노비, 전도출판사, 85쪽).

    저명한 성경 주석가인 윌리엄 맥도날드도 그의 저서에서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은사자들은 한 지역 교회에서 평생 직분자로서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가 스스로 그 사역을 감당할 수준이 되도록 세우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따라서 그 교회가 자립하면 그들은 순회 사역자로서 타 지역으로 옮겨갔다"고 언급했다(<사도행전>, 윌리엄 맥도날드, 전도출판사, 146쪽).

    <모임에 대한 성경의 원리>의 저자인 알프레드 깁스는 그의 저서에서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특별한 은사자들이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일을 스스로 해 나갈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세워 준 후에 다른 일터로 이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을 세워 준 후에는 가능한 한 짧은 시간 안에 다른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 한 지역에서 얼마 동안 머무느냐가 아니라 그 지역에 머무는 목적이 무엇이냐에 있다"고 서술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은사자들은 어떤 한 장소에서 일생을 보내려는 타고난 성향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늘 자기 자신을 이동성이 있는 상태로 두어야 한다. 즉, 때가 되면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경계해야 할 또 하나의 위험은 성도들이 자기 없이는 잘해 나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없으면 성도들 숫자가 줄어들고 교회가 산산조각이 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잘못된 것이며, 그리고 그와 같은 은사들은 전문적인 교육이나 훈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모임에 대한 성경의 원리>, 알프레드 깁스, 전도출판사, 87~88쪽).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가장 흔한 교회 개척의 방법은,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가 혼자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기존 교회가 새로운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교회에서 부목사가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면 그 교회의 담임목사와 갈등을 빚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 신자들 중 일부가 개척되는 교회로 이동하는 것을 담임목사가 꺼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의 '교회론'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개교회의 성장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성장인데도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교회 개척>, 목회와 신학 편집부, 두란노 아카데미, 160쪽).

    대개 한 사람의 목사나 전도사가 고생고생하며 교회를 세우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주인 행세를 할 가능성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혼자서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에 은연중에 자신이 교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에 십상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의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므로 비성경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게 된다.

    그리하여 교인 수가 불어나 교회가 커지면,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이 교회의 우두머리이자 교회의 주인이 되기에 십상이다. 이런 자들이 나중에 교회가 파탄이 나거나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을 모조리 출교시키고, 자신은 끝까지 남아 주인 행세를 하거나, 아니면 상황이 불리할 때 교회를 팔아먹거나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시키곤 하는 것을 주변에서 적지 않게 목격하게 된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3장 6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교회 개척'의 사역을 밭을 경작하는 것에 비유를 들고 있다. 이처럼 교회 개척자는 씨를 심는 사람이다.

    교회 개척자는 교회를 시작한 사람으로서 교회가 태동하고 자라나도록 복음의 씨를 심는 사람이다. 성경은 시작에 상당한 강조점을 둔다. 그 이유는 영적인 세계에서는 시작이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 시작이 교회의 질뿐만 아니라 운명도 결정하게 되는데, 이처럼 교회의 시작이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유기적 교회 세우기>, 21~22쪽).

    이제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시작'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시작은 상술했듯이 교회를 세우기 위한 다섯 가지 유형의 은사자들에 의해 교회가 개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신약성경에서는, 사도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인 바나바, 디모데, 디도 등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교회의 기초적인 은사자들인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영구적인 은사자들인 복음 전도자들과 목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지역 교회가 세워지고 있고, 이런 방식이 성경적임을 알 수 있다.

    상술했듯이 지역 교회는 신학교를 졸업한 한 사람의 목사나 전도사 또는 전문적인 교육이나 훈련을 받은 한 사람의 사역자(일꾼)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 성경적이 아님을 살펴보았다. 지역 교회를 세우는 다섯 가지 유형의 은사자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주신 은사자들이다(엡 4:7).

    이 가운데 복음 전도자는 복음을 전해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활동을 주로 하며, 목자들은 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며, 교사들은 성경의 올바른 교리를 가르친다. 이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새로운 교회가 개척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주님의 이름 아래 모임>, 노먼 크로포드, 기둥과 터, 121쪽).

    위의 방식이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범적인 '안디옥 교회'의 모델 방식이다. 이 방식은 사도적 일꾼들이 새로운 도시들에 교회들을 개척하기 위해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된다. 우리는 사도행전(13:1~20:38)에서 사도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안디옥에서 파송되어 갈라디아 지방과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교회들을 세운 것을 볼 수 있다.

    안디옥 모델에 의하면, 사도는 교회의 기초를 놓으려고 한 곳에 3개월 또는 6개월 정도 머문 후 그곳을 떠난다. 그 후 교회의 성장을 돕기 위해 동역자들을 파송하거나 다시 방문하기도 한다. 그러한 교회들은 나중에 장로들이 생겨나 성숙한 교회가 된다. 이러한 안디옥 교회 모델이 모범적인 교회 개척의 방식이다(<유기적 교회 세우기>, 34~37쪽).

    다음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모델이 있다. 사도행전 8장 1절에 "그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대한 큰 박해가 일어나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지역으로 널리 흩어지니라"고 쓰여 있다. 이처럼 한 무리의 사도적 일꾼들에 의해 큰 교회가 하나 생겨나고, 몇 년 후에 박해로 말미암아 다른 지역에 새로운 교회들이 '이식' 또는 '이주'에 의해 증식하여 생겨나는 방식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4~5년간 계속하여 성장한 후에 박해가 시작되자, 많은 성도는 예루살렘에서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서 새로운 교회들이 생겨났다(행 8:1~8).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흩어져서 새로운 교회들을 세운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있을 때 유기적인 교회 생활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경험을 다른 지역으로 가지고 갔던 것이다. 그리고 새로 생겨난 교회들은 이후에 사도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12사도는 새로 개척된 교회들을 순회하며 씨에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해 주었다(행 9:32~11~30). 그들은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지는 데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그 교회들 안에 계속 머무르거나 교회를 좌지우지하지도 않았다.

    상술한 것처럼 예루살렘교회가 성장한 후에, '이식' 또는 '이주'에 의해 증식된 새로운 교회가 생겨났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어느 한 지역의 교회가 성장한 후, 신자들 수가 많이 늘어나면 이식 또는 이주에 의해 다른 지역에 새로운 지역 교회가 생겨날 수가 있는데, 이럴 때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모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앞의 책, 30~31쪽).

    국내에서는 상기와 같은 교회 개척 방식을, 소위 '분립 개척' 방식이라고 일컫는다. 이 방식은 기존 교회가 성장하여 신자 수가 불어나면, 신자 수를 적당히 나누어 새로운 지역에 '분립 개척'하여 새 지역에 교회를 생겨나게 하는 방식이다. 사실 목회자가 교회의 신자들을 떼어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자기 살을 떼어내는 것 같은 아픔이 있다. 그럼에도 분립 개척을 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그 일을 한다. 그 이유는 개교회의 성장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나라의 성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교회 개척>, 157~159).

    그 외에도 성경에는 에베소 교회의 모델과 로마 교회의 모델이 있다. 에베소 모델은 사도바울이 노년에 교회를 개척하고 젊은 일꾼들을 훈련해 주변 지역에 새로운 교회들을 개척하기 위해 일꾼들을 파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로마 모델은 여러 다른 지역 교회에 살고 있던 신자들이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고 한 도시로 모여 이식시킨 방식이다.

    상술한 것처럼 신약성경은 1세기 때 교회가 개척된 네 가지 방식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 교회를 개척하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성경적 방식인데, 오늘날엔 그것을 찾아보기가 어렵다(<유기적 교회 세우기>, 45~46쪽).

    이제 지역 교회의 구성에 대해 알아보자. 흔히 신자들 가운데, 두세 사람의 성도가 모이면 그것을 곧 교회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람의 수가 몇 명이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것이 곧 교회가 아니냐고 말한다. 그런 주장은 일반적으로 마태복음의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말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데, 교회란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며 몇 사람의 성도가 모여서 구성된다고 해서 그것 자체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말씀(마 18:20)은 앞의 문장과 관련하여, 전반적인 주제는 '지역 교회의 권징'에 대한 교훈이다. 앞의 문장인 17절에 "만일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고 쓰여 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교회'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20절의 '두세 사람'은 믿는 사람의 단순한 수가 아니라 '지역 교회에 속한 두세 사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지역 교회에 속한 어떤 성도가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을 알게 된 교회의 다른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여기서 '두세 사람'은 교회의 권징을 위한 절차에 대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두세 사람'의 작은 수라도 모이면 교회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소수라도 교회가 구성될 수 있다는 근거가 아니라, '권징 사역의 절차'에 관련된 것이다(<열매 맺는 신앙생활>, 이광호, 도서출판 깔뱅, 243~244). 상기 내용의 출처와 같이 장로교단의 목사인 이광호 교수는 마태복음 18장 20절 말씀의 주제를 '지역 교회의 권징'에 관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장로교단의 윤석준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언급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이 말씀을 '기도에 대한 본문'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 본문(마 18:20)은 주로 우리에게 '기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많이 사용되는데, 보통 이 말씀은 "여러분이 모여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십니다"고 말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 본문은 전혀 기도에 대한 본문이 아니다. 이 본문은 앞의 문맥과 관련하여 살펴볼 때 기도에 대한 본문이 아니라 '지역 교회의 권징'에 대한 내용이다(<한국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 이야기>, 윤석준, 부흥과 개혁사, 29~30쪽).

    상기처럼 윤 목사도 '지역 교회의 권징'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앞의 책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85문에도 "신자가 교리나 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답지 않고, 또 자신의 오류나 악행에서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실을 교회 곧 치리회에 보고해야 하며 이에 대한 근거 구절로 마태복음 18:15~18을 인용하고 있다"고 써 놓았다(앞의 책, 36~37).

    그리고 많은 성경 주석을 집필한 윌리엄 맥도날드도 그의 저서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이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구절은 문맥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선으로는 단순한 형태의 신약의 '지역 교회의 구성'을 가리키거나 일반적인 '기도 집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떤 죄로 말미암아 분리된 두 그리스도인의 사이에서, '범죄자의 징계'에 관해 화해를 도모하는 모임을 가리키는 말씀이다"고 서술했다(<마태복음>, 윌리엄 맥도날드, 전도출판사, 280쪽).

    또한, 노먼 크로포드와 한스 바우만도 그들의 저서에서 "마태복음 18장 17절에 나오는 교회는 '지역 교회'를 가리키는데, 지역 교회에서 죄를 범한 자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려 할 때는 징계가 필요하다. 이 징계를 위해서는 치리회와 같은 모임이 필요한데, 교회의 질서와 유지를 위한 치리는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들의 몫이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한두 사람(18:16), 두세 사람(18:20)'은 지역 교회의 장로들이라 볼 수 있다"고 써 놓았다.

    그리고 "당시 예수님은 이 '한두 사람'이 지역 교회의 장로들이라고 말씀하실 수 없었는데, 이는 당시 유대의 회당에 장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시점에서 장로들을 언급한다면 혼란이 초래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20절의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이는 모임은, 지역 교회의 치리를 위한 가장 작은 집회인 '장로 모임'을 의미한다"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함께 모이다'는 헬라어로 '쉬나고'이다. 20절의 '모이다'는 의미로 번역된 '쉬네그메노이'의 원형은 '쉬나고'인데 이것은 함께 모인다는, 모임 또는 집회의 의미가 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임(집회)들은 모두 '쉬나고'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모임의 진리>, 노먼 크로포드, 기둥과 터, 10쪽 / <이미 있는 진리를 생각하라>, 한스 바우만, 전도출판사, 15~17, 157쪽).

    지금까지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개척과 그 시작의 중요성, 그리고 교회 개척에 관한 몇 가지 모델과 지역 교회의 구성에 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성경 말씀에 관해' 여러 저자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그럼 이제는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진리(교리)에 대한 '실행적인 측면'에 대해 알아보자. 이에 대한 저명한 성경 교사들의 저서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 대체로 '큰 주제들을 중심'으로 공통점을 모아 보았다. 그 큰 주제들이란, 첫째로 성경적인 지역 교회의 구성원에 대한 것과 둘째로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두 가지 예식인 침례와 주의 만찬에 대한 것들이다.

    먼저, 지역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해 알아보자. 신약성경 빌립보서 1장 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 쓰인 것처럼 지역 교회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 즉 성도들, 감독들, 그리고 집사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지역 교회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성경적임을 알 수 있다.

    초기 교회 시대에 성도들이 집회를 가지려고 주로 모인 장소는 가정집이었는데, 대개 일반 가정집보다는 조금 규모가 큰 가정집을 소유한 성도의 집이었다. 이러한 가정집에는 대개 40명에서 50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으며, 간혹 거실이 크면 70명 정도 모일 수 있었다(<신약성서의 교회>, 다니엘 해링턴, 대한기독교서회, 84쪽). 이처럼 가정집에서 모임을 한 성경에 나오는 지역 교회들은 상기처럼 세 가지 부류(성도들, 감독들, 집사들)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 부류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가 성도들이다. 이 성도들은 영적으로 거듭난 구원받은 신자들을 가리킨다. 교회란 이처럼 구원받은 신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지 않은 가짜 신자들의 모임은 교회가 아니며, 이런 가짜 신자들은 수백 명이나 수천 명이 모여서 집회를 해도 이런 교회는 비성경적인 가짜 교회이다. 이를테면 기독교 이단들인 모르몬 교회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회나 신천지교회 등은 비성경적인 가짜 교회들이다.

    심지어 국내 주요 교파나 교단 내에서도 구원받지 않은 가짜 신자들이 부지기수다. 생명의 말씀사 대표이며 장로교단의 목사인 김창영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기를 "국내 교회에는 짝퉁 구원이 판을 치고 있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짝퉁으로 믿는 교인들이 많으며 한국교회에는 구원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구원받음>, 김창영, 생명의 말씀사, 20~21쪽). 이처럼 국내 교회에도 구원받지 않은 신자들로 이루어진 비성경적인 가짜 교회들이 부지기수다.

    더욱이 국내 주요 개신 교파와 교단 내에서는 구원도 받지 않고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주요 교파의 16명 목사와 신학대 교수들이 집필한 저서에서도 언급하기를 "국내에 자신의 개인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는 목사들이 뜻밖에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한 뒤 마치 운전 면허증을 취득하듯이 강도사 고시, 목사 고시를 보고, 그다음 절차에 의해 목사 안수를 받는데 안타깝게도 자신은 구원의 확신도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자들이 목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먼저 구원의 확신부터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교회 개척>, 105쪽). 이처럼 이런 가짜 목사들이 존재하는 교회가 바로 가짜 교회이다.

    상기에 언급한 세 가지 부류 가운데 두 번째로 나오는 사람들이 감독들이다. 이 감독들은 장로들과 같은 사람들이며, 이러한 장로들은 지역 교회에서 양 무리에게 본을 보이며 양 무리를 인도하며 감독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자격은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 나타나 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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