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작은 자를 섬기는 종교 2002-01-06 18:38:43 read : 2309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1. 5. 6. 마가복음 9:33-42
<도입예화>
와나 메이카는 여자 5학년을 담임하고 있는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는 대심방기간이 되어 메리 수산나의 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화려하지 못한 대문의 벨을 눌렀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부인이 나옵니다. 아이의 어머니임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주일학교에서 수산나를 가르치는 와나 메이카 선생이라고 합니다." 「주일 학교! 수산나를 가르치는 선생!」이 말을 들었을 때에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두 손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힘없이 마당 한 가운데서 풀썩 주저 앉더니 이 어머니는 선생님의 허리 춤을 붙들고 흐느껴 울기 시작합니다. "선생님께서 그토록 사랑해서 찾아온 수산나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두달전 수산나가 교회갔다 오더니 "엄마 나 교회 안갈래. 예쁘지도 않은 나! 말을 더듬어서 요절도 못외우는 나! 엄마가 헌금 안줘서 헌금도 못하는 나! 선생님이 내 이름 모른단 말이야. 나 교회안가!" 달래도 안되고 꾸중을 해도 안되고... 그렇게 주일학교 결석하기가 몇 주. 친구들이 한참 예배를 드리고 있을 주일 아침 10시 스케이트를 어깨에 매고 스케이트장으로 달려가다가 교통사고를 만나 죽었습니다." 이 순간 와나 메이카의 고막을 진동시키고 가슴을 찌르는 외마디 소리는 "그 어린영혼의 피값을 너의 손에서 찾겠다"고 하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예배당 기도실로 달려가 두 주먹으로 시멘트 바닥을 치며 기도할 때 오늘 본문 42절의 말씀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하나님!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이못난 종의 손에서 피값을 거두어 주세요. 내 생애 어린이 영혼들을 섬기며 살아보겠습니다." 이분이 바로 헤리슨 대통령때 체신부 장관을 지내면서도 주일 학교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 백화점의 창시자, 많은 돈을 벌어 어린 영혼들을 위하여 헌신했던 죤 와나 메이카 선생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막 9:42)
이 말씀은 주님의 농담이나 예수님의 과장법이 아닙니다. 한푼도 discount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계시록 22:19에서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의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겠다고 하신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어린이를 기르는 부모들이나 어린이 교회학교에서 수고하는 일선 사역자들에게 어떤 공포심을 끼쳐두어서 하던 일을 중단시키려는 의도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기업인 어린이를 명확히 부각시켜 그들의 참모습을 알게 하며 그들을 가르치는 주의 종들의 봉사가 얼마나 값있고 보람있는 일임을 인식시키고 이 중차대한 사명에 바로 봉사케 하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을 때 하나님이 주실 상급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함이 그 목적입니다.
시편 127편 3절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여기에 우리 눈을 주목시키는 두 단어가 나옵니다. ①기업 ② 상급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기업"이란 말을 좀더 알기 쉬운 말로 번역해 보면 숙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숙제더미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다 보면 자녀들을 올바로 인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숙제를 잘 풀었을 때 오는 상급, 이 부담을 잘 해결했을 때 오는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을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
어린이는 어른의 부속품이나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어린이는 인격과 영혼이 온전한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장난감이 아니요 어른의 흉내를 내야할 작은 어른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의 개성과 자유와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이의 창의성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계획해 놓으신 청사진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오늘 이 시간 교회가 어린이들을 위해 선한 일을 계획하지 아니하면 사탄이 계획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바른 교육을 하지 아니하면 사탄이 대신 가르치려 덤벼들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온갖 더러운 사상과 가치관을 가지고 어린이를 찾아 갑니다. 어린아이에게 "너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온갖 재미있는 것은 세상에 있어. 어릴 때부터 왜 하나님께 매달려 살려하니, 네 멋대로 살아 보려무나" 탕자의 씨를 그 가슴에 뿌립니다.
오늘 한국사회는 교육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교육이 무엇인지 깊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자녀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교육이 무너지는 나라가 또 어디 있더란 말입니까? 교실이 무너지고 학교가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이민 -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가정이 콩가루처럼 흩어져야 되는 일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어린이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교육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기 보다는 분명 그 이상 가는 무엇이 있습니다.
1. John Lock은 심의백지설」을 주장했습니다. 어린이들의 마음은 백지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백지장에 꽃 그림을 그리면 꽃 그림이 됩니다. 도둑놈을 그리면 도둑놈 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면 예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요, 사탄이 먹물을 뿌리면 사탄의 자식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주일학교에 나오는 어린이 가운데 지금도 나를 보면 가장 반갑게 달려나오는 어린아이 하나가 있습니다. 이 아이가 유치원도 가기전 아주 어린 나이입니다. 저희교회에 그 가정이 등록하고 심방을 요청해서 심방을 갔는데 목사가 심방 온다고 그러니까 하도 유난을 떨었던 모양입니다. 벽지를 새로 바른다. 집안 청소를 한다. 야단법석을 하니까 엄마 왜 이래? 목사님 심방 오신다. 그러니까 이 아이 머릿속에는 목사! 예수님! 하나님이 혼돈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밖에 나가 아이들에게 자랑하기를 "하나님 우리 집에 온다"고 자랑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예배 드리기 전에 "밖에 나가 친구들 하고 놀아라" 아이를 내보냈는데 하나님이 오늘 우리 집에 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이들 생각에 하나님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제가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아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자랑스럽게 저를 가르치면서 "이거 하나님이다!" 이 아이가 지금은 제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때의 그 기쁨, 그때 그 경외감을 잊을 수가 없어 지금도 저만큼 제 얼굴이 나타나면 달려나와 인사를 합니다.
아이에게 경외감을 가르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어린이로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 소홀해도 되는 가치관을 가르쳐주면 신앙생활 우습게 아는 아이로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잠언 22:6 에서도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다투고 있을 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고민을 합니다. 우리의 이 어린자녀들이 언제 자라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영접할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이 어느 세월에 자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이들이 언제 자라서 천국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 어린영혼 자체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역으로 어른들이 돌이켜 어떻게 어린아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낮아져 어떻게 어린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겠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에 의하면 세족 목요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이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임금이 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오른편? 왼편?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 이것이 시비거리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오른편이야 당연히 베드로가 앉겠지. 그러고 나면 야고보와 요한 가운데 한 사람 왼편에 앉을 터인데 당사자인 요한과 야고보가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 가운데 누가 앉을까? 그의 어머니는 이런 생각까지 이르게 됩니다. '베드로만 없어지면'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육신적으로 보면 이모였습니다. 그래서 육신적으로 찾아가서 베드로를 제거하고 요한과 야고보를 오른편, 왼편에 앉혀 달라고 청탁까지 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 가슴속에 불평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거 뭐야. 누구는 인삼 뿌리 먹고 누구는 무 뿌리 먹었냐? 제자로서 똑같이 3년동안 따라 다녔는데 우리는 뭐냐?' 아름다운 제자 공동체가 한순간에 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가 하도 다부지게 매달리니까 야고보에게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네가 마실 수 있겠느냐" 마침 예수님 앞에 포도주가 한잔 따라져 있었습니다. 그것 마시라는 얘기인줄 알고 "네. 제가 마시겠습니다" 무슨 얘기인지 한 얘기였지요. 예수님이 마시려고 한 잔은 죽음의 잔이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기다리고 있는 잔은 십자가의 잔이었습니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고 대답을 했지만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최초로 순교자가 야고보가 되었습니다. 가장 처절한 죽음을 맛본 제자가 야고보가 된 것이지요.
이제 걷던 길은 마쳐지고 식사하기 위해 한 집에 들어갑니다. 그 집에 종이 있으면 손님들의 발을 다 씻어 주었을 텐데 종이 없습니다. 종이 없을 때는 동행인 가운데에 누군가 발을 씻겨 주어야 했을 겝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낮에 있었던 시비거리 때문에 저마다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나는 최고는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꼴찌는 아니다' 그래서 아무도 발을 닦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발을 닦겠다고 나서는 제자들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 공동체 가운데 그가 자연히 꼴찌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예수님이 낮아져 오히려 섬겼다. 우리는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나라에는 샌달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먼지도 많습니다. 맨발로 다니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담아 오셨고 허리에 수건을 둘러서 제자들을 섬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고 사복음서를 잘 연구해 보면 제자들이 그냥 더러운 발로 방안에 들어 갔습니다. 이부자리 속에 냄새나는 발로 두 다리 쭉 뻗었습니다. 거기에 식탁이 준비되어졌습니다. 한참 식사하다가 예수님께서 자리에 벌떡 일어나시더니 "내가 좀 있으면 죽을 거야. 너희들 발 내놔. 내가 발 씻어 줄께." 식사하던 자리에서 빵을 먹다가 잔을 마시다가 그대로 놔두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는 "저녁 먹는 중"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에 제자들의 발이 더러워서 방안에 들어가기가 민망해서 낮에 길을 걸어다니다 보니까 발에 냄새가 나서 발을 씻어 주신 것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방에 들어가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냄새나는 모습 그대로 방에 들어갔습니다. 식탁이 준비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목에 밥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돌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조금만 있으면 십자가에 달릴 것을 생각하니 제자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유대인들의 왕이 되어서 우리가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얼마나 멋진 선택인가? 하는 것을 세상 만방사람들에게 보여 주실거야. 내가 오른 편에 앉아야지.' 저마다 자리시샘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빙그레 웃고 있는 제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가롯 유다 입니다. 이번에 예수님이 올라가시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는 사실을 가롯 유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가 팔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 올라가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그뿐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차례대로 잡혀서 죽을 거야. 그런데 나 혼자 살 수 있어.' 주머니 속에 은 삼십냥을 만지작 거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범한 삼십냥이 아닙니다. 그걸 보여주면 가롯 유다의 생명은 제사장으로부터 보장된 "생명권리증"이었습니다.
이쯤되니 예수님께서 빵이 목에 넘어가겠습니까? 만찬을 즐길 수가 있었겠습니까? 포도주가 목에 걸려서 넘어가지가 않는 것입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내가 떠난 다음에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살아갈까? 기독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복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단 말인가? 교회를 섬길 때 어떤 정신을 가지고 세우고 교회를 섬길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예수님께서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발씻는 행위를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은 자명해졌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인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이 땅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의 가치관은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결론입니다.
발씻기는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종이 주인의 발을 닦는 종교가 아니고 주인이 종의 발을 닦는 종교입니다.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닦는 종교입니다. 배운 자가 못배운 자들의 발을 닦는 종교입니다. 가진 자가 못가진 자의 발을 닦는 종교입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의 발을 닦는 종교입니다.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의 발을 닦는 종교입니다.
내 권리가 있습니다. 분명히 나의 위치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내가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고 종이 되어 내려가 발 씻기는 것이 기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수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가 존경하는 청년부 지도 교역자가 방글라데시에 선교사로 파송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전문의 수련을 다 마치고 개업을 하든지 큰 병원에 취직을 할 판입니다. 그런데 그가 존경하고 따르던 목사님께서 방글라데시에 가는 그 자리에서 결단합니다. "목사님 저를 데리고 가십시오. 목사님 청소도 하고 목사님 이불도 개고 그리고 내가 의사이니만큼 거기 가서 조그마한 병원이라도 개원할 수 있다고 하면 그 나라 사람을 진료도 하고 약도 지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 나서는 겁니다. 한국에서 얼마든지 돈 벌 수 있고 잘난 아가씨 만나서 결혼할 수도 있고 그만하면 자기 위치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인데, 부모가 그 하나 의사를 만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했고 부모들이 그 아이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이제 부모들이 부귀영화을 누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방글라데시에 청소하러 가겠다는 겁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발을 닦으러 가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발씻기는 종교이니라. 밀알이 떨어져 죽는 종교이니라.
해방이후에 대한민국 미국 유학생 1호를 기록한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다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진전이 되는데 아침 신문에 고국 대한민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북한 괴뢰군이 쳐들어 왔다는 거예요. 그는 논문을 쓰다말고 지도교수를 찾아갔습니다. "교수님, 제 조국에 지금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박사학위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돌아가겠습니다." "아니, 몇 달이면 학위가 나올텐데. 조금만 더 참지 그래." "학위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저는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달려와 국방부로 들어갔습니다. 자원 입대를 요청했으나 나이가 너무 많아서 군대에서 받아 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터로 뛰어 들어가서 버려진 아이들을 불러 모아 감자를 삶아 먹으며 고아원을 만들었습니다. 선교사들이 버린 시골 고등학교를 얻어 학생들을 불러모아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숭실대학교에서는 이런 분이 한국에 나와 있다는 것을 알고 부총장으로 청빙하지요. 그가 기도하고 마지막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은 내가 숭실대학교 부총장으로 가는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자리에서 고아들과 더불어서 평생 고무신을 신고, 평생 골덴 바지를 입고, 고아들을 돌보는 것, 그리고 시골에 버려진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공부를 가르치는 것 - 이것이 사명이다 생각하고 평생을 아이들과 더불어 보내게 됩니다. 그분은 무주 구천동이 고향이지만 경상남도 거창 - 거창고등학교를 설립한 전영창 교장 선생님입니다.
내가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많이 배웠기 때문에 당당히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땀 흘려서 내가 번 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하여 쓰지 아니하고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음을 아는 사람, 나보다 더 필요한 곳에 그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 이것이 기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루 24시간 나도 잠 자고, 좋은 옷 입고, 맛난 음식 먹고 취미생활 즐기고 얼마든지 나를 위해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안 일 간단히 정리하고 주의 복음을 위해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흔쾌히 시간을 내려 놓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요 발씻는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의 문이 막혀 있을 때에 선교의 문을 여는 결정적인 사건이 선교사에 있습니다. 가는 사람마다 식인종들에게 잡아 먹힙니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선교를 해야 될 때에 미국에서 파송받은 한 선교사가 몸에 맨체스타 권총 두 자루를 차고 아프리카 땅을 밟았습니다. 그 순간 우우우 소리를 지르며 토인들이 나타납니다. 총을 뽑아서 겨누었습니다. 땅! 땅! 순식간에 끝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리 속에 "나는 저 사람들을 살리러 왔는데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다.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는데 복음 대신 총알을 선물할 수는 없다." 총을 떨어 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달려와 선교사를 찔러 죽였고 아마 팔 다리를 뜯어 밥으로 먹었겠지요. 나중에 보니 그 무서운 흉기가 땅에 두 자루나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앞서왔던 백인들은 우리의 형제들을 저걸로 죽이지 않았던가? 내 부모를 죽였던 그 무서운 흉기가 그 손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심코 방아쇠를 당기자 땅! 총알이 나갑니다. 우리를 죽일 수 있는데 저가 죽었구나. 이 사건 하나로 말미암아 아프리카 식인종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문이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내가 죽일 수 있는 자리에서 죽어지는 것,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자리에서 내가 내려가 죽는 것 이것이 발 씻기는 종교 기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주님 절대로 내 발 씻길 수 없습니다. "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수님, 그럼 온몸까지 씻겨 주십시오."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어도 되느니라. 지금은 네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너도 알게 될 거야." 예수님은 발 씻기는 사건을 두고 당신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는 죽음과 밀접하게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희들이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지만 너희들도 초대교회에서 발을 닦게 될 것이다. 너희들도 초대교회를 섬기다가 잡혀서 죽을는지도 모른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는지도 모른다. 아니 죽게 될 것이다. 너희도 알게 될 것이니라. 기독교는 죽는 종교이니라. 피 흘리는 종교이니라. 낮아지는 종교이니라. 발 씻는 종교이니라. 너희도 서로 발을 닦아라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진정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느냐? 하나님 나라 보기를 원하느냐? 진정한 인생의 행복을 원하느냐? 내려가 무릎꿇고 발을 닦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닦았다고 하십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스토 섬에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제일 먼저 예수님이 가롯 유다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도무지 용서가 안되는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사람,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닦는 종교?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는 종교, 이것이 기독교라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워두고 서로 높은 자리에 올라 가겠다 싸움하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아이같이 자기를 낮추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높아지기를 원하느냐 낮아져라. 살기를 원하느냐 죽어라. 남들로부터 존경받기를 원하느냐 무릎꿇어 남의 발을 씻을 수 있어야 되느니라.
이때 예수님의 손에 붙들려 제자들 가운데 섰던 이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안디옥 교회의 감독 - 이그나티우스가 되었고 그는 위대한 사상가요 저술가 위대한 순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낮아지라고 어린아이가 되라고 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그나티우스 어린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죠. 기독교는 발씻는 종교구나.
기독교는 어린이,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 상처난 사람들, 아직 어린 신앙인 형제 자매들, 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 의하여 역사는 펼쳐지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발을 씻을 수 있는 사람들, 사람들의 발을 씻기 위해서 내어놓은 시간, 사람들의 발을 씻고 섬기기 위해서 내어놓은 돈, 이것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펼쳐지게 될 것이다. 기독교는 건설되어지게 될 것이다.
부족한 종이 공군장교 교관으로 근무할 때에 대부분 장교들이 한 자리에 같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늘 방위병 한 사람이 와서 청소도 하고 커피도 타고 심부름도 하고 그랬습니다. 대부분 몇 사람 6개월씩 스쳐가는데, 그 일이 싫어서 억지로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방위병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달랐습니다. 추운 겨울 날 쌓여있는 변들을 도끼로 깝니다. 그리고 기쁨이 그 얼굴에 충만했습니다. 교관실은 언제나 깨끗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제가 교관님들 기쁘게 해 드리면 교관님들이 군대를 열심히 섬길 것이고, 훈련병들을 잘 교육할 것이고, 이것이 애국" 이라는 사상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 교관실에 휴지를 정리하는 것, 교관들을 위해서 커피를 타는 것, 이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가 6개월동안 교관실을 섬기는데 얼마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는지요. 그가 제대할 때 "대형 당신은 진정한 사령관이었소." 그가 제대하는 자리에서 마지막 그를 위해서 함께 해 준 말이었습니다. 그는 방위병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훈련소의 사령관이었습니다. 그의 손을 붙들고 저는 얘기했습니다. "대형 당신은 진정한 사령관이었소!"
기독교는 섬기는 종교입니다. 겸손히 섬기는 곳에 하늘 나라의 평안과 기쁨이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우리가 어린아이를 섬기고 연약한 자를 섬길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맡겨진 자녀들과 우리 목장에 맡겨진 어린 영혼들을 예수의 피로 발을 닦을 수 있어야 됩니다. 복음으로 그들의 발을 닦을 줄 알아야 됩니다.
이 시간에도 주일학교 교사들이 설촌공원 나무그늘 밑에, 길거리에, 교실 구석구석진 자리에 마땅치 않아서 라비 한쪽 귀퉁이에 아이들을 불러모아 지금 말씀을 가르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는 단순한 자리가 아닙니다. 어린 양의 네 다리가 뚝 부러져서 두 눈이 쑥 빠져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자리입니다. 어린 영혼들의 죄가 그 자리에 뒤집어 씌어져서 지옥의 백성들이 천국의 백성으로 바뀌는 자리입니다. 멸망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백성으로 바뀌어지는 너무나도 엄숙하고 신성한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발을 닦는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아이들과 더불어서 동그랗게 둘러서 있는 자리, 저녁 식탁에 아이들과 더불어 둘러 앉아서 아빠가 엄마가 손을 얹고 축복기도하는 그 자리, 여러분이 손들어 축복하는 자리는 여러분의 머리위에, 어린영혼들의 머리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피를 뚝뚝 흘리는 바로 골고다 언덕, 갈보리 언덕, 십자가 밑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그들의 발을 닦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복음으로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그들의 발을 닦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아이들의 발을 닦을 수 있을까요? 칭찬으로 축복으로 아이들의 발을 닦을 줄 알아야 됩니다. 어떻게 아이들에게 행복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우리 부모들이 행복하게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들어 준 그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축복하고 칭찬하고 격려함으로 우리는 그들의 발을 닦을 수가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였던 헨리 나우웬,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사역을 펼치던 분이었고 그는 아름다운 기독교의 사상을 많이 책으로 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했던 분이었습니다. 어느날 자신의 삶은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Arche Daybreak) 공동체에서 정신 박약 장애인들을 섬겼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들었습니다. 아이들이 기도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연구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아무 때나 문을 열고 들어와서 얘기해 주세요. 무릎에 앉아서 선생님의 얼굴을 만지곤 합니다. 그들을 섬기면서 그는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아이들의 치유력>
"나는 오랫동안 내 영혼을 치유함 받기를 원했고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기를 원했다. 나는 이 어린영혼들을 섬기며 내가 치유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인생의 참된 의미와 참된 가치를 배우기 위하여 무수히 책을 뒤졌다. 그러나 나는 책에서 그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고 이들과 더불어 살며 이들과 노는 사이에 나는 진정한 삶의 행복과 가치를 배웠다. 나는 삶을 예찬하고 찬미하며 살기를 원했다. 나는 하루 하루 이들과 살아가며 내 삶을 찬미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내 속에 있는 아이와의 만남>
"아이들을 섬기면서 나는 내 안에 있는 아이들을 만난다. 몸을 가누지 못해서 비틀거리며 뒤뚱뒤뚱 걸어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내 속에 있는 장애 어린이를 나는 만난다. 내 속에 있는 장애 어린이를 섬길 때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나는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아름답게 섬길 수 있게 되었다. 뒤뚱 걸어다니다 넘어져서 무릎이 깨져 피를 흘리고 우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어릴 때 상처받아서 울고 있는 진정한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내 속에 울고 있는 나의 눈물을 닦인 후에야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겉으로 웃는 내 안에 우는 내가 있었고, 건강한 내 안에 병든 나를 만나곤 한다. 모든 것을 잘 하리라고 기대하는 내 안에 무력한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 속에 있는 어린아이를 진정으로 섬기는 법을 배울 때에 나는 예수님의 손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붙들어 줄 수 있고 넘어진 자를 일으켜 줄 수 있고 우는 사람들의 눈에 눈물을 닦아 줄 수 있고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져 줄 수 있고 상처난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분속에 어떤 어린아이가 자리잡고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속에 있는 어린아이를 잘 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에 어떤 자녀를 여러분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까? 때로는 내 맘에 들지 않는 자녀가 있습니까? 그 아이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에 상처가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기대했던 기대가 다 무너져서 인생에 사는 보람과 의미를 잃어 버리신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에게 맡겼느니라. 그를 주님처럼 잘 섬기십시오. 그 앞에 무릎꿇어 그 아이의 발을 닦기 시작하십시오. 그 아이를 높여주고 격려하고 인정하고 칭찬해 보십시오. 그 아이의 얼굴에서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아이를 섬기는 진정한 삶의 보람과 삶의 의미를 깨달아 가게 될 것입니다.
어린아이 책망 가운데 자라면 비난을 배우지요. 적대 가운데 자라면 싸움을 배웁니다. 조롱 가운데 자라면 수줍어 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 격려로 발을 닦으면 자신감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관용으로 발을 닦으면 인내하는 어린이로 장성한 아이로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칭찬으로 그 발을 닦아주면 존경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용서함으로 발을 닦아주면 인생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신앙으로 그 발을 닦으면 그 발로 당당히 천국을 향하여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발 닦는 종교입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1.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더러운 나의 마음이여
<후렴>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 줄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고 서 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2. 내가 먼저 섬겨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높혀주지 못하고 이렇게 고집부리고 있네
그가 먼저 섬겨주길 원했고 그가 먼저 이해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높혀주질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오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여
<후렴>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 줄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고 서 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1996년에 헨리 나우엔이란 인물이 죽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만나본 적이 없지만 많은 사람들을 그의 죽음을 가슴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예수회 사제로서 존경받는 영성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예일, 노틀담,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자신의 삶은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Arche Daybreak) 공동체에서 정신 박약 장애인들을 섬겼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들었습니다. 그곳의 아이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잘 가르치느냐보다 얼마나 자신들을 사랑하는 지로 사람을 평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내 그는 그곳에서 참 평안과 행복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시겠습니다.
아이들의 치유력
아이들은 항상 내게 현재에 살라는 도전을 줍니다. 그들은 내가 그들과 함께 여기에 있기를 원하며, 내가 다른 할 일이나 생각할 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심리 치료를 받은 후에 아이들에게는 놀라운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바블리토, 조니, 마리아가 뛰어나와 나를 맞이하며 내 가방을 들어 주고 나를 내 '다락방'으로 데리고 갈 때마다, 나는 나에게 임하는 그들의 능력에 놀랍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애정을 표현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은 나를 바로 그 순간으로 끌어들이며, 삶을 예찬하게 합니다. 옛날에는 집에 오면 공부하고, 편지 쓰고, 수업 준비를 했지만 이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놀게 됩니다... 이제 나는 아이들과 함께 그들의 기쁨 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그들과 함께 그들의 가난과 아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분명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고통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아이와의 만남
나는 내가 어린아이임을 압니다. 내가 이룬 모든 업적과 성공의 이면에서 나는 계속해서 안전을 갈망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입니다. 나는 또한 내 속의 아이에게 다가가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그분에게 속한 모든 이에게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내 속의 아이와 만날 때마다 나의 무력함과 만나며,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버려질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나로 하여금 내 속의 아이를 잘 키우도록 하시기 위해 십자가 밑에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쓰러지신 내 마음 속의 자리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곳이며, 높이 들어올려지고 확신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절실한 곳입니다. 세상의 버려진 아이들이 내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 속에서 그들과 대면하고 그들과 더불어 고투하라고 내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내가 모든 거부감과 버려졌다는 느낌 너머에 사랑이 있음을 발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 지속되는 사랑으로 육체가 되셨으며 자녀들을 결코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힘으로 바꾸라는 유혹 :
힘에 대한 유혹이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사랑이라는 어려운 과제에 대한 손쉬운 대체물을 힘이 제공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되는 것이 더 쉽고, 사람들을 사랑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나늘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지만, 우리는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힘으로 바꾸라는 유혹을 받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십자가까지 이 유혹을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받는 삶을 사셨습니다. 교회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역사는 사랑 대신에 힘을 행사하려는, 십자가 대신에 지배하려는, 인도받기 보다는 인도하려는 유혹을 받아 온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이 유혹을 끝까지 이겨내어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보다 힘을 소유하는 것이 더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힘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진정한 사랑에서 나오는 겸손한 섬김이 우리에게 그분의 나라를 경험케 합니다.
힘을 소유하려고 하기 보다 사랑을 소유하십시오.
남을 누르려고 하기 보다 남을 받혀 주십시오.
세상의 큰 자를 향해 가기 보다 내 안의 작은 자에게로 돌이키십시오.
우리는 주님을 소유함으로 가장 큰 자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