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엡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의 담을 가지고 있는 민족입니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붕괴되었고 동독과 서독을 가르고 있었던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건만 아직도 우리 민족은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지난 해 6월에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곧 통일이 되는 듯 했지만 작금의 현실은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실감하게 합니다.
제가 전에 북한에 갔을 때, 7박8일의 방문일정을 정리하면서 돌아오던 길에 같이 갔던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했습니다. "통일이 가능할 것인가? 언제나 통일이 될 것인가?"
그 때 우리들의 결론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때도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의 분단의 담은 생각보다 높습니다. 그 담은 견고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남북의 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 간의 담도 있고 계층 간의 담도 있으며 요즘에는 세대 간의 담도 많이느낍니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여야 간의 담이 높고, 사회는 사회대로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담이 있으며, 직장에는 직장대로 노사 간의 담이 있습니다.
심지어 가정에도 가족들끼리 보이지 않는 담을 쌓고 사는 가정이 늘고 있습니다.
교회라고 예외겠습니까? 교회도 보면 성도들 간에 보이지 않는 담을 쌓고 사는 성도들이 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 세계의 담이 왜 생겼으며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담을 어떻게 해 주셨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쓸 당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은 담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들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여기 이방인이라는 말, 무할례당이라는 말은 엄청난 담을 느끼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몹시 경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지옥 불의 연료로 삼기 위해서 창조했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이방인 산모가 산고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녀를 도와 주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이방인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유대인이 이방인과 결혼을 하면 그의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그런 이방인과의 교제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을 막아놓은 벽이 있었습니다.
성전 둘레 가장 가까운 데에는 제사장들의 뜰이 있었고, 뜰 동편에 유대인들의 뜰이, 그리고 조금 더 가서 여인들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 세 뜰은 모두 동일한 높이에 있는 뜰이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다섯 계단 내려오면 벽이 하나있고 벽의 다른 한쪽으로 다시 열네 계단을 내려가면 다른 벽이 또 하나가 있는데, 그 넘어가 바로 이방인들의 바깥뜰이었습니다.
높이가 1.5미터 가량의 돌로 쌓은 이 벽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곳곳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이 벽을 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이것이 그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있는 보이는, 또 보이지 않는 담이었습니다.
당시 에베소에서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된 사람들은 이런 유대인을 볼 때, 말할 수 없는 담을 느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이 에베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2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에베소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오는 것인데, 그런 은혜에서는 제외되고 죄와 형벌이 있는 비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밖에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나라'라 함은 유대인들의 편협한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니기에 이런 하나님의 나라에도 제외된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도 외인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 백성과 언약을 맺고 이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이 언약이 있는 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도 이들과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소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이런 불이익을 당하고 차별을 받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의 사람이었고, 약속의 언약이 있었고, 소망의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에베소 사람들이 유대인을 볼 때 느낀 높은 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방인인 에베소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기 13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 전에는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으로 취급받고, 할례 받은 사람들에게 무할례당이라고 칭함을 받으며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던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이제는 멀리 있던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런 차별이 없어지고 그 간격이 메워졌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다는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떻게 우리들의 그 큰 간격을 메웠다는 것입니까?
14절로 18절까지 그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이 우리의 화평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둘로 나뉘었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셨다고 했습니다. 곧 원수 된 것, 이는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기들을 특별하게 취급하고 이방인들을 짐승처럼 생각했던 것은 율법 때문이었는데, 그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시고, 즉 주님께서 그 율법을 완전히 이루셔서 그 차별을 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에 자유케 되어 율법의 차별을 받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진정한 화평이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대인과 이방인, 둘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셔서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해주시고 먼 데 있는 너희 곧 이방인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너희 곧 유대인에게 평안을 전하셔서 성령안에서 함께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여기 19절부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여기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세 가지 접속사가 내용을 가릅니다.
첫째는 "그 때에"라는 접속사입니다.
여기 11절과 12절에 "그때에"라는 접속사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이방인이었고 무할례당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며 언약에도 외인이고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러나"라는 접속사입니다.
13절에서 우리 성경에는 안 보이지만 원문에 보면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 접속사를 시작으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13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 '외인'이라는 말은 외국인이라는 말입니다.
또 '손'이라는 말도 시민권 없이 체류하는 외국인을 가리킵니다.
여러분, 외국인이나 손이 되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에만 살면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외국에 나가보면 실감합니다.
마음대로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비자가 있어야 합니다. 가서도 기한 내에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오면 어떻습니까? 그런 제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 나라가 좋은 것입니다.
저는 외국에 가서 제일 기분 나쁜 것이 입국 수속을 받는 일입니다. 비행장에 내리면서부터 외국인에 대한 대우가 다릅니다. 자기 나라 시민은 별 검사도 없이 따로 빨리 나가게 합니다. 그러나 외국인들(Foreigner)에게는 오fot동안 기다리게 하고 수속도 까다롭습니다. 그런 현상은 외국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외국인의 설움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데, 그들도 이런 차별을 많이 받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우리의 담을 헐어버리시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간격을 메꿔주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외국인이요, 손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차별과 제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후에는, 화평을 이루어주셔서 이제는 하나님과도 화평을 갖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안에도 모든 차별과 간격을 하나님이 친히 제하여 주셔서,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외인이나 거류민이 아닌 당당한 시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민이라는 말, 사도 바울은 로마의 시민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시민이라고 하면 얼마나 자랑스러웠습니까? 얼마나 특권이 있었습니까?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 로마의 시민권이 있어서 복음 전하는 데에도 아주 유리했습니다.
한번은 바울이 붙잡혀 갔을 때, 시민이라고 하니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자신은 돈을 많이 주고 시민이 됐는데, 어떻게 시민이 되었는가 묻자 바울이 날 때부터 시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의 시민과 아닌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런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당당한 시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권속이라는 말은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시민보다 가족이라는 말은 더 의미가 깊은 말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모든 담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 다음 20-22절에 보면 이제 우리가 성전이 되어 간다고 했습니다.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을 모퉁이 돌로 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하나가 되어 이제부터는 주님의 한 성전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성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미완성입니다. 그러나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높은 담이 다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없이 한 성령안에서 지어져 가도록 역사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놀라운 사상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멸시했고, 이방인은 유대인을 원수로 여겼습니다. 이 원수된 것을 물리치지 못해 히틀러는 이 땅에서 유대인들을 다 없애야 평화가 온다고 믿고 대학살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원수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무너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를 흘림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큰 사건 중 하나가 성소의 휘장이 반으로 찢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것이 사라지고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갈 길이 생기고, 우리들 사이에도 화평의 길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와도 화평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이 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얻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평화가 아닙니까?
중세기의 어떤 수도원에 낯선 구도자 한사람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수도원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나가서 물었습니다. "누구를 찾으십니까?" 그러자 낯선 구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그 유명한 <신곡>을 지은 단테였습니다.
"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이것이 어찌 단테 한 사람의 말이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찾기를 원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러나 그런 평화가 그 어디를 가도 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평화를 찾아 이런 저런 일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 만들어 낸 기구가 유엔이 아닙니까? 그러나 유엔도 결국 평화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유엔이 만들어진 이후에 평화를 깨뜨리는 일들이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평화는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화평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화평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 우리들간의 화평도 불가능합니다.
유리 민족의 높은 담을 허는 일도 절대 인위적으로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다녀왔다고 해서, 김정일 위원장이 남한에 방문한다고 해도 평화의 길은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담은 높습니다.
우리 민족의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높은 담, 지역간의 높은 담, 세대간의 높은 담, 정치인과 노사간의 담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 담을 헐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너와 나가 아무 차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이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해나가야 할 사람은 바로 믿는 우리들이 교회를 통해 해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여러 계층의 사람, 여러 지역의 사람이 함께 모이고, 심지어 여러 인종이 같이 모여서 서로의 담을 제거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한 나라의 시민이 되고 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 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화평을 이루어 나가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화평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사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앞에서는 모든 담이 무너집니다.
혹시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스스로 쌓고 있는 담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진정 예수님을 믿었다면 그 담을 헐어버리십시오. 먼저 교회안에 담을 헐어버리고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예수님이 이루신 화평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 때에 사회의 담이 무너지고 남북의 담도 믿는 자들이 앞장서 허물어가야 될 우리의 과제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 세계의 평화를 위해 담을 허무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뤄주신 화평을 생각하고 화평케 하는 피스메이커의 사명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 안의 담을 헐고 주님 안에 한 새사람이 되고, 주님을 거하게 하실 처소로서의 성전이 되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