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교회는 무늬만 개신교다. 이 말은 한국의 개신교회가 정체성을 잃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먼저 한국교회가 왜 그리고 얼마만큼 개신교의 본궤도에서 벗어났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 다음에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노력하지 않고 잃은 것을 혹은 빼앗긴 것을 되찾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한국교회를 개신교답게 만들기 위해서 일어서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할 수 없는 우리의 일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일어섰다. 그는 중세의 가톨릭교회가 부패한 근본 원인이 사제들의 권위주의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사제들의 권위주의는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 사제들이 제사장이라는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했다. 제사장은 구약에 있었던 직분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후에는 모든 사람이 제사장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는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루터는 만인제사장주의를 내세웠다.
교권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만인제사장주의는 교회의 개혁을 위한 아주 중요한 모토였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에서 만인제사장주의는 실종되고 말았다. 권위를 추구하는 목사들은 교인들을 그들 앞에 납작 엎드린 바보들로 만들었다.
한국교회 목사들의 권위주의는 중세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의 권위에 육박하는 정도다. 어떤 면에서는 목사들의 권위의식이 사제들의 것을 웃돌고 있다. 그래서 현재 한국의 개신교회는 루터가 꿈꾸던 교회와는 거리가 먼, 목사들의 권위주의가 판치는 곳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무늬만 개신교라는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16세기에 루터는 사제들의 권위주의로 인해서 부패할 대로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일어섰다. 권위주의와 부패는 손잡고 간다. 교회의 물질적 부패를 말해 주는 대대적인 면죄부 판매가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선언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제들의 성적 타락도 극에 달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의 독신주의를 내세우기 때문에, 사제들이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첩을 두고 사생아를 낳아 길렀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교황조차도 여러 명의 첩을 거느렸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어느 누구도 사제들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권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이단으로 몰려서 처형당하는 판이었다. 중세기의 가톨릭교회의 교인들은 성경을 읽지 못했고, 하나님에게 직접 기도할 수도 없었다. 사제들만이 성경을 읽고, 사제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당시에 교인들은 사제들의 명령에 맹종하는 바보군단이었다
개혁자들은 교인들을 사제들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 라틴어 성경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해서 누구나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사제의 중재 없이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믿는 사람들은 모두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선언하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바보로 만들지 말라고 외쳤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교인들은 중세시대처럼 바보가 되어 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교인들은 목사들의 기도에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목사는 목자이고 교인은 그들의 양이기 때문에 교인은 목사에게 절대 순종해야 한다. 목사들은 기름부음 받은 목사의 말을 거역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벌을 받는다고 교인들을 세뇌시켰다. 이렇게 목사의 권위와 권한이 중세교회 사제들의 교권을 무색케 할 만큼 높아지면서 교인들은 목사들의 비행을 보아도 못 본척하고 입이 있어도 말해서는 안 되는 바보가 되고 말았다.
이 바보군단을 거느리는 목사들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거칠 것이 없다. 목사들이 기복신앙을 설교해도, 목사들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몰아내도, 교회 재정을 유용하고 비자금을 만들어도, 교회를 자녀들에게 물려줘도, 애인을 두거나 간통을 해도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오히려 말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해치는 사탄의 세력으로 몰린다. 이런 한국교회를 보면 개신교회가 교권주의와 부패로 물들었던 중세의 가톨릭교회로 돌아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부패를 지적하며 걱정한다. 이러한 교회의 부패를 막아줄 방부제는 없는가? 우리 함께 그 방부제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 1521년 4월 16일. 브롬스의회에서 교황의 타락을 경고하는 루터
목사의 축복권과 안수권
목사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해 왔다. 그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려고 한다. 그들에게는 양심도, 하나님이 인간의 중심을 보신다는 데에 대한 믿음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목사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단지 성경을 가르치는 일과 개별 교회를 대표하는 당회장으로서 교회를 치리하는 일인데, 목사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축복권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축복권의 근거를 하나님이 제사장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하라고 말씀하신 민수기 6장 23-17절에서 찾는다.
가톨릭에서는 사제가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신부에게 축복권이 있다는 것이 말이 된다. 그러나 만인제사장주의의 모토 위에 세워진 개신교의 목사들이 제사장의 축복권을 계승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욕심에 맞지 않는 만인제사장주의를 뒷전으로 밀쳐놓았다.
평신도든 목회자든 모든 사람이 제사장 같은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이 바로 만인제사장주의의 주장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을 중재하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었다.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자기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직접 할 수가 없었고 제사장이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그들의 죄를 용서받게 해주었다. 제사장에게는 백성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이 주어져 있었다. 만인제사장주의의 기초 위에 세워진 개신교에서는 모든 신앙인은, 성직자든 평신도든,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고 그 기도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면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오셔서 제사장의 중재 없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이 숨을 거두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짐으로써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으로, 제사장의 역할이 끝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사도들은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계 1:6),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계 5:10) 등의 구절들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두 제사장 된 것을 증언하고 있다.
목사들에게 축복권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기도에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고, 내가 친구를 위해서 기도하고,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렇게 모두들 기도할 때, 목사의 기도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도하는 사람의 간절함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교인들은 집을 사서 이사할 때 혹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목사를 모셔다가 축복기도를 부탁한다. 이사를 하거나 개업을 할 때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목사가 축복해 주기를 원하는 것은 목사의 기도에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목사의 기도에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구약의 제사장 제도로 돌아가는 일이며, 사제의 기도에 특별할 능력을 부여하는 가톨릭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만인제사장주의를 주장하는 개신교의 신앙원리를 부인하는 일이다.
목사는 축복권을 즐기고 교인들은 그 능력에 의지한다. 이것은 샤머니즘의 영향인 것처럼 보인다. 샤머니즘에서 무당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신과 통하는 사람이고 그들의 주술에는 특별한 힘이 작용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한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어머니는 기도를 하면 악귀가 물러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꿈이 뒤숭숭하면 주기도문을 외우셨다. 전도부인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주기도문은 악귀를 물리치는 주문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샤머니즘적인 것을 의식하지 않지만,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서 샤머니즘의 영향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목사가 새 집이나 새로운 일터에 와서 기도해 주면 그 장소가 정화되고 그곳에서의 삶이 무탈하거나 그곳에서의 사업이 번창할 것이라고 믿는다.
처조카가 동물병원을 개원했다. 집사람을 통해서 들으니 개업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조카네 교회의 담임목사가 안식년 중이어서 문제가 생겼단다. 목사가 외국에 나가 있기 때문에 목사가 귀국할 때까지 두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개업을 두 달 후로 미루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더니 이미 집을 사고 내부시설도 끝냈는데, 어떻게 개업을 미루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부목사를 모시고 개업예배를 드리면 되겠다고 말했더니 처제가 담임목사를 모시고 예배를 드려야지 어떻게 젊은 부목사님을 모시느냐고 말한단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나이 든 내가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축복하면 되겠다고, 내가 복을 빌어주면 목사가 축복하는 것보다 더 사업이 번창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적인 학자의 길을 걸어왔고,
신앙을 인정받아 장로가 되었고, 아이들도 잘 되었으니 이렇게 복을 받은 사람이 복을 빌어주면 조카의 병원에도 하나님의 복이 넘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집사람은 목사도 아니면서 무슨 소리냐고 내 제안을 한 마디로 거부했다. 내가 예배를 인도하겠다는 말은 짐짓 해본 소리지 처제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귀국한 후, 개업한 지 두 달이나 지나서 조카네 동물병원에서 개업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집사람을 따라 나섰다. 가서 들으니 개업한 두 달 동안 병원에 손님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처제는 개업예배를 드리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개업예배 설교 후에 기도하면서 목사님은 다른 집에 가서도 하는 똑같은 말로 복을 빌었다.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떡 반죽 그릇에 차고 넘치도록 복을 달라고 기도했다. 예배가 끝나고 헤어질 때 처제는 두툼한 봉투를 목사님의 손에 쥐어주면서 수고하셨다고, 감사하다고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떠나면서 목사가 앞으로 병원이 잘 될 것이라고 말하자 처제는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동안 병원이 잘 되지 않은 것은 주변에 동물병원이 많고 개업한 이 병원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예배를 인도했더라면 개업한 지 두 달이나 지난 후에 개업예배를 드리는 어설픈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봉투를 받을 리가 없으니까, 병원도 잘 되지 않는다는데, 비용도 적게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장로의 축복과 목사의 축복을 차별하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조카의 병원을 위해서 기도했더라면 담임목사보다 훨씬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진심 어린 기도에 더 귀 기울이시지 않을까.
목사들의 안수기도 역시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과 권위를 부여하는 일이다. 금요 철야예배를 마친 후에 담임목사가 병자들을 위해서 안수기도를 하고 부흥집회에서 강사가 안수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안수하는 목사들은 자기들에게 특별한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안수기도를 받는 교인들도 그렇게 믿는다.
물론 치유의 은사를 받은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렸다. 그러나 만인제사장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의 모든 목사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개신교의 신앙원리에 맞는 일이 아니다. 평신도들에게도 치유의 능력이 있을 수 있다. 치유의 능력이 있는 어느 집사가 그 능력을 널리 인정받기 위해서 목사가 된 경우도 있으니까.
목사들의 축복권이나 안수권을 인정하는 것은 가톨릭교회 사제의 권위를 그들에게 부여하는 일이다. 그리고 목사들의 권위가 높아지는 그만큼 그들에게 순종하는 교인들은 더 엎드리게 된다. 그것은 개혁자들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며 성경적이지도 않다. 그럴 때 만인제사장주의는 실종되고 개신교는 정체성을 잃는다.
내 양을 먹이라
목사들이 자기들을 목자로 교인들을 양으로 생각하는 데서 그들의 권위의식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목사들은 교회에서 시무하는 것을 목양한다고 말하는데, 담임목사의 사무실 출입문 위에 ‘목양실’이라는 표지판을 붙여 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목사들은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 교인들을 그들의 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를 댄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특별히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연거푸 물으신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때 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신다. 여기서 목사들은 베드로가 양을 먹이고 양을 치니까 베드로는 목자고 교인들은 양이라고 해석한다. 그 해석이 맞는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노래하는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에 자신을 양에 비유하고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0:11)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을 목자에 신앙인들을 양에 비유하신다. 이 두 경우에 하나님과 예수님은 목자며 다윗이나 교인들 같은 인간은 모두 양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실 때도 예수님은 목자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 교인들은 모두 양이다.
그런데 목사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내 양을 먹이라” 혹은 “내 양을 치라”는 명령이다. 양을 먹이는 사람, 양을 치는 사람은 목자니까 베드로는 목자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먹이라” 그리고 “치라”는 말이 양과 함께 비유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 단어들은 돌보라는 말이다. 그리고 “내 양”이라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이 비유적 표현은 예수님과 인간들의 관계를 가리킬 뿐 베드로와 다른 인간들의 관계에까지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양이 베드로의 양이 될 수는 없다.
양에 대한 오해가 아주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어본다. 이철웅 씨가 1년 동안 아프리카 오지로 출장을 가면서 아들을 데리고 갈 여건이 아니기 때문에 동생에게 “아내도 없이 혼자 영철이를 키우다보니 네게 이 아이를 맡기고 갈 수밖에 없게 되었구나. 힘들겠지만, 내가 없는 동안 내 아들을 돌보아 주렴.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고 하자.
이 경우에 영철 씨가 동생에게 아들을 돌보아 달라고 말했지만, 부자관계는 철웅 씨와 영철이 사이에서만 성립될 뿐 동생과 영철이 사이까지 연장되는 것이 아니다. 철웅 씨 편에서는 영철이가 아들이지만, 철웅 씨의 동생 편에서는 영철이가 조카이다. 영철이를 1년 동안 맡아 키우더라도 철웅 씨의 동생과 영철이는 숙질간이다.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양을 맡아 돌보더라도 베드로와 그가 돌보는 그의 이웃과의 관계는 그 임무를 맡기 전과 마찬가지로 형제자매의 관계, 즉 인간과 인간의 관계다. 따라서 목사가 교인들을 자기의 양이라고 부르거나 자기를 목자라고 생각하면서 목양한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러면 왜 목사들이 “내 양을 먹이라”는 이 비유적 표현을 그렇게 잘못 해석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권위의 안경을 통해서 이 문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톨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소망이 작용한 것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목사들이 자기들에게 적용하는 데서 그들이 그들 자신을 베드로 사도를 잇는 특권을 지닌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엉뚱한 해석이며 오만한 일이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는 그 말을 하시지 않고 베드로에게만 하셨다. 다른 제자들을 모두 제외하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 21:20)조차 제외하고 베드로 개인에게 하신 말씀을 목사들 모두에게 적용해서 일반화하는 것은 온당한 일인가? 더구나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그들에게 권위를 주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에 바로 이어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어떻게 죽을지를 예언하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 장면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같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21장 15-23절의 문맥을 살펴보면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 십자가가 내포하는 순종, 사랑, 희생 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권위를 부여하셨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순종과 희생을 명하셨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가톨릭에서는 초대 교황이 베드로라고 생각하면서 교황은 베드로를 잇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목사들조차도 자기들과 베드로를 동일시하면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권이 자기들에게도 주어졌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에는 무리가 있을 뿐 아니라, 목사들이 잘 아는 대로, 개신교에서는 교황도 베드로도 목사도 평신도도 모두 하나님 앞에 나란히 서 있는 거룩한 백성이라는 만인제사장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바울이 가끔 양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도 우리는 그 말을 조심스럽게 비유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목양실이라는 말도 비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목사들이 양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다 보면 문자적 의미가 비유적 의미를 대신할 염려가 있다. 특히 권위적 태도가 작용하면 비유적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지금 개신교의 목사들은 가톨릭의 사제들보다도 부담 없이 권위를 즐기고 있다. 1965년에 열린 제2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사제의 권위적인 자세의 오류를 지적했다. 베드로에게 양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적인 표현이고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목자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래서 제2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사제 교육을 받은 4, 50대의 신부들은 선배들과 달리 겸손한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난 번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떠나기 전에 사제들에게 남긴 말은 이런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 교황은 아직도 권위의식을 버리지 못한 신부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신부는 겸손한 자세로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권위적이고 부패한 교회에 대항하여 일어난 해방신학의 본거지에서 성장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제들이 지닌 권위주의의 문제점을 몸으로 배운 사람이다.
아직도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들이 제사장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적인 역할을 하는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제2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그리고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교황을 영입하면서 권위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개혁자들의 모토에 역행하여 목회자들이 제사장적인 권위를 즐기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교회가 개신교다워 지려면 우선적으로 만인제사장주의를 회복하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
기름부음 받은 자의 권위
목사들은, 특별히 부흥강사들은 목사를 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왔다. 그들은 다윗이 그를 박해하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는데도 사울을 죽이지 않은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의 기록을 그 근거로 댄다. 그때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고 죄이므로 사울을 치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자고 말한다. 부흥강사들은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처럼 기름부음을 받은 목사를 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목사를 치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는 목사들의 욕심은 자신들을 기름부음 받은 특권층으로 생각하는 데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목사들은 자신들과 사울을 동일시함으로써 어느 인간도 목사들을 비난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을 정죄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인간사회에서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누리고자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목사들은 주의 종을 비판하면 벌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 근거를 모세를 비난한 미리암을 하나님이 저주하신 데서 찾는다. 민수기 12장에서 모세가 유대 여인이 아닌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하였기 때문에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자 하나님은 미리암에게 나병의 벌을 내렸다.
설교자들은 중직자든 일반 교인이든 하나님이 세우신 목사를 비난하면 이렇게 벌을 받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민수기 12장에서 모세가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종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들이 감히 자기들을 모세와 동일시하면서 모세와 같은 특별한 존재로 생각한단 말인가? 여기서 그들의 오만이 드러난다.
목사를 비판하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은 특별히 신앙심이 깊은 여신도들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래서 남편이 교회의 개선방안을 언급하거나 목사의 오류를 지적하면, 목사가 알아서 하는 일을 왜 그렇게 참견하느냐고, 왜 목사를 비판하느냐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집사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장로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다그친다. 목사가 하는 일은 다 옳은 것이냐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입을 봉하고 있어야 하느냐고 맞서면, 모두 당신이 다칠까 봐서,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면 남편들은 더 이상 부인과 다툴 수가 없다. 목사들은 이렇게 남편들을 바보로 만들어 놓고 전횡할 수 있게 되었다.
목사들은 교인들의 입을 봉해 놓고, 그들을 바보로 만들어 놓고 그들 위에 제왕처럼 군림한다. 그들이 어떤 비행을 저질러도 교인들이 묵인하는 것은 목사를 비판하면 벌을 받는다는 말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목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벌을 받게 되는, 누구나 그들이 하는 일에 무조건 협조해야 하는 특별한 권위를 지닌 사람들이 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권위는 가톨릭에서 한때 주장했던 교황무오설을 생각나게 한다.
바보들의 외침
만인제사장주의는 민주주의 정신과 상통한다. 성직자들과 전제 군주들이 다스리던 16세기에 모든 사람이, 성직자든 평신도든,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만인제사장주의를 주장한 개혁자들은 선각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들고 나온 때가 1517년이고 성직자들과 귀족들에 대항해서 평민들이 인간 평등을 외치며 혁명을 일으킨 불란서 혁명이 1789년에 시작되었다. 종교개혁이 272년이나 불란서 혁명을 앞질렀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개혁자들의 평등 정신은 시대를 앞서 가는 의식 혁명이었으며 신앙적 혁명이었다. 불란서 혁명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처럼 이 종교 혁명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개혁자들은 사람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전제군주 시대에 살면서 신앙인의 평등을 말했지만, 우리는 만인이 평등하다고 믿는 민주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전제주의 시대의 제왕이나 귀족들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의 국가도 공무원들의 국가도 아니다. 원칙적으로 대통령도 공무원도 국민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만약 그들이 부당한 일을 하거나, 국민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할 권리가 국민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는 지금 박근혜 대통령에게 증세 없이 복지를 늘린다고 하더니 국민을 속인 것 아니냐고 항변하고 있다. 그리고 소통이 부족하고 이 정부가 내세우는 슬로건에 문제가 있으니 시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도 마땅히 국민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 이 정부가 국민의 요구에 역행하여 성공하지 못한다면, 여당이 다음 총선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런데 아직도 이 민주국가 안에 권위주의가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교회다. 우리는 만인이 평등한 대한민국에 살면서 목사의 권위 밑에 웅크리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일반사회와 교회는 다르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개신교는 이미 500년 전에 선포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만인제사장주의의 모토 위에 세워졌다.
이 모토에 역행하고 민주사회의 정신에도 역행하는 목사들의 권위주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중세의 사제들이 교인들을 바보로 만들었듯이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교인들을 바보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이 평등의 시대에 그들은 개신교의 중심 원리가 만인제사장주의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시대착오적이고 개신교의 신앙원리에 역행하는 권위주의에 대해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목사들이 그렇게 권위와 특권을 누리고 싶다면,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신부가 되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가톨릭 신학대학에 입학해서 사제 서품을 받는 길을 택하면 된다. 요즘 가톨릭대학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어서 대학 당국에서 고민하고 있다고 하는데, 입학원서만 내면 쉽게 합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입학원서를 내려면 먼저 부인과 이혼해야 한다.
목사들이 그들의 권위나 특권의식을 스스로 버리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한번 권력을 쥔 사람은, 권력의 맛을 본 사람은 그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가진 사람은 더 가지려 하고, 권력을 잡은 사람은 더 많은 권력을 원하고 더 오랫동안 그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개신교를 개신교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목사들이 입고 있는 권위의 옷을 벗기고 만인제사장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바보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
전제군주의 학정에 시달리던 국민들이 피를 흘리는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 자유와 평등을 쟁취했다. 한때 강대국들에게 정복당했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세아의 식민지들이 그들 자체의 치열한 해방운동을 통해서 혹은 외부의 도움을 받아서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났다. 남자들의 전횡에 시달리던 여자들이 여성해방운동을 벌여서 남자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개혁자들도 사제들의 권위와 전횡에 짓눌린 교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만인제사장주의를 외치며 일어섰다.
이제 한국교회의 교인들도 만인제사장주의를 외친 개혁자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 목사들의 전횡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개신교를 개신교답게 만들기 위해서 일어서야 한다.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벌여야 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민주사회에 사는 우리가, 목사든 평신도든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만인제사장주의를 모토로 내세운 개혁자들의 후예인 우리가 왜 목사들의 권위 앞에 엎드려야 하는가? 왜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그들의 권위주의를 눈감아주어야 하는가? 이제 목소리를 합해서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더 이상 우리를 바보로 만들지 말라고 외쳐야 한다.
==============================
하나님과 소통하라
임종석 | seok9448@daum.net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욕심을 놓는 것
어느 소방서에 신고가 들어왔다.
“우리 아기가 숨을 잘못 쉬어요. 빨리 좀 와 주세요.”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출동해 보니 아기는 보이지 않고 여자가 이미 숨이진 강아지를 안고 울고 있었다.
며칠 후 들어온 또 하나의 신고를 같은 소방관이 받았다.
“우리 강아지가 숨을 잘못 쉬어요. 이러다간 죽을 것 같아요. 빨리 좀 와 주세요.”
겁에 질린 여자의 목소리였다.
“강아지가 아프면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셔야지요.”
소방관의 말에 여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우리 손자가 죽어 간단 말예요. 빨리 좀 와 줘요. 빨리!”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며 한 소방관이 한 말로 의사소통이 잘 안되어 일어난 해프닝이다. 그런데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으면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인간관계를 악화시키거나 크고 작은 집단들의 원활한 활동을 저해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나라나 지자체의 일꾼을 뽑을 때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이 소통이다.
소통만 잘되어도 원활한 대인관계에 지장이 되는 일은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지자체 일도 나랏일도 훨씬 잘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다.
지금 <당당뉴스>를 우려로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한국교회의 퇴락도 알고 보면 제대로 된 소통의 부재가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사들의 일탈행위도, 자성 없는 목소리로 저들만을 규탄하는 손가락질도 많은 부분 소통의 부재로 인해 생긴 현상이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와 소통이 잘못되어서일까. 그야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과 소통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탓이다. 목사들이 범죄에 빠지고, 성도들이 그들 탓만 하면서 자기는 돌아보려 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과의 소통부재로 생긴 불행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소통은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하는 것일까. 방법은 달리 없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분 하나님께 순종하면 된다. 성경이 하라 하는 대로 하면 된다는 말이다. 이는 마치 소금이 짜다는 말처럼 너무도 당연하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기 쉬울 수도 있으나,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성경을 되도록 많이 읽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읽으라는 사람은 많으나 읽고 알게 된 대로 실천하라고 하는 사람이 적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 한국 교회의 단추는 잘못 끼워진 것이다. 성경은 읽어 지식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라 읽고 알아 그대로 실천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이다.
물론 온전히 성경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만 그렇게 살려고 기도하며 노력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노력의 시도조차 하지 않고 교회 문턱을 드나드는 명목상의 크리스천이 많다는 사실이다. 목사들 가운데도, 교인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아니 기도도 하고 노력도 하지만 성경이 가리키는 대로가 아니라 그것을 오해로 왜곡되게 한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오해로 인한 왜곡은 왜 하게 되는 것일까. 단언컨대 욕심 때문이다. 자기의 육신적 이익 때문이다. 교회에서가 됐건 교회 밖에서가 됐건 문제는 거의가 욕심 때문에 생긴다. 육신적 이익을 챙기려다 보니 그리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구복신앙이라고 하는 이단적 요소도 다르지 않다. 목사들이 먹사라고 욕을 먹는 것도, 교회 세습이라고 하는 기상천외할 망발도, 목사가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는 것도, 교인들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헌금을 짜내려는 것도 다 그렇다.
그 같은 욕심을 버릴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을까마는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교회 안에서조차 욕심 없는 사람은 눈을 씻고 보려 해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한국 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다.
누구라 할 것도 없이 필자부터가 욕심을 놓으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빈번히 들으면서도 놓으면 밑으로 떨어져 죽을까 봐 움켜쥐고 놓질 못하고 있다. 놓으면 하나님께서 받쳐 주시고 더 큰 것으로 주시리라는 것을 믿으면서도, 그 믿음이라는 것이 하도 작아 그러는 것이다.
믿음이 다른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욕심을 놓는 것이 아닌가. 육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영혼의 구원을 최상의 가치로 여겨 그 육적인 것들 위에 두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는 영적 부요인가? 육적 풍요인가?
다행히도 필자는 욕심이라는 마물을 놓아 떨쳐 버리려고 노력만은 하고 있다. 그 노력이 너무도 작아 놓지는 못하고 있지만, 조금은, 아주 조금은 비워내고 있다. 목에까지 차오르다 못해 입으로 벌컥벌컥 넘쳐나는 욕심을 목 부분까지만 덜어냈는데도 운신하기가 그렇게 편할 수 없다. 은혜이다. 그것만도 참으로 큰 은혜이다. 계속적으로 덜어내야 하는데 잘되지 않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작디작은 노력만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은혜이다.
욕심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지려 움켜쥐기만 하는 것이고, 그 욕심을 놓는 것의 진수는 가진 것이 적지만 그것으로 나누는 것이다. 좀 더 가진 사람이 누군가를 위하여 돈을 쓰면 ‘있으니까’라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 아니다. 있어서가 아니라 욕심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이 적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누며 사는 사람들 중에 많이 가진 사람들보다 적게 가진 사람들이 많음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필자는 가진 것이 적었을 땐 마음 넉넉했던 사람이 돈이 불어 가진 것이 많아지자 인색해진 사람을 여럿 보았다.
그냥 이웃은 말할 것도 없고 일가친척이나 제 가족을 제외한 피붙이에게까지도 인색하게 굴어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이 교회에서는 무척이나 넉넉한 모습을 보여 신앙이 좋다고 칭찬을 듣는 사람들도 있는데, 하나님과 소통이 잘되지 않아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어떤 기회에 여러 집을 순회하며 청소 등의 일을 하는 어느 가사도우미 한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세상을 뜬 남편이 남긴 재산으로 부유하게 사는 권사님 한 분의 이야기로, 자식들은 결혼하여 나가 살고 혼자서 생활을 하는데, 무엇인가 사는 것을 좋아하여 냉장고는 항상 차고 넘쳐 썩어나고, 옷가지는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데도 나누는 데에는 인색하여 무엇 하나 남에게 주지를 못한다.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움켜쥐기만 하고 놓을 줄을 모르는 여집사님 한 분의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분은 결국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른 뒤 망인의 시누이가 가사 도우미에게 아직 입을만한 옷 하나를 주자 그것을 본 망인의 출가한 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도우미는 민망하여 받아든 것을 얼른 놓고는 밖으로 나왔는데, 나중에 태울 것을 태우며 보니 그 속에 그 옷도 있었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가정교육, 얼마나 엄격한 유산인가.
이는 물론 특별한 경우이지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와 같은 요소가 전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나누며 살려는 노력을 한다고는 하지만 필자에게도 그런 면이 다분히 있음을 안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그러는 것일까. 하나님과의 소통이 잘 안 된 까닭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일까. 자신이 갖는 관심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하나님 중심 운운하지만 실은 자기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영적 부요가 아닌 육적 풍요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절대빈곤은 물론 기를 쓰고 피해야 한다. 일용할 양식도 없어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는다면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이 있어 그것의 소중함을 안다면 물질의 많고 적음은 그리 크게 문제될 것이 못된다. 적으면 좀 작은 집에 살며 작은 차를 타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무엇이 그리 큰 문제가 되겠는가.
열심히 일하여 물질을 모으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중요한 것은 영적 부요요, 마음의 넉넉함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바른 분별력의 산실
필자는 지금 하나님과의 제대로 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없으면,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소통이 없으면 사람의 심성은 거칠어지고 망가진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의 소통을 불통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 말만 앞세우고 다른 사람의 말은 들으려 하려 않는다. 듣는다 해도 듣고 싶은 것만 듣거나 제 마음에 맞게 왜곡하여 들으려 한다. 본질 아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도 없지 않다. 의도적으로 본질을 흐리게 하여 자신의 곤란한 입장을 모면하려고도 한다.
다른 사람의 글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글에 담긴 글쓴이의 의도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런 표현을 왜 한 것인지 같은 것은 애당초 관심밖에 일이고 어느 한 구절만을 붙잡고 늘어지며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정반대로 해석하여 비판의 칼날을 세운다. 심지어는 자신의 견해와 같은 내용의 글도 엉뚱하게 읽어내어 비난의 화살을 날려대는 재주를 발휘하기도 한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잘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되면, 단절까지는 아닐지라도 잘못되면, 내 눈 속의 들보는 티끌보다 작게 보이고, 남의 눈 속의 티끌은 들보보다 크게 보인다. 잘못된 결과는 모두가 네 탓이고, 일이 잘되면 내가 잘해서라 한다. 칭찬이나 덕담은 힘 있는 사람에 대한 비위맞추기 도구이거나 자기편에 속한 사람들에게나 하는 교언(巧言)에 불과하다.
지난번에 네가 한 행동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네가 하는 일은 어느 것이 됐건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이들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너는 왜 싫어하냐며 화를 내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보고는 겸손해라 하면서 자신은 절대자적 위치에서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 끝이 날카로운 송곳을 들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남의 가슴을 찌르기도 하는데, 찔리면 내가 아픈 것처럼 다른 사람도 아프다. 모두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흐트러져 소통이 제대로 안 되기 때문에 온 현상이다.
신앙적인 면이 됐건, 사회적인 면이 됐건, 또는 정치적인 면이 됐건 선의의 비판은 대상의 성장이나 진전을 불러온다. 성경에 판단하지 말라 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하지 말 일이다.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지만 판단하라는 말씀 또한 있다.
비판의 사전적 의미는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며 또한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히는 것’이다. 필자가 말하는 비판은 물론 후자이다. 그런데도 마음에 들지 않거든 ‘비판’ 또는 ‘판단’을 ‘분별’로 치환(置換)한다면 어떻겠는가. 문제가 되는 것은 비판이나 판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자성 없이 한다는 점이다. 자신은 보지 않고 대상만을 보며 하는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어 너와 나 모두를 망가지게 하나, 자성을 곁들인 비판은 좀 더 나은 내일에 향한 동력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도 믿는 우리를 향해 당신과의 관계를 말씀(성경)과 기도를 통해 바르게 회복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소통의 통로를 열므로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이신 당신의 뜻을 바로 알기를 바라시고, 우리의 기도(소원)가 당신의 뜻에 따른 것이 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사람과의 소통은 너와 나 사이의 벽을 허물어 인정 훈훈한 사회를 만든다. 소통, 그것은 움켜쥐고만 있던 것으로 나누게 하고, 네 탓만이 아니라 내 탓 쪽에도 마음을 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