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 교회 열심히 다녀라 / 한국 초기 개신교가 급성장한 이유 2015-11-19 15:59:45 read : 484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동엽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 교회 열심히 다녀라”…스타인헤븐
방송인 신동엽이 간암 투병 끝에 돌아가신 생전의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신동엽은 지난 2011년 12월 18일 기독교IPTV ‘김종철의 인크:interview with christian’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100%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며 “어머니의 돌아가실 때 유언은 딱 하나였다. 교회 열심히 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전에도 교회는 다녔지만 진심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유언으로 남기고 하나님 곁으로 가셨다”고 덧붙였다.
신동엽은 어머니가 3개월 밖에 살 수 없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5년을 더 살았다고 전했다. 그는 “병원에서 3개월 밖에 못 산다고 했는데 어머니가 항암치료를 계속 받다가 너무 힘들어하셔서 기도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하나님 곁으로 가고 싶다고 해서 식구들이 회의를 한 끝에 그렇게 결정을 했다”며 “약도 다 집에 놔두고 기도원에 가셨는데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병세가 호전되어서 5년을 더 사셨다”고 밝혔다.
“원래 제가 잘 안 믿는 성격이에요. 교회 관련된, 하나님의 역사 그런 걸 다 떠나서 제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잘 안 믿는 성격인데 그때 몇 년 동안 어머니의 모습을 다 지켜보았기 때문에 저 역시 삶을 다할 때까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합니다.”
모태신앙인 신동엽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에 위치한 한국기독교장로회인 경복교회에 다니고 있다.
신동엽은 “어릴 때부터 다녀서 전교인의 얼굴을 다 안다”며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식구들과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결혼을 해서 아내와 아이, 아이의 할아버지 이렇게 3대가 함께 예배를 보니까 너무너무 행복하다”며 미소를 지었다.
“하나님이 언제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느끼게 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신동엽은 “어려움이 왔을 때마다 눈앞에 어떤 기적이 일어나고 그걸 헤쳐 나가는 게 아니라 어려움을 겪는 그 순간도 하나님이 저를 위해 예비하신 일이라고 결국 느낄 수밖에 없게 하실 때다”며 “그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수밖에 없고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느낀다.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신동엽은 기도제목으로 욕심을 내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욕심이 더 많아지는 거 같다”며 “모든 화가 욕심에서 비롯된 거 같다. 제발 욕심을 많이 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했다. “사업을 하는 와중에 경제적으로 큰 상처를 받았고 마음적으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받았다”며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 뜻대로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
청년들 100% 자율 운영한‘교회 속 교회’…
신촌감리교회의 특별한 실험
헌금-지출 등 재정 독립 시키니 신앙생활 능동적으로
▲임재웅 목사(앞줄 왼쪽 일곱 번째)와 젊은이교회 성도들이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신촌감리교회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신촌감리교회 제공
서울 신촌감리교회(임재웅 목사)는 지난 1월 특별한 실험을 시작했다. 청년부를 재정적으로 독립시켜 스스로 낸 헌금을 자율적으로 각종 사역에 사용하도록 했다. 이 교회 청년부의 이름은 ‘젊은이교회’. 젊은이교회는 출범한 지 1년도 안 됐지만 이미 신촌감리교회의 ‘교회 속 교회’로 자리 잡았다. 교회 안에 젊은이교회 문패가 내걸린 사무실까지 만들었다.
신촌감리교회는 무슨 이유에서 이런 실험을 벌이는 걸까. 최근 이 교회에서 만난 임재웅 목사는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믿음의 실험’을 벌일 수 있게 독려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젊은이교회는 제가 과거 경기도 성남 선한목자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할 때 시도한 적이 있는 실험입니다. 청년들이 직접 재정을 운영하니 신앙생활이 능동적으로 바뀌더군요. 언젠가 이런 시스템을 신촌감리교회에도 도입하자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교회는 청년들이 주님의 뜻을, 그리고 자신들의 믿음을 세상에 보여주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현재 젊은이교회 출석 성도는 90명 수준이다. 이들 중 60%는 직장인, 나머지는 대학생이다. 이들의 1년 헌금액은 약 7000만원으로 헌금액의 30% 이상을 선교나 구제 사역에 사용하는 게 원칙이다.
이에 따라 젊은이교회는 매달 헌금액 중 일부를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등지에서 캠퍼스 선교사역을 하는 단체들에 기탁하고 있다. 해외 선교사를 후원하거나 신촌감리교회가 벌이는 ‘사랑의 집수리’(국민일보 11월 9일자 26면 참조)에 필요한 금액 중 일부를 지원하기도 한다.
재정을 어디에, 얼마나 쓸지는 젊은이교회 ‘집행부’인 기획위원회에서 결정한다. 기획위는 젊은이교회를 구성하는 재정팀 예배팀 봉사섬김팀 새가족팀 등을 이끄는 팀장 7명과 청년대표, 담당 전도사 등 9명으로 구성돼 있다. 기획위의 의사결정은 만장일치로 하는 게 원칙이다.
임 목사는 “성령 안에서 고민하면 무슨 안건이든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판단해 만장일치제를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젊은이교회는 완벽에 가까운 자율성을 누리지만 신촌감리교회에 소속된 교회”라며 “전 교인수련회 등의 행사가 열리면 젊은이교회 성도들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면서 장년 성도들도 청년들의 활동을 지지하게 됐다”고 전했다.
젊은이교회는 신촌감리교회 중고등부 학생과 지역사회 청소년 등 총 80여명을 모집해 내년 1월 8∼10일 인천 강화도로 캠프를 떠난다. 청소년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면서 최고의 ‘섬김’까지 보여주겠다는 취지에서 캠프 이름은 ‘헤븐리 메시지 캠프(Heavenly Message Camp)’로 정했다.
젊은이교회 담당 사역자인 김종성 전도사는 “해외나 농어촌 선교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건 청소년 선교라고 판단해 이 같은 캠프를 계획했다”며 “최고의 교육 콘텐츠를 선사하기 위해 캠프 예산으로 2500만원을 책정했다”고 말했다.
“젊은이교회는 여타 교회의 청년부와는 분위기부터 다릅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나의 교회’라고 여기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청년들의 마음이 정말 큽니다. 저희는 앞으로도 믿음의 실험을 꾸준히 벌일 계획입니다. 쉼 없이 도전하는 교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
뮤지컬배우 리사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하나님이 왜 안 주셨는지”…스타인헤븐
뮤지컬배우 리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고백했다.
지난 9월 18일 방송된 CGNTV ‘토크콘서트 힐링유’에 출연한 리사는 “저희가 하는 직업이 화려하게 보이지만 뒤에서는 굉장히 외로울 때도 많다”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이 세상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구나’를 깨닫게 된다. 그걸 느끼고 나니 저의 열심이 창피해졌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거다. 물론 지금도 제가 원하는 대로 안 되면 속상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시간이 지나면 깨달아 지는 듯 하다”고 말했다.
리사는 나누고 싶은 ‘힐링’의 경험에 대한 질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답했다. 그는 “세상은 점점 더 경쟁이 심해지고 시기 질투도 많아지는 것 같다”며 “저 자리에 올라서려고 밟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전했다. “저도 그런 마음을 갖게 될 때가 있는데 그 자체가 참 힘들었어요. 그래서 생각한 게 내가 최대한 사랑을 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랑이 자라는 게 보이더라고요. 앞으로도 최대한 그렇게 하려고 해요.”
마지막으로 리사는 힐링이 필요한 이들에 전하는 메시지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했다. 그는 “내가 안 믿어서 내 힘으로 해보려고 하다가 상처가 나고 아프기도 하다가 다시 돌아온다”며 “나중에는 하나님이 왜 주시고, 안 주셨는지 다 알게 된다”고 강조했다. “힘든 길을 택하지 마시고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좋을 듯 하다”고 전했다.
2003년 가수로 데뷔한 후 뮤지컬로 활동 무대를 넓혀 ‘광화문 연가’ ‘에비타’ 등 굵직한 작품에 출연했다. 12월 대구 오페라하우스에서 개막하는 뮤지컬 ‘투란도트’에서는 투란도트 역을 맡아 무대에 선다.
================================================
추수감사절] 여수 개도 월항교회 “바다, 땅에서 풍요를 주셨네”…
섬 교회의 풍요로운 감사주일
▲추수감사주일을 앞둔 12일 오후 전남 여수시 화정면 개도리 월항교회 성도들이 추수한 곡식과 과일, 어패류를 앞에 두고 한 해를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개도(여수)=강민석 선임기자
12일 오후 전남 여수 앞바다에 있는 개도 월항교회에 도착하자 성도들이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주민 50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개도는 여수 백야선착장에서 배로 20여분 거리에 있다.
성도들은 바닷가가 훤히 보이는 교회 앞에 추수한 쌀을 비롯해 호박 고구마 모과 무 감 유자 볼락 전어 문어 등 농수산물을 잔뜩 쌓아놓았다. 한 해 동안 정성껏 수확한 농작물과 물고기들이다.
이 교회 김본암(63) 장로가 이른 아침에 잡은 문어를 손에 들고 “그놈, 참 잘 생겼네”라고 자랑을 하자 찬양 인도를 하는 이강엽(68) 권사는 “우리 집에서 재배한 고구마가 제일 토실토실하고 크고 잘생긴 것 같아”라며 맞장구를 쳤다.
성도들은 올 한 해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함을 하나둘 털어놨다. 성도들의 감사함에는 추수의 기쁨만 있지는 않았다. 91세 장가심 할머니는 “건강을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면서 “주일예배 때마다 일찍 교회에 도착해 기도드린다”고 고백했다.
김월례(87) 집사는 목사님 말씀을 듣고 싶어 주일이 제일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교회생활 3년째인 정인혜(86) 성도는 “올해는 집에 불이 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교인들이 도와줘 재건축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김금석(74) 집사는 “암에 걸려 병원에서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지만 하나님을 굳게 의지했다”면서 “이제 항암치료를 두 번만 더 받으면 된다.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고마워했다.
이 교회 김종수(67) 담임목사는 숨겨왔던 더 큰 감사의 사연을 밝혔다. 김 목사는 “하나님이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신학을 공부하게 하시고 목사안수까지 받게 하셨다”며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간증했다.
그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했다. 조실부모한 그는 열여덟 살에 고향 여수를 떠나 상경했다. 놀고먹다 보니 나쁜 친구와 어울렸고 폭력조직에 가입했다. 죄의 깊이가 날로 더해갔다. 서울 영등포 ‘백마파’ 두목이 됐다. 후배 100여명의 생활까지 책임졌다. 세력 다툼이 이어졌다. 결국 그는 다섯 번이나 수감생활을 반복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교도소에서 예배를 드리다 예수님을 처음 알게 됐다. 어둠의 길에서 벗어나려 밤마다 몸부림쳤다. 출소 후 전남 순천 목장개발원 현장에서 나무 베는 일을 감독하면서 한 목회자의 인도를 받아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기 시작했다.
닭똥 같은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비둘기 같은 평화가 영혼을 감쌌다. 난생처음 누리는 안식이었다. 이후 그는 인생관이 완전히 변했다. 자신의 안위보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 총회신학원 부설 여수 성경신학교에서 3년간 성경을 공부했다. 이어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고 서울 홍은동 개혁신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칼빈대 신학생 이순주(58) 사모와 1987년 결혼한 뒤 2년간 경기도 안양에서 목회를 하고 1990년 7월 이 마을에 왔다. 월항교회가 후임 목회자가 없어 어렵다는 말을 듣고 농어촌 목회를 자원한 것이다.
“지난날의 잘못이 너무 크기에 조금이나마 뉘우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목회자들이 외면하는 도서 벽지를 택했고 외딴 섬 월항교회로 부임하게 된 것이지요. 사실 목회자로 사용해 주신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드려요.”
당시에는 개도로 오려면 여수 뭍에서 두 시간가량 배로 이동해야 했다. 개도 선착장에 내려서도 한 시간을 걸어야 교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 살배기 딸은 김 목사가, 두 살인 아들은 이 사모가 안고 걸었다. 교회에 도착해 보니 예배당 벽돌 사이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비가 오면 빗물이 새는 예배당, 고개를 들고는 들어갈 수 없는 오두막 사택이 전부였다. 이런 환경에서 노인과 여성 성도 9명이 첫 예배를 드렸다. 김 목사는 이날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그동안 살아온 힘들었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함께해 온 박선자(65) 권사는 “목사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회개와 구원을 강조하셨다”며 “그래서 그런지 목사님 말씀에는 힘이 있고 성도는 물론 마을사람들에게도 본이 되신다”고 말했다.
어느덧 이곳에서 김 목사 부부는 26년의 세월을 보내며 목회를 해 왔다.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바닷가가 보이는 언덕에 작지만 아름다운 예배당과 식당을 신축했고 방 3개가 딸린 아담한 사택도 지었다.
김 목사 부부는 이 마을 26가구의 복음화를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 김 목사는 마을주민의 집에 전기나 수도 등이 고장 나면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간다. 사망한 주민과 유가족들을 위해 장례예배를 드리는 것도 김 목사 부부의 사역 중 하나다.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자살을 하려던 청년을 구해 목회자로 만든 일도 있었다.
김 목사는 평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다. 세상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하고 배신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영원토록 함께하시고 책임져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월항교회의 올해 목표는 ‘내 집을 채워라’(눅 14:23)이다. 가족 복음화와 월항마을 복음화, 무교회 섬 복음화가 구체적인 실천 사항이다.
김 목사는 “부족한 종”이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이 없었다면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걸어오는 격려의 전화나 성도들이 감사하다며 놓고 간 쌀과 음식 등 작은 정성도 소중한 힘이자 큰 격려가 된다고 했다.
김 목사는 교회 사역이 행복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 고된 사역이지만 앞으로 농어촌 목회를 돕는 손길이 많이 늘어나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교회 앞날에 청사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느 농어촌교회처럼 경제적으로 많이 어렵다. 마을사람 대부분이 노인이어서 이분들이 숨을 거두면 농어촌 마을은 무인촌이 되고 교회는 자연스레 문을 닫아야 한다.
김 목사 부부에게는 작지만 큰 소망이 있다. 아프고 병든 마을 노인들을 모시고 사는 교회 겸 요양원인 ‘소망의 집’을 건립하는 것이다.
김 목사는 “힘들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면 해결책이 나올 것”이라며 “마을주민을 섬기고 말씀으로 치유 받는 참된 교회로 거듭나고 싶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이름도 빛도 없는 농어촌교회 목회에 많은 기도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
온라인서 선교비 모금, 1년 만에 36억 성과
선교단체 원바디 ‘미션 펀드’, 크라우드 펀딩 형식 도입해 4000여명이 ‘클릭’으로 선교사 1000명 후원
온라인상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선교비를 모금하는 ‘미션 펀드’가 개설 1년여 만에 36억여원을 모금했다. 현재 미션 펀드를 통해 후원받고 있는 선교사는 1000명, 후원자는 4000명을 넘어섰다.
세계 각국에서 성경 읽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선교단체 ‘원바디’(회장 최부수)는 18일 서울 종로의 한 식당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클릭만으로 간편하게 모금 또는 후원할 수 있는 플랫폼인 미션 펀드를 지난해 9월 개설한 이후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미션 펀드는 인터넷을 통해 일반 대중으로부터 사업자금을 조달하는 ‘크라우드 펀딩’과 같은 방식으로 미션 펀드 홈페이지(mission fund.org)를 통해 운영된다. 이 홈페이지를 통해 선교사와 후원자가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이 홈페이지에 자신의 선교 사역을 소개한다. 그러면 이 홈페이지 방문자가 선교사들 중에 특정인을 선택해 후원을 약정할 수 있다. 신용카드 정기후원 또는 계좌이체 정기후원도 가능하다.
최부수 회장은 “선교사들이 후원자 발굴과 관리에 신경 쓰기보다 현지 선교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 펀드를 개발했다”며 “선교사들은 안정적 후원자들을 확보함으로써 무엇보다 장기적인 선교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해외 선교사들은 후원자 발굴과 관리를 위해 한 해에도 몇 번씩 한국을 방문하기도 한다.
원바디는 새로운 후원자 발굴을 위해 원바디 회원과 각 선교사의 지인들에게 메일을 보내 후원을 독려한다. 후원 계좌의 잔액이 부족하면 후원자에게 이를 알려주는 역할도 한다. 이렇게 모인 후원금은 매달 정해진 날에 지정된 선교사에게 송금한다. 매달 300만원 이상 후원받는 선교사도 있다. 후원자 1인당 후원액은 5000원이나 1만원이 가장 많다.
최 회장은 “그동안 원바디 후원 현황을 분석한 결과 소액 후원은 5년 이상 지속된다”며 “선교 사역을 안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선 5000원, 1만원 등 소액후원이 더 낫다”고 말했다.
원바디는 미션 펀드를 활성화하기 위해 예수전도단(YWAM), 성경번역선교회(GBT), 이랜드 아시안미션, 예장합동 총회세계선교회(GMS), 홉(HOPE) 선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OMS 등과 협약을 맺었다.
원바디는 최근 업그레이드된 미션 펀드 2.0 버전을 출시했다. 새 버전에선 긴급 구호, 교회 건축 등의 프로젝트를 후원자 주도로 진행할 수 있다. 후원 목표치와 현재 후원액을 그래프로 쉽게 비교할 수도 있다.
최 회장은 “성경 소책자 ‘바이블 타임’을 통해 성경 읽기 운동을 확산시키는 것과 더불어 미션 펀드를 원바디의 핵심 사역으로 정해 국내외 선교사들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한국 초기 개신교가 급성장한 이유
민족주의 형성·근대 문명 보급·토착화…근대 신흥종교로 자리 잡는 데 성공했기 때문
옥성득 sungoak@hotmail.com
13회에 다루었던 초대 한국교회의 정체성과 민족교회론의 문제를 조금 더 살펴보자. 이 주제는 초대 한국 개신교가 왜 급성장했는가 문제와 맞물려 있다. 즉 교회론이 약하고 현실도피적인 신앙으로 서구화된 교회였다면 근대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몸부림쳤던 개항기의 급변 시대에 성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회학이나 거대 담론 입장에서 1910년 이전 초대 한국 개신교 성장의 2대 요인으로 기독교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 형성과 기독교 문명(Christian civilization) 보급을 든다. 곧 정치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이다. 나는 여기에 기독교 토착화(Christian indigenization)를 더한다.
나는 기독교 토착화를 한국 개신교 성장의 3번째 요인으로 본다. 곧 초기 한국 개신교가 민족적·근대적·토착적인 종교로 발전해 급성장했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민족의 문제에 참여적이었고, 봉건적 가치를 부정했으며 근대적 가치인 자유와 평등(자본주의·과학기술·민주주의)을 추구하는 새로운 문명을 소개했다. 동시에 전통 종교들에서 접촉점을 찾아 기독교화하는 현지화를 이루었다. 그렇게 개신교는 한국의 한 근대 신흥종교로 자리 잡았다.
▲ 기독교 민족주의 지도자들(1896~1910년).
한국 초기 개신교 민족주의 지형도
서구 기독교 국가가 선교하면서 아프리카나 아시아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은 선교국(서양 국가들)과 식민국(일본)이 달라 기독교인으로서 민족주의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물론 전 세계 기독교 선교에 존재하고 있는 식민성과 문화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 요소가 있었지만, 한국은 상대적으로 민족성을 담아낼 수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허약해진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자 민족주의자들은 충군애국 운동(황제 탄신일 기념식, 조선 건국일 기념식, 애국가 작사 운동, 태극기 게양 운동 등)을 전개해 고종 황제의 권위를 높였고, 새롭게 '만들어 가는' 근대 민족국가 형성에 기여했다. 1897~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개신교 선교사(아펜젤러, 언더우드 등), 한국인 개신교 지도자(서재필, 윤치호 등), 청년들(배재학당의 이승만 등), 지방 유지들(평양의 길선주, 안창호 등)이 참여해 국권과 민권을 고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기독교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05년 반일 시위를 주도한 평양 교인들이나 상동청년회(전덕기, 김구 등)의 활동, 1907년 일부 개신교인의 의병 전쟁 참가(구연영 등), 친일파 척결 암살 활동(1908년 전명운과 장인환의 스티븐슨 저격, 1909년 우연준의 이토 통감 처단 참가) 등의 과격한 민족운동이 있었다.
그와 함께 온건한 교육 애국 계몽 운동(YMCA와 여러 학교들), 그리고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비밀결사인 신민회 운동도 진행됐다. 기독교는 내연(內燃)의 긴 과정을 거친 후 외연(外延)하지 않았다. 기독교 정신과 성경의 가르침이 심겨진 사람들이 현실에 참여하는 활동가·운동가가 되었다.
이를 도표화한다면 아래와 같은 기독교 민족주의 지형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1세기 팔레스타인 4개의 종파가 민족문제를 놓고 각각 다른 해법을 내어놓았다면, 1905~1907년 한국 개신교는 초월적인 부흥파와 교육을 내세운 애국 계몽파가 서로 겹치면서 주류를 형성했다. 의병 투쟁이나 암살 운동에 가담한 소수의 무력 항쟁파도 존재했다. 그러나 아직 친일파나 세상을 떠나는 은둔파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도표에서 좌상(左上)에 무게중심이 있었다. (1910년대에는 애국 계몽파가 해외로 이주하면서 약화되고, 1920년대 이후 문명론의 교육 운동은 오른쪽으로 옮겨 간다.)
총독부는 이러한 기독교 민족주의를 탄압하기 위해 1910년 안명근 사건을 계기로, 1911년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날조하여 600여 명을 체포하고 105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 대부분이 개신교인이었다. 105인 사건 이후 개신교는 상당 기간 성장세가 멈추었다. 외부적으로 총독부의 탄압과 교육령과 같은 규제가 작동하면서 기독교 민족주의가 약화됐기 때문이었다. 역으로 그 운동을 가져간 만주나 해외에서의 개신교는 성장하였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연희전문대학 설립 문제를 놓고 논쟁이 지속되면서 에너지를 소비했기 때문에 교회 성장이 멈추고 쇠퇴했다.
기독교 문명 보급이 낳은 사회변혁
1910년 이전 초대 한국교회의 두 번째 성장 요인은 기독교 문명 보급에 있었다. 이는 근대화를 통해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던 조선-대한제국의 의제와 맞닿아 고종과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개신교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가 증가했다. 근대 문명에서는 인권과 여권신장이 중요했다. 백정 박성춘은 시의인 에비슨의 치료를 받고 개신교인이 된 후 백정 해방운동의 지도자가 되고 만민공동회 연사로 활동하였다. 그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첫 졸업생으로 첫 의사로서 면허를 얻어 신분 상승을 이루었다.
양반 남편이 첩을 얻은 후 외로이 지내던 전삼덕은 1900년 전도 부인이 되어 북한 지방 전도에 헌신했다. 김점동(박에스더)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보구여관에서 미국인 여의사 홀의 조수로 일했다. 그녀는 후에 미국 볼티모어여자의대를 졸업하고, 1900년부터 한국의 첫 (여)의사로 일하며 여성 전문 직업인 시대의 문을 열었다. 부자의 후처로 들어간 하란사는 미국 웨슬리언대학에서 공부하여 한국인 여성으로서는 처음 문학사로 졸업하고 1906년 이화학당 교사가 되었다.
고아·불구로, 여종이었던 이은혜(이그레이스)는 보구여관에서 하녀로 일하다가 수술 후 바로 걷게 되었으며,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고 간호원양성학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1908년 첫 졸업 간호원이 되어 독립된 전문인의 길을 걸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김마르다는 1908년 졸업, 간호원이 되어 간호원양성학교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들은 1920년대에 등장한 '신여성'을 예고하는 1900년대 기독교 신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내연-외연의 이분법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회변혁의 동력이 되었다.
▲ 1900년대 기독교 신여성들.
중국과 일본에서는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도입하고 근대 신지식을 교육하는 학교나 대중화하는 인쇄소, 서양의학 병원 등을 세속 정부나 단체들이 설립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상당 부분 선교 학교, 선교 출판소, 선교 병원이 그 일을 담당했다. 첫 근대 정부 병원인 제중원 원장에도 선교사 의사인 알렌, 헤론, 빈턴, 에비슨을 임명했다. 1904년 남대문 밖의 세브란스병원은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최신 시설을 자랑하는 제일급의 근대 병원이었다. 한국의 첫 대학도 개신교가 세운 평양 숭실기독교연합대학(1905년)과 서울의 조선기독교대학 곧 연희전문학교(1915년)였다. 기독교는 현실도피적이지 않았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토착화는 어떻게 진행됐나
민경배는 1965년 초대교회가 선교사들이 이식한 문화제국주의적인 서구 신학으로 인해 한국이 서구화됐다고 주장한 이후, 40년 넘게 그 주장을 수정하지 않았다. 1990년대 말부터 탈식민주의 이론에 따라 등장한 소장 종교사학자들도 의식의 식민지화, 통제, 담론, 모방 등의 이론을 이용해 내한 선교사들의 식민성과 서구화를 비판했다.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미화하거나 그들의 영웅전을 쓸 필요는 없다. 동시에 그들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일이다. 나아가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신자들의 주체적 수용과 그들 스스로 한국 개신교를 만들어 나간 주체적 전통을 연구하고 재평가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흔히 토착화에서 다루는 첫 주제가 '네비어스' 정책이다. 네비어스는 신속한 복음화를 위해 자급(지원받는 교회가 아닌 독립하는 교회: 선교사의 돈이 아닌 본토인의 돈으로)·자전(고용된 전문 전도사가 아닌 자원봉사를 하는 평신도 전도인에 의해)·자치(멀리 있는 선교사가 지시·통제하는 것이 아닌 훈련된 현지 본토인 지도자들이 직접민주주의 원칙으로 다스리는)를 통해 본토인이 주인이 되는 토착적인 교회를 설립해 확장하는 선교 초기에 적절한 모델이었다.
한국교회는 대체로 이 3가지 점에서 성공하여 1907~1910년에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다. 문제는 상황이 변한 도시에서 전도와 교회 개척 위주의 정책을 지속한 것이다. 1910년대 상황 변화에 따라 선교 정책의 변화가 불가피했으나 네비어스 정책이 성공했기 때문에 버리기 어려웠다. 한 정책만을 고수할 경우 교회는 고인 물이 되어 시대에 뒤지게 된다.
1910년 이전 한국교회는 네비어스 정책을 비롯해 한문으로 된 성경, 소책자, 주석서, 찬송가, 신학서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번역해 사용하는 등 같은 한문 문화권에 있는 중국 개신교회가 두 세대에 걸쳐 만든 여러 좋은 문서·정책·신학을 수용해서 이용했다. 중국 기독교는 서구 기독교가 한국 기독교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했으며, 유불선 전통 종교에 대한 그들의 종교 신학은 한국에서 기독교를 유교·무교·불교·동학 등과 유기적으로 접목할 수 있도록 싸매는 새끼줄의 역할을 했다.
토착화의 좋은 예들은 한글 성경에서 새 용어인 '하나님' 만들기, <정감록>에 나와 있는 구원의 방도인 '弓弓乙乙'을 십(十)자가로 해석한 것, 무교·불교·도교의 귀신(잡귀·객귀·병귀 등) 쫓기 의식을 기독교 축귀 의식으로 바꾼 것, 새벽 기도회 만들기, 추도회 만들기 등이었다.
1960년대 이후 3자 원칙에, 제4자인 자기 신학(self-theology)이 추가되었다. 자기 신학 입장에서 볼 때도 1900년대에 등장한 최병헌, 길선주 등의 자기 신학화 작업은 기독교 토착화의 좋은 출발이 되었다. 두 사람에 대한 논의는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참고 - 옥성득, "한일 합방 전후 최병헌 목사의 시대 인식," <한국 기독교와 역사> 13 (2000년 9월): 43~72; 옥성득, "평양 대부흥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 <한국 기독교와 역사> 25 (2006년 9월): 7~35)
성장세 꺾인 일본 개신교와 급성장한 한국 개신교의 차이점들
▲ 1909년 출판된 최병헌의 <성산명경> 표지. 신소설 형태의 첫 근대 비교종교론 서적이다.
위의 3가지 요인을 일본 개신교와 한국의 개신교를 비교하는 관점에서 바라보자. 일본에서는 기독교 민족주의가 허약했다. 대신 신도(神道) 민족주의로 무장한 천황주의가 국체 이념이 되어 한국을 침략했다. 기독교는 제국 신학으로 변질해 러일전쟁을 거룩한 의전(義戰)으로, 한국의 식민지화를 하나님의 나라인 신국(神國)의 확산으로 보았다. 그리고 기독교가 근대 문명의 상징이기도 했으나 곧 진화론·사회학·인류학 등 세속 학문과 사상이 바로 들어와 기독교 문명보다는 세속 서구 문명을 수용했다. 또한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러일전쟁 이후 일본 개신교의 성장은 둔화되었다. 반면 기독교 민족주의, 기독교 문명, 기독교 토착화가 진행된 한국의 개신교회 규모는 1909년이 되면, 역사가 길고 수많은 선교회들이 엄청난 돈과 인력을 투자한 일본 교회보다 더 커지게 된다.
논쟁적인 1907년 대부흥 운동의 성격도 이런 큰 틀에서 보아야 한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도 아래 도표처럼 105인 사건 이후 크게 세 부류로 분기되었다. 교회 부흥과 성장에 치중하는 부흥파, 애국 계몽 운동의 흐름을 이은 온건한 교육파, 그리고 점차 그 입지가 좁아지면서 해외로 이주한 정치 참여파.
이 세 집단은 1907년 당시에는 완전히 분기하지 않았고 공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부흥을 경험한 다수의 민족주의자가 있었으며, 항일운동에 참여한 다수 인물도 부흥 운동의 영적 기초 위에 활동했다. 선교사들이 비정치화 목적에서 부흥 운동을 추진했음에도 한국 신자들이 역사 현실에서 부흥 운동을 이끌며 애국 계몽, 항일 민족운동에 참여한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다.
▲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1900~1915)
.
결론적으로 1910년 이전 한국 개신교는 건전한 교회론을 바탕으로 교회 성장과 부흥을 위한 운동,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외면하지 않았다. 한국 개신교는 반봉건 근대화 운동과 항일·민족운동에 투신했으며, 이런 정치·사회적 토착화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의 신학·의례·건물 등에서도 한국적인 기독교를 만들어 가는 토착화를 이루었다.
옥성득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석좌 부교수(한국기독교)이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