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헌금’ 시대 이미 시작 사라지는 ‘헌금 주머니 / 전명구 감독회장 다시 직무정지 악순환, 왜 반복되나 2019-07-27 09:01:21 read : 3337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현금 없는 헌금’ 시대 이미 시작
서울 광진구의 한 교회 예배당 앞에 놓인 카드 결제 단말기 모습.
어색하지만 좋다
기술과 금융이 결합한 ‘핀테크’ 시대가 도래하면서 한국에도 신용카드 결제 등 현금 없는 헌금을 시도하는 교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두고 달라진 시대에 교회도 변해야 한다는 의견과 헌금을 가볍게 여길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엇갈리고 있다.
‘저희는 현금을 사용하지 않는 매장입니다.’
일부 카페에 붙어있는 이 문구를 어쩌면 교회에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정보통신기술(ICT)이 발전하면서 현금 없이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핀테크 시대가 됐고 교회도 이에 맞춰 변화를 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핀테크란 금융(Finance)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다. 인터넷·모바일 공간에서 결제·송금·이체, 크라우드 펀딩, 디지털 화폐 등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을 말한다.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김미정(가명)씨는 서울 광진구 A교회를 찾았다. 이 교회 신자인 김씨는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 놓인 책상 앞으로 다가가 목에 걸린 카드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휴대용 신용카드 단말기 3대 중 한 대에 자신의 카드를 꽂았다.
사용이 익숙지 않은 듯 김씨는 한동안 단말기를 만지작거렸다. 카드가 읽히고 버튼을 눌러 금액을 찍고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단말기에서 두 장의 영수증이 나오자 김씨는 “됐다” 하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이어 영수증 중 한 장은 가방에 챙겨 넣었고, 카드사 회수용 영수증엔 자신의 이름 ‘김미정’을 적어 예배당 입구 나무함에 넣었다. ‘헌금함’이었다.
서울 강남구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이수경(가명)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스마트폰 화면과 주보를 번갈아 봤다. 스마트폰 속 모바일뱅킹 애플리케이션(앱)을 열어 주보에 적힌 계좌번호를 누르고 ‘OTP’ 카드의 번호까지 입력했다. 잠시 후 계좌이체 완료 화면이 떴다. 십일조였다.
최근 한국교회에서 헌금을 신용카드나 모바일뱅킹으로도 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 처음엔 거부감을 드러내던 신자들도 만족감을 나타내고 있다. 김씨는 “처음엔 신용카드 결제 기계가 비치됐을 때는 ‘뭐지’ 싶었다”며 “그런데 현금을 쓰지 않아 지갑을 갖고 다니지 않다 보니 주일이면 헌금 때문에 당황하는 경우가 있었다. 카드 결제 시스템을 적용한 뒤 이런 문제가 해결됐다”고 말했다.
온·오프라인 결제 시스템을 도입한 영국의 성공회 신부가 카드 단말기를 들고 있다. 게티
올 초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과부가 성전 헌금으로 내놓은 동전 두 닢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소위 ‘삥땅’ 헌금 사건 등을 나열하며 헌금의 역사를 소개했다.
이어 텔레그래프는 구약의 헌물이 신약에 와서 헌금으로 바뀐 것처럼 지금은 또 다른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전했다. 예배 시간 교회 안에 돌려지던 헌금 주머니나 접시·헌금함과 다양한 종류의 헌금봉투에서 최근엔 ‘현금 없는 헌금’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금 없는 헌금을 가장 먼저 실현한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현금 없는 사회를 표방한 스웨덴이다.
2015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카드결제 기계(Kollektomat) 앞에서 십일조 등 헌금을 내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필라델피아교회를 소개했다. 신자들은 카드결제 기계뿐만 아니라 모바일 지불 시스템(Swish) 앱으로 십일조를 내기도 한다. 이 교회는 카드결제와 모바일뱅킹 방식을 도입한 뒤 현금으로 십일조를 내는 비율이 15%로 줄었다.
영국 국교회(성공회)도 최근 온·오프라인 겸용 시스템인 카드 단말지급기인 ‘탭앤고(tap-and-go)’를 전국 1만6000개 교회에 선보였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성공회는 이 시스템을 결혼식 비용, 예배 후 커피값을 지불하는 데 적용한 뒤 주일예배 중 헌금에도 사용하기로 했다.
거부감 해소는 과제
신용카드 결제 등으로 헌금드리는 방식을 두고 의견은 엇갈린다. 일단 새로운 기술에 익숙지 않은 고령의 신자들은 소외될 수 있고 사이버 보안 위협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헌금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것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교회 목사는 “헌금을 낼 때 신자들은 경건한 마음을 담는다”면서 “신용카드는 일종의 ‘빚’이라는 점에서 헌금과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앞서 소개한 한국의 교회들도 비난 여론을 의식한 듯 교회 이름을 밝히지 말아 줄 것을 요청했다.
반면 교회도 달라진 세상을 수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4차 산업혁명과 교회’를 주제로 논문을 쓴 임우성 서울 압구정예수교회 목사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회도 다변화되고 있다”며 “교회가 이를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임 목사는 또 “(헌금에 대한) 진리는 변해선 안 된다”면서도 “스마트폰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젊은 성도들에겐 오히려 모바일뱅킹이나 신용카드 결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전하는 또 다른 방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액수가 드러나는 현금에 비해 카드나 모바일뱅킹은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긍정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영국 성공회의 존 프레스턴 목사는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젊은 층은 더 이상 현금을 갖고 다니지 않는 만큼 카드결제 시스템은 모든 연령층이 자유롭게 봉헌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교회법을 연구하는 법학자들은 헌금을 둘러싼 법적 분쟁을 방지하려면 제대로 된 교회정관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국민일보DB
A교회 교인 B씨는 교회 이전을 위한 대지 구입을 위해 헌금을 약정했다. 그러나 B씨는 담임목사의 일부 행위에 문제가 있다며 약정한 헌금을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교회는 B씨에게 헌금을 내라며 요구했고 B씨는 이를 이행할 의무가 없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교회법학회는 교회와 교인 간 헌금을 둘러싼 분쟁이 예상보다 많다고 23일 밝혔다. 전문가들은 헌금을 둘러싼 법적 분쟁을 벌이지 않으려면 교회가 제대로 된 정관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일부 교회는 교회 건축 등으로 자금이 필요할 경우 장로 권사 집사 등 교회 중직을 맡은 교인들에게 일정액을 할당하거나 예배 광고시간 등에 얼마를 헌금했는지 공개하곤 한다. 이처럼 헌금이 비자발적으로 사실상 강제된 경우 헌금약정의 이행을 둘러싼 분쟁으로 이어지는 일이 종종 있다.
설교나 예배에서 감동을 받고 거액의 헌금을 약정한 뒤 시간이 흘러 이를 이행하지 않아 분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헌금이 유용됐다며 교인들이 약정을 이행하지 않는 상황도 있다.
약정헌금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하면 헌금의 성격 등을 두고 교회법은 물론 사회법에서도 해석이 엇갈린다. A교회 B씨의 헌금약정에 대해서도 자연채무인지, 증여계약의 개념으로 보는 법률상 채무인지를 두고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민법에서 자연채무는 채무자가 임의로 이행하면 받을 수 있지만 이행하지 않더라도 그 이행을 강제할 수 없는 채무라 정의한다. B씨가 약정을 이행하면 A교회가 헌금을 받을 수는 있지만 B씨가 이행하지 않더라도 A교회가 B씨에게 약속된 헌금을 강제할 수 없다는 의미다.
반면 증여계약은 증여자가 아무런 대가 없이 재산을 상대방(수증자)에게 주겠다는 의사표시를 하고 상대방이 이를 승낙할 때 성립하는 계약이다. 학교나 사회봉사단체에 대한 기부약정이나 교회에 대한 신도들의 헌금약정 등 특별헌금이 대표적이다.
A교회 사건 1심에서 법원은 교회헌금을 일반헌금과 특별헌금으로 구분했다. 일반헌금은 자연채무로 봤지만 약정헌금은 계약상 채무로 소송에 의해 강제이행을 청구할 수 있는 특별헌금으로 봤다. B씨는 약정한 대로 헌금을 드려야 한다는 게 1심의 판단이었다.그러나 항소심에선 B씨의 약정헌금을 자연채무라고 판결했다. B씨가 이행하지 않아도 A교회가 소송과 강제집행 등으로 이행을 강제할 수 없다고 했다.
교회법학회는 “법원이 헌금을 자연채무로 본 근거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은 만큼 논란의 여지를 남겨뒀다”며 “교회가 매뉴얼에 따라 제대로 된 정관을 만들어 헌금의 성격을 분명히 한다면 소송 등 법적 분쟁을 벌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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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전명구 감독회장 다시 직무정지
기독교대한감리회 전명구 감독회장이 법원으로부터 직무정지 결정을 받았습니다.
전명구 감독회장 임기 중 두 번째 직무정지 결정이 나오면서 감리교단은 또 다시 교단장 공석사태를 맞게 됐습니다. 최경배 기자가 전합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전명구 감독회장의 직무가 또 다시 정지됐습니다.
서울고등법원 제40민사부는 이해연 목사가 전명구 감독회장을 상대로 제기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항소심에서 전명구 감독회장의 직무정지를 결정했습니다.
전명구 감독회장 직무정지 가처분 소송을 다룬 1심 재판부는 지난해 4월 직무정지 결정을 내렸지만, 전 감독회장이 이의신청을 제기하자 6개월 뒤인 지난해 10월 직무정지 취소 결정을 내린바 있습니다.
이번 결정은 전명구 감독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이해연 목사가 가처분 소송 1심 결정에 대해 다시 이의신청을 제기해 나온 결괍니다.
전명구 감독회장의 직무정지 결정은 감독회장 선거무효 소송과 연관돼 있습니다.
지난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46부는 제32회 감독회장 선거가 무효이며, 전명구 감독회장의 지위는 부존재함을 확인한다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직무정지 가처분을 결정한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는 감독회장 선거 무효 판결을 거론하면서 선거무효 판결이 확정될 경우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크다는 점을 주목했습니다.
법원은 결정문에서 선거무효 판결이 확정되면 전명구 목사가 감독회장으로서 수행한
직무의 효력에 대하여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커보인다면서, 전명구 감독회장의 직무집행을 정지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전명구 감독회장의 직무가 정지됨에 따라 감리교단은 교단법에 따라 감독회장 직무대행 선출 절차에 들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감독회장직을 4년 전임제로 바꾼 이후 각종 소송으로 감독회장 직무정지가 10년째 반복되고 있는 현실에서 제도 개선을 위한 심도있는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CBS뉴스 최경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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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의 악순환, 왜 반복되나
기독교대한감리회 전명구 감독회장이 법원으로부터 직무정지 결정을 받았습니다.
지난 2016년 감독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두번째 입니다.
전명구 감독회장은 지난해 4월 직무정지가처분신청이 인용되면서 6개월동안 직무가 정지됐습니다.
지난해 10월에는 법원이 전 감독회장이 낸 이의신청을 받아들여 복귀했습니다.
직무정지가처분신청이 최근 다시 인용돼 전 감독회장의 직무가 두번째로 정지됐습니다.
전 감독의 직무정지로 감리교가 다시 혼란에 빠질 것으로 우려됩니다.
감리교단은 교단법에 따라 직무대행 선출절차에 들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전명구 감독회장 측에서 다시 이의신청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법정다툼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어느 절차하나 빠른 기간에 무난하게 해결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전 감독회장 재임기간 4년 동안 뿐만아니라 지난 10년동안 감리교내의 다툼과 혼란은 계속됐습니다.
감리교의 악순환은 왜 반복될까?
가장 설득력있는 이유는 감독회장에게 권력이 집중됐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습니다.
한국의 주요교단 총회장의 임기가 대부분 1년인데 비해 감리교 감독회장은 4년 입니다.
결정문을 보면 감독회장의 권한이 막강함을 알수 있습니다.
감독회장은 감리회유지재단과 태화복지재단, 감리회 사회복지재단, 교역자은급재단, 애향숙, 기독교타임즈 등 감리회가 설립한 모든 법인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추정은 아니지만 이 모든 재단의 인사권과 재정을 합하면 엄청난 권력을 누리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감리교의 재산은 1조원이 넘는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4년동안 누리다 보니 권력에서 멀어진 측의 소외감은 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단의 지도자들이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이익을 위해 다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지만
감리교의 현실은 이익과 이권을 위한 다툼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이권 다툼이 벌어진다면 이익을 공유하거나 나누는 것도 다툼을 줄일수 있는 방법입니다.
감독회장에게 집중된 여러 권한을 분산시키는 것도 방법일수 있습니다.
감리교내에서는 감독회장 임기 4년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오래전부터 나왔습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인식이 공유된다면 그 방법이 어떤 것이든 대안은 마련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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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소셜미디어 피하지 말고 활용하자"
좋은경영연구소 오픈세미나, 소셜미디어 기독교 세계관으로 조망
강진구 교수 "기독교문화 역량 풀어낼 플랫폼 될 수 있어"
김상덕 박사 "뉴미디어 소통의 핵심은 진정성..교회도 가능해"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이용자들 간의 정보와 의견을 소통하는 소셜미디어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소통을 넘어 구독자 수에 따라서는 높은 수익을 내기도 하고 기업의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확산되는 소셜미디어를 교회들은 어떻게 보는 게 좋을까요. 천수연 기잡니다.
대표적인 동영상 플랫폼인 유튜브는 2006년 1조 8천억 원에 구글에 인수됐습니다.
12년이 지난 2018년 유튜브의 기업가치는 당시의 100배 180조 원에 달합니다.
소셜미디어 이용자는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구독자가 많은 이른바 인플루언서들을 이용한 기업마케팅 시장도 2016년 1조 9817억원에서 2년만에 2조 5446억원으로 크게 증가했습니다.
고신대학교 강진구 교수는 이같은 소셜미디어에 대해 인간의 욕구를 최첨단 기술로 충족시키는 도구라면서, 개인주의적이고 재미 추구적이며 자기만족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 교회가 방어적으로만 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강진구 교수 / 고신대학교 국제문화선교학과]
"(기독교문화사역에서) 개인적으로 가진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플랫폼이 없었거든요. 유튜브는 그런 면에서 개개인의 문화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다는 것, (가장 중요한 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만나는 접촉점을 마련하면서 공통된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교류점이 된다는 것.."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김상덕 박사 역시 소셜 미디어의 부정적 효과 속에서 기독교적 가능성을 모색했습니다.
소셜미디어 상에서 수십 수백만의 구독자를 보유한 인플루언서들을 보면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외모 추구적이지만 김상덕 박사는 그 가운데서도 기독교적 인플루언서가 가능하다고 제안했습니다.
[김상덕 박사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뉴미디어 사회 속에서 소통의 핵심은 결국 진정성, 진실한 관계로 사람과 소통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입을 모읍니다.교회도 기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실하면 그들도 우리를 팔로잉 해 줄 것입니다."
이와 함께, 소셜미디어에 대한 교회적 관심도 당부했습니다.
소셜미디어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전문가를 기르고, 소셜미디어 세대들이 매체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미디어 교육에 관심을 기울 것도 제안했습니다. CBS뉴스 천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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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교행위강요 특별신고센터' 왜 설치했나?"
서울시가 사회복지시설 종사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종교 행위 강요 특별신고센터’를 설치한 것을 두고 종교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서울시는 종교계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에서 종교 강요 행위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종사자들의 인권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판단으로 지난달 특별신고센터를 설치했다. 서울시는 7월 말까지 2개월 간 신고기간을 두고 고발된 사안을 조사해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이같은 서울시 방침에 대해 종교계는 종교계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 전체를 인권침해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개신교와 천주교, 불교, 원불교 등 종교계 사회복지 단체들이 모인 한국종교계사회복지협의회는 25일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종교사회복지의 정체성과 사회복지시설에서 종교의 자유’를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열고 서울시가 설치한 ‘종교 행위 강요 특별신고센터’에 대한 유감 입장을 밝혔다.
한국종교계사회복지협의회는 입장문에서 “사회복지시설 직원과 이용자의 종교와 신앙생활은 존중돼야 하며, 강요로 인한 인권침해 사례는 개선돼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밝혔다
. 협의회는 그러나 “영적 돌봄을 통한 전인적 복지 활동을 전개하는 종교법인의 이념과 가치 및 이에 따르는 순기능과 종교의 위상을 존중하지 않고, 사전에 어떠한 협의도 없이 신고센터를 설치했다”면서 “피해사례부터 접수받아 이를 사회문제화 하여 부정적으로 공론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아쉬움을 표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협의회는 또, “종교 법인의 사회복지시설 직원들은 사회복지에 종사하게 된 주요 동기가 종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면서 “자칫 이들의 봉사 정신과 사랑 실천의 열정이 폄훼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국종교계사회복지협의회는 “이번 기회에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서로의 신뢰감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면서 두 가지 제안을 내놨다.
첫번째 제안은 ‘사회복지시설 직원들의 종교와 신앙생활 존중을 위한 가이드 지침’을 만들어 교육함으로써 종교 행위 강요 등 상처를 받는 사회복지시설 직원들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두번째 제안은 사회복지시설 직원들의 심리적 안정과 영적 돌봄, 소진 예방을 위한 마음의 영성 프로그램을 한국종교계사회복지협의회와 함께 개발하고 지원하자는 것이다.
한국종교계사회복지협의회는 “이번 일을 계기로 서울시가 우리나라 사회복지를 견인하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종교계 사회복지법인을 ‘신고의 대상’이 아닌 협력과 발전을 위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관계증진과 지원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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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개척교회 참빛교회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재적 30명중 어린이 20명 목회, 재정 어려워 대출로 버티다 이제 한계
최근 회사로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저를 찾은 게 아니라 당겨 받았습니다. 한 개척교회 목사님이라는데 교회 상황이 어려우니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요즘 어렵지 않은 개척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또 교회를 소개한다고 다 감동하고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뭔가 일을 하시려는데 제가 막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사연을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아래 내용을 정리합니다 .
인천시 남구 학익동 백학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는 참빛교회 이원찬 목사입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으로 2009년 3월 ‘행복한 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척했습니다. 저는 2대 담임으로 2015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참빛교회로 변경했습니다.
이전 후 매주 전도를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교인 4명과 또 새벽예배를 꾸준히 나오시는 성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현재 30명의 재적인원 중 매주 20여명의 어린이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30명의 어린이 중 5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회를 한 번도 다녀본 적 없는 친구들입니다.
우리 교회의 특징은 공동체입니다. 어머니 성도들이 교회학교 아이들을 위해 책을 읽어주시고 만들기 활동을 지원합니다. 매주 열심히 준비해 주시는 어머니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또 늘 지역주민과 아이들에게 교회를 개방합니다. 교회가 학교 정문 바로 앞에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평일 낮에는 백학초등학교 학부모들이 모여서 교제하고 식사를 합니다. 작년 9월에는 보름 동안 교회에서 연습한 지역 아동극이 대회에 나가 대상도 받았습니다.
학부모님들이 처음에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이었으나 지금은 긍정적으로 변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인도하시고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모든 것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런데 급한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교회 구성원이 주로 아이들이다 보니 재정이 없습니다. 제가 A/S 기사로 취직해 교회를 섬깁니다. 월세와 교회 유지비, 차량 할부금, 매주 30여명의 식사 준비와 간식 등의 고정비가 들어갑니다. 지난 6년간 카드 대출이나 은행 대출로 버텨왔습니다. 최근에는 더 이상 은행 대출이 불가능합니다. 카드 부채로 압류 경고를 받고 카드회사의 독촉을 받고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 교회를 개척할 때 교회 리모델링비와 전세금을 헌신해주셨던 권사님이 그 금액을 돌려받기 원하신다고 7년 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지셔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막상 이런 일을 한꺼번에 겪게 되니 정말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 저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절절히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낮에 일하고 있지만 밤에도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다면 하고 싶습니다. 버티고 버티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구하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에 보내주신 영혼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부디 관심을 갖고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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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부목사 실수 통해 제게 경고 주셔”
“설교 때문에 상처받는 분 생기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이찬수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가 최근 있었던 부목사 설교 논란과 관련, "제가 한 설교를 통해 문제가 일어났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텐데 부목사의 실수를 통해 저에게 경고를 주신다고 생각하니 감사했다"고 했다.
미국 한인교계 소식을 다루는 '아멘넷'은 이 목사가 현지시간 지난 20일 뉴저지 온누리교회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하며 이 같이 말했다고 전했다.
이에 따르면 이 목사는 "(논란이 된 사건을) 수습하느라 정말 힘들었다"며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쪽 분들이 문제가 되고, 저렇게 이야기하면 저쪽 분들이 문제가 되는 너무 민감한 상황이었다. (부목사를) 면직을 시키라고 교단에서 막 들끓고 일어날 때 온세포가 긴장됐다. 젊은 목사의 인생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전 2시 30분에서 3시 사이에 일어나 하루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5~6시간을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이 목사는 "저를 살린 것이 새벽이다. 그것이 나를 살려주었다"고 했다.
이 목사는 특히 "(부목사의) 설교를 잘 분석하면 친 동성애 설교가 아니라 동성애를 극복하려면 복음으로 잘 살아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인데, 무례하게 동성애 반대운동을 하는 분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해서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며 "어떻게 이 민감한 이슈를 그런식으로 설교했는가 야단을 쳤지만, 제 양심은 아무리 생각해도 면직은 안된다(는 것이었다)"고 했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그러면서 "강력한 메시지일수록 더 겸손해야 되고, 설교 때문에 상처받는 분이 생기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남아있는데 하나님이 예방주사를 주신 것"이라고 했다.
또 보도에 따르면 이 목사는 "(부목사가) 1년간 설교 안하고 본인이 쉰다고 했을 때 수용한 이유는 그가 어쨌든지 반동성애 운동을 하는 분들에게 상처를 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라며 "그렇게 광화문에 나가서 동성애 막으려 애를 쓰는 분에게 꼰대라고 표현한 것은 아주 잘못한 것"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그런데 본인이 누구보다 괴로워하고 아파한다.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이다. 더한 일이라도 하나님 앞에 구하면 용서하는 것이 신앙공동체의 모습"이라고 했다고 이 매체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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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설교, 교인들이 고개 쭉 빼서 듣게 하려면
예수님은 일상 언어를 사용하셨다
설교를 잘 하는 사람들은 글을 잘 쓴다. 교인과 소통을 잘 하는 설교는 일상의 언어를 사용되어졌다. 설교는 소통이 기본이기 때문에 일상의 언어를 사용해서 전달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설교자들은 신학언어를 사용한다.
설교자가 신학의 언어를 사용하면 교인은 설교가 무척 어렵다. 설교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증 만 커진다. 이는 의학, 법학 전공자의 전공 언어를 비전공자는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인 이동규는 그의 책 《한국인의 경영코드》에서 대화하는 방식을 기준으로 사람들의 유형을 4가지 타입으로 나눈다.
우선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기분 나쁘게 하는 유형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뭐 하나 되는 일이 있을 리 없다.
두 번째는 말도 안 되는 것을 기분 좋게 말하는 유형이다. 주로 혈액형이 ‘아부형’인 사람이다.
세 번째는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유형으로, 옳은 이야기를 기분 나쁘게 하는 유형이다. 고학력자나 전문가 그룹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이 유형에 속한다.
마지막 네 번째는 옳은 이야기를 기분 좋게 하는 유형이다.
설교자들은 어디에 속하는가? 세 번째 그룹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전문 신학 용어로 어렵게 이야기하면서, 못 알아듣는다고 핀잔을 주는 유형이다.
자신이 어렵게 설교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설교자는 옳은 이야기를 청중들이 쉽게 들을 수 있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옳은 이야기를 들릴 수 있게 하려면, 예수님의 비유법을 활용해야 한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전문 의학 용어를 처방전에 쓴다. 환자는 그 뜻을 알고 싶지만, 전혀 알 수 없다. 많은 설교가 마치 의사가 의학 용어 쓰듯 신학 용어로 하니,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
성경은 어렵다.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땅의 사람이 하늘의 언어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전공자가 아니면 힘들다. 교인이 성경만으로 짜인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 외에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저도 처음 신학을 공부할 때, 한 학기 이상 교수들의 설명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최소한 1년이 지나고부터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금도 신학 용어는 어렵다. 반면 일상 언어는 쉽게 알아듣는다. 일상 언어는 어려운 것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일상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설교를 잘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신학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한다.
설교할 때, 설교자는 신학 용어를 사용해선 안 된다. 교인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신학 용어가 아닌 일상 언어를 사용하셨다. 이는 교인들이 눈높이를 맞추신 것이다. 청중들은 말씀을 쉽게 알아듣자마자, 더 듣기 위해 따라 다녔다.
설교자가 성경으로 시작하고 성경으로 설명하면, 설교자는 은혜가 넘친다. 반면 교인은 복장이 터진다. 성경은 특히 이스라엘 역사와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도 제대로 모르는데, 이스라엘의 역사와 문화를 사용한 설교를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는가? 만약 그 사람이 초신자라면 눈만 깜박이다 집에 돌아갈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풀어냈다면, 설교자들도 하늘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야 한다.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원재료가 아니라 가공된 제품이어야 한다
설교는 1차 산업 품목이 아니다. 2차 산업 품목 이상이다. 3차 산업처럼 교인의 입장에서 맞춰진 서비스 산업이다.
성경의 언어로 설교하는 것은 1차 산업 품목처럼 가공되지 않은 원재료다. 1차 산업 품목인 쌀을 주식으로 먹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쌀을 가공한 밥으로 만들어 먹는다. 거기다 반찬까지 곁들여 먹는다. 성경을 반찬까지 곁들여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가공한 것이 설교다.
아트설교연구원 수업 중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목사의 목회지에서 옥수수를 재배한다. 그 목사는 옥수수를 수확하는 여름철이 되면 무척 바쁘다. 사랑과 수고를 통해 거둔 옥수수를 따서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원재료인 상태로 팔았을 때는 소득이 그리 높지 않았다. 이에 옆에 있던 목사가 옥수수를 쪄서 진공으로 포장해 판매할 것을 권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옥수수를 농장에서 딴 상태로 팔면 개당 400원을 받는다. 하지만 가공을 거치면 2,000원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럼 당연히 가공해서 파는 것이 효과적이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설교란 원재료인 성경을 그대로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교인이 먹을 수 있도록 가공해 먹여야 한다.
이는 설교는 주해가 아니라 적용에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예수님 당시 이야기를 현재를 살아가는 교인들의 삶과 접목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가공이 필수적이다.
성경 읽기는 원재료인 성경을 그대로 읽어주면 된다. 하지만 설교는 가공해서 교인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법을 사용하신 이유다.
아이가 자라면서 먹는 것이 달라진다. 갓 태어났을 때는 모유나 우유만 먹는다. 4-6개월이 되면 이유식을 먹여야 한다. 분유 먹는 아기는 4개월부터, 모유 먹는 아기는 6개월부터 먹이면 좋다.
돌쯤 되면 밥을 먹인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여전히 모유나 우유를 먹는다면, 건강에 불균형이 생긴다. 10살 짜리 아이가 여전히 모유를 먹는다고 생각해봐라. 이는 끔찍하다.
설교자도 마찬가지다. 설교는 2,000년 전 이야기를 오늘날의 이야기로 교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설교는 시대, 사람, 상황에 맞게 가공이 필수다. 가공되지 않았다면 이는 설교가 아니다. 설교에서 중요한 적용에 주안점을 두기 위해 시대, 사람, 상황에 맞게 가공해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법을 설교에 활용해야 하는 이유
예수님은 비유법을 사용해 설교하셨다. 그렇다면 설교자들도 설교에서 예수님의 비유법을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법을 사용하신 이유는 비유는, 비유가 모르는 세계와 아는 세계를 연결해 주는 다리와 같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즉 영적인 세계와 이 땅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물론, 고전이나 불경 등에서도 비유법을 많이 활용한다. 이유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를 사용하면 하나님의 세계를 땅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 비유법을 사용할 때,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
예수님의 비유법은 최고의 글쓰기 방법이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신학 교육은 예수님의 비유법을 뜻풀이로만 가르친다. 한 가지 더 배워야 한다. 바로 예수님의 비유법을 활용한 글을 써야 한다.
미국 작가인 샘 혼(Sam Horn)은 그녀의 책 <사람들은 왜 그 한 마디에 꽂히는가?>에서 교인들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세 가지 있다고 말한다.
첫째, 비유적인 이야기다. 이는 짧고 간단하면서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 청중이 많을 때 좋은 방법으로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이야기 방법이다.
둘째, 촉매제가 되는 이야기다. 이는 구체적인 이야기로 시사점을 던져 주어 청중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다. 즉 통찰력을 주는 이야기가 된다.
셋째, 재미있는 이야기다. 가장 흔히 이야기라고 하는데, 인물 묘사가 풍부하고 대개 우스운 내용이 많으며, 개인이나 조직의 특성들을 구체적으로 담아낸다. 이 방법은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인상 깊은 장면을 순간적으로 포착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교인들이 만족하는 이야기 중 첫째로 든 것이 ‘예수님의 비유법’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설교자가 청중들이 만족하는 설교를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 가지 모두를 사용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셋 중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한다면, 첫째 방법인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를 택하라고 한다. 이 예수님의 비유법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들려지는 설교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법을 글로 쓸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설교하실 때 비유로 설명하셨다. 이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첫째, 비유로 하신 말씀의 뜻을 해석해야 한다. 둘째, 설교 글을 비유로 사용해야 한다.
신학교는 오직 비유의 한 가지 뜻만을 신학생에게 가르쳐 왔다. 목회자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은 이렇다. 신학 교육은 현장에서는 그리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학교 교수들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설교자들을 가르치다 보면, 설교에서 논증의 중요성을 거의 모른다. 오직 설명으로만 설교를 한다. 설교에 논증이 없다고 하면, 논증이 엄청 많다고 한다. 이는 설교가 글이라는 것을 도외시한, 전형적인 신학 교육의
불일치 때문이다.
설교는 말이라고 해 왔다. 글 없는 말은 결국 설교자의 독백으로 그칠 확률이 크다. 아니, 글을 쓸 줄 모르기에 말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글 없는 말은 정신없는 몸과 같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꺾인 꽃’과 같다. 이는 야고보서 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와 같은 말이다.
저는 많이 봤다. 아니 아주 많이 봤다. 글 없이 말만 하고 있던 설교자들의 목회 현장을! 그들의 목회는 피폐했다. 그들은 목회에는 희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글은 ‘타고난다’는 등, 상식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수님의 비유법은 듣는 교인들이 가장 잘 이해 되게 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설교자들은 이 방법을 배워서 설교 글쓰기에 사용해야 한다. 비유법을 설교 글쓰기에 사용하면 교인들은 어려운 성경을 쉬운 설교로 받아들이게 된다.
최고의 방법을 놔둔 채 최악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우리는 어리석은 설교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법을 사용하는 것은 지혜로운 설교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설교자가 되는 방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최고의 설교 방법인 비유법을 주셨는데, 소수만 사용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설교자들은 대부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이 비유법을, 세상의 글쟁이들은 대부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법, 당신의 설교를 설교답게 해 준다. 예수님의 비유법은 해석은 물론, 글쓰기에서도 최고다. 예수님의 비유법으로 글을 쓰면, 당신의 설교를 교인들이 들으려 고개를 쭉 뺄 것이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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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한국 이단들
기독교 복음이 들어온 미국으로 한국 이단들이 활발하게 역진출하고 있다. 미국에서 한국인을 반가워하는 미국인은, 한류에 매료된 이들이거나 한국 교주에 미혹된 이단 신도들일 경우가 많다. 최근 한류를 타고 성공적으로 해외로 진출하고 있는 한국 이단들의 미국 거점은 최대 교민 거주지역인 LA와 뉴욕이다.
최근 이단 특강을 위해 미국 뉴욕과 뉴저지 한인교회를 방문했다. 강의를 준비하며 뉴욕 지역 이단 동향을 조사했는데 LA와 함께 많은 한인이 거주하고 있는 뉴욕 지역에는 수많은 한국 이단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태평양을 건너며 변형된 소규모 단체들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오히려 국내보다 더 많아 보였다. 그나마 교회의 통제가 이루어지는 한국과 달리, 익명성과 유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민 사회에서 이단 문제는 다양한 변이를 거치며 더욱 복잡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정치 문화의 중심인 뉴욕 지역에는 대표적 미국 이단들의 활동이 활발하다. 미국 대각성 운동의 중심지역인 동북부 지역에서 시작된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모르몬교)가 대표적이다. 현재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교세를 가지고 있는 모르몬교는 미국의 제2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던 19세기 초중반 발흥했다. 발흥 장소는 미국판 ‘동방의 예루살렘’(Burned-over District)이라 불렸던 뉴욕주 북부 지역이었다. 교회 부흥의 시기는 이단 발흥의 때와 일치한다는 교회사의 보편적인 원칙에는 예외가 없다.
둘째, 뉴욕 지역에선 한국 이단의 뿌리인 통일교가 중심이다. 맨해튼에는 통일교의 거점인 뉴요커호텔이 있다. 뉴욕주 북부 허드슨밸리에는 문선명의 저택과 통일교 신학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후계 구도의 불안정성을 노출하며 친족들 사이에 돈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통일교의 미국 내 기반은 여전해 보인다. 이 밖에 박옥수 구원파의 IYF는 매년 뉴욕에서 월드 캠프(World Camp)를 개최해오고 있다. 이번 이단특강이 끝난 뒤 박옥수 구원파는 이를 보도한 언론과 필자를 초청한 교회를 압박하며 자신들은 이단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고 한다.
셋째,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구 안상홍증인회)의 미국 현황은 독보적이다. 하나님의교회의 홍보 동영상과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내 50개 주에 거점을 마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뉴욕만 해도 뉴윈저와 미드타운 등을 비롯한 다수의 대규모 거점들이 있고, 최근에는 뉴욕 퀸즈 지역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것을 필자가 우연히 발견했다.
특히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알바니 롱아일랜드 햄스테드주립공원 등 곳곳에서 환경정화 봉사활동을 진행하며 주류사회 정착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인들에게 집중된 하나님의교회 포교 특성상 한국 교민들은 이러한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미국에서는 하나님의교회 피해자들이 자체 홈페이지(examiningthewmscog.com)를 제작해 반대 활동을 하고 있으며, 관련 법정 소송들이 뉴저지에서 진행되기도 했다. 또한 이탈자들과 피해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문제 제기가 지속되고 있으며, 주요 언론들도 관심을 갖고 보도하고 있다.
넷째,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도 한인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교민사회에 파고들고 있다. 최근 신천지의 소위 인맞음시험 자료에 따르면 신천지는 LA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뉴욕 등지에 거점을 두고 있으며, 뉴욕에는 대구경북지역의 다대오지파가 뉴욕시온교회라는 이름으로 포교를 벌이고 있다. 이미 뉴욕지역 한인교회 여러 곳에서 신천지 포교가 시도된 정황들이 드러났으며, 거짓말(모략)을 무기로 교회를 무너뜨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며칠 전 뉴욕 맨해튼에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해 암흑천지가 됐다. 바로 그 전날 맨해튼에서 철야예배 특강을 한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온갖 한국 이단들의 온상이 돼버린 미국. 이단들로 인해 캄캄한 대규모 ‘영적 정전’이 발생하기 전에 조국 교회의 지원과 이민 교회의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탁지일(부산장신대 교수·현대종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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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가짜(fake) 및 ’엉터리(junk)‘ 역사’ (1)
김택규(전 감신대 객원교수, UMC원로목사)
1.‘교역’을 위해 조선으로 향해 출항했다.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8월9일, 중국의 베이징 관문인 텐진(TianJin)에서 우선 영국의 무역회사인 메도우 회사( Meadows & Co.)와 조선 무역을 위한 계약을 맺고 그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조선에 팔 상품으로는 면직, 유리, 금속그릇 및 망원경, 자명종등 여러 가지 현대식 기구들을 배에 적재하였다,
8월 9일, 텐진항을 떠나 조선과 가까운 산동성, 체푸(Chefoo- 현재, 옌타이(煙臺)항으로 들어왔다. 거기서 선주 프레스톤은 승조원들을 확정시켰다. 한달전 텐진을 떠날때는, 선주 프레스톤, 선장 페이지(Page), 항해사 윌슨(Wilson), 그리고 선교사 토마스 목사(Rev. Robert Jeremain Thomas)를 포함해서 4명의 서양인만 타고 있었는데, 체푸에서 메도우회사 소속인 호가드(Hogarth)라는 영국인 화물관리인을 태워 서양인은 5명이 되었다, 그리고 선원으로 중국인 16명, 말레시아인 3명을 승선시켰다. 그런데 Donald Southerland 책에는 선원중에 2명의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조선과의 첫 교역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제너럴 셔먼호는 1886년 8월 9일, 체푸(Chefoo)항에서 미지의 땅 조선을 향해 출항하였다. 황해바다를 하루 이틀 항해하면서 셔먼호는 먼저 백령도 서단에 잠간 정박하여 조선의 형편을 탐문해 보기도 했다. 거기서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을 배부하며 전도를 하였다.
이어서 초도곶, 석도 등을 거처, 8월 16일경 대동강 하구 남포지역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처음 그들의 목적지는 제물포(인천)로 해서 한성으로 가는것이었다. 그러나 바람과 조류의 영향으로 북쪽으로 밀려가게 되어, 평양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3) 이 설명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셔먼호가 처음부터 평양을 목적지로 삼았다면, 평양쪽과는 방향이 다른, 남쪽에 위치해 있는 백령도로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배는 ‘급수문’을 지나 8월 17일, 항주목 삼전방 송산리(松山里) 앞에 닻을 내렸는데, 거기서 조선군이 처음 ‘셔먼’호를 발견했다. 그런데 오문환의 ‘토마스목사 전’에 중요한 얘기가 하나 들어있다. 낯선 서양배가 소식도 없이 들어온 것을 보고 여기서 한 별장이 병졸과 함께 셔먼호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조선군이 셔먼호를 향해 처음부터 사격을 한 것이다. 그후 그 조선군의 별장은 병졸을 대동하고 접근해 와서 배에 오르지는 않고, 간단한 조사를 했다.
그 지역은 황주 ‘목사’(牧使)-당시 지방관)의 관활 지역이었다. 보고를 받은 황주목사 정대식은 그의 휘하의 두 관리인, 형리(刑吏) 이기로와, 영리(營리(吏) 신몽신을 대동하고, 조사를 위해 셔먼호로 찾아갔다. 이것이 조선의 지방 수장이 셔먼호를 조사한 첫 케이스이다. 그런데 황주목사 일행이 셔먼호에 승선할 때 그들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갑판에 장중한 정복을 착용한 셔먼호의 승무원들이 모두 도열해 서서 엄숙하게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목사’ 일행이 그들앞에 오자, 그중에 한사람이 무어라고 구령을 하니까 ‘차렷’ 자세를 취하며,
그중 소총을 들고 앞쪽에 도열해 있던 몇 승조원들은 총을 앞으로 올리는 자세(현재 우리 군대에서 행하는 ‘경례 !’할 때, 총을 앞으로 올려드는 자세)를 취하는것이었다. 서구의 함선 풍습을 모르는 황주‘목사’ 일행은 그것을 셔먼호측의 자기들을 향한 무력 시위 혹은 ‘위협’으로 보았다. 사실은 셔먼호측이 최초의 조선 관리의 함선 방문에 최대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이후에 셔먼호측은 조선관리가 찾아와도, 그런 ‘예식’을 행하지는 않았다.
셔먼호에 대한 조사를 마친후, 황주 목사 정대식은 조정에 자세하게 ‘문정’(問情-문초 및 조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 내용중에 이런 것이 있다. “저사람들의 배 가까운 곳에 우리배를 정박시켰다. 그러자 그쪽 사람들 수십명이 각기 총칼을 지니고서 뱃머리에 정렬해 선 다음 비로소 우리가 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셔먼호가 ‘귀빈’영접 절차를 한 것을 그렇게 오해한 것이다. 보고내용에는 또 이런 설명이 있다. “그들은 입국목적이 통상이라고 했으나 ’조선은 외국과의 통상을 법으로 금하고 있으니 즉시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셔먼호는 계속 항행하여 평양 지역까지 올라왔다. 거기서 평양 감사가 조사를 하기도 하고, 양측간에 충돌도 있었고, 그러다가 셔먼호는 강 수위가 낮아져 모래톱에 좌초되었다. 9월 5일 드디어 조선군은 화공으로 공격을 단행하여 셔먼호는 침몰되었고, 승조원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 제너럴 셔먼호
2. 미국측의 대응과 조치
제너럴 셔먼호(이하, 셔먼호)의 ‘선적(船籍)’은 미국이다. 어느날 감쪽같이 그 종적이 사라져버린 자국(自國) 함선의 행방에 대하여 미국측은 조사를 시작했다. 미국정부측 관리로서 이 사건에 관하여, 처음 조사해 보고 그 결과를 ‘보고’를 한 사람은 셔먼호가 출항했던 체푸 주재 미국 영사 E. Sanford 였다. 그는 당시 북경주재 미국 공사 벌링게임(Arson Burlingame-전 마사추세츠출신 연방의원)에게, 그가 탐문조사한 보고서를 10월 30일에 제출했다.
그 보고서에서 쌘포드는 먼저 정보의 출처를 밝혔다. 첫 번째는 대동강 입구에서 셔먼호를 안내했던 정크선 선장 우웨타이로부터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조선에 선교사로 나갔던 프랑스인 2명이 산속에 숨어 있다가 탈출하여 그곳에 왔는데 그들을 통해, 셔먼호가 대동강으로 올라가, 평양에서 조선측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으며 승조원 전원이 살해당했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쌘포드 영사의 보고서는 북경주재 공사관을 통해 본국 정부에 전달이 되었다,
미국정부는 또 중국정부에 요청해서 조선정부에 셔먼호 실종에 대한 진상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조선정부가 중국 예부(禮部)에 회답을 한 것이 미국정부에 전달이 되었는데 조선정부는 그 문서에서 대단히 이상한 해명을 했다. “영국배 한척이 들어와 약탈을 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며 나쁜 일들을 저질렀으며 ‘배는 얕은 물에 걸려 침몰했다. 죽은자도 영국인 최난헌, 덴마크인 리비항과 오귀자 등이다.
미국배가 불에 타버렸다거나 미국인 선주와 24인이 붙잡혔다는 얘기는 영국배가 평양부에서 침몰된 것이 와전된 것이다......’. 조선정부가 무언가 ‘외교상 어떤 미스테익을 했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정부는 그것이 결국 중국정부나 조선정부가 셔먼호의 침몰과 승조원 전원의 사망을 공식화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당시 미국 정부 상황은 불안정하고 복잡했었다, 링컨대통령의 암살사건(1865년)이 생겼고, 그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앤드루 존슨은 또 탄핵당하는(1868) 등, 국내 사정이 어수선했으므로, 멀리 극동의 조선이란 작은 나라에서 발생했던 한 민간선박 실종사건에 대하여 신속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사건의 현지 조사가 필요하므로, 우선 1867년 1월, 아시아쪽을 순항하고 있던 군함 와추셋(USS Wachusett)호의 함장 슈펠트(Robert W. Schufeldt)에게 셔면호의 행적에 대해 조사해보라는 지시를 보냈다.
그러나 슈벨트 함장은 조선의 서해안쪽에 입항하여 진상을조사해 보려했으나 조선 관원들의 비협조와 또 심한 궂은 날씨 때문에 별 성과없이 조선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 후 1868년 4월, '쉐난도‘(USS. Shenandoh)함의 John C. Febiger함장이 역시 그 사건을 조사하기위해 사건 발생지역인 대동강하구에 들어왔다. 거기에서 셔먼호의 침몰과 승조원 전원 사망 사실을 조선 정부로부터 확인받고 그것을 본국정부에 보고하였다. 슈펠트 제독은 그후에도 또 부산에 들어와 조선 관리들을 만나 여러가지를 탐문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미국정부는, 비록 민간 상선 1척이지만, 자국의 함선과 국민이, 한 ’미개국‘에 의해 위해를 당한 이 사건을 그냥 덮어둘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서 더 자세한 사건 전말을 조사하고, 또 조선측에 응징도 가하고, 동시에 가능하면 통상조약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은 제너랄 셔먼호 사건이 발생한지 5년이 지난후에야 실제 실행에 옮겨졌다. 이른바 ’신미양요‘였다. 하지만 ’조선원정‘(신미양요)을 통해서도 미국측은 셔먼호 사건에 대한 어떤 결과를 얻지못하고 철수해버렸다. 그래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역사적 ’진실‘은 영원히 대동강 물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3. 제너럴 셔먼호의 선력(船歷))과 운명에 대한 세가지 설
우선 제너럴 셔먼호의 정체와 선력부터 살펴보자. 왜냐면 셔먼호에 대해 해적선이었다느니, 혹은 정체가 불분명한 배라는 주장들이 있기때문이다. 셔먼호는 처음부터 그 운명이 기구한 배였다. 건조된것은 1861년, 스카틀랜드의 글라스고우(Glassgow)에서다. 길이 약 200피트, 넓이 28피트, 187 톤의 화물, 승객 수송용 민간 상선으로 출항했다. 처음 이름은 그냥 ‘Princess Royal’이였다. 미국의 남북전쟁당시 1963년, 이배는 미,남부군쪽과의 거래로 영국에서 제작된 무기, 전쟁물자, 기타 화물을 싣고 Bermuda로 갔다가 ‘봉쇄돌파선(blockade runner)이 되어 Charleston 항으로 항해해 갔다.
하지만 미합중국(북군)쪽 해군에 나포가 되고 말았다. 미해군은 그해 3월에 돈을 지불하고 그 배를 사들여 ‘USS Princess Royal’ 이란 이름의 해군 전투함으로 개조, 5월에 취역시시켰다. 남북전쟁 마지막 2년간 걸프만에서 해상 작전시 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다. 남북전쟁이 끝난후, 1865년, 이 군함은 해군의 감축 계획에 의거 민간에 팔렸다. 그리고 배의 이름은 남북전쟁당시의 장군 이름을 따 General Sherman 으로 개명되었다. 여기까지는 미해군 함정사 자료에도 나오는 공통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그후의 이 함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설들이 있다, 대체로 세가지 서로 다른 서술들이 있다.
(a) 첫째는, 이 ‘글’에 서술된대로다. 남북전쟁 종전후, 1865년, 해군의 함정 감축 계획에 의해 민간 회사에 팔렸고, 그후 극동 아시아로 갔다, 조선에 교역을 위해 갔다가, ‘조선측의 화공에 의해 배는 대동강에 침몰되고 말았다.’ 그후 평양측은 대포, 앵커줄을 배에서 뜯어내 평양 시내에 전시하였다.
(b) 두번째설은, 남북전쟁 종전후, 1865년 공매에서 보스턴의 William F. Weld & Co.에 팔렸고 General Sherman 으로 배이름을 개명한후, 보스턴-뉴욕-뉴올리언스 라인의 승객, 화물 수송선으로 운항되다가 1874년 North Carolina 바다, Cape Fear Light 인근 바다에 사고로 침몰되었다.
(c)세번째는, 남북전쟁 종전후, 1865년 8월에 이 배는 Samuel C. Cook 가 구입하여 중국으로 보냈다. 거기서 남북전쟁 당시에 용장이었던 Henry A. Burgevine 장군과 그의 부하들이 승선, 타이완으로 갔다. Burgevine 장군은 종전후 행운과 모험을 찾아 중국에 가서, 처음에는 중국정부의 ‘용병’이 되었었는데, 불만이 누적되어 당시 타이완의 ‘반군’에 합류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나와 있던 영국 해군이 제너럴 셔먼호를 나포해서 텐진으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서 Burgevine 장군은 죽었다. 그후 이 배는 텐진의 Meadow & Co. 가 일단 인수했는데, 1866년 7월경, 보스턴 상인 W. B. Preston이 이배를 구입하여 무역선이 되었다.
1866년 8월 교역차 조선으로 들어갔다가, 대동강에서 좌초되고, 조선군의 공격으로 승무원은 다 죽고 배는 버려졌다. 그러나 그후 대동강의 수위가 높아졌을 때, 배는 물에 떠오르게 되었다. 배는 불에 일부 탔지만 전복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이배를 제물포에 있는 선박 제조소로 끌고가, 수리, 복원시켰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최초로 현대식 증기기관 엔진의 함선을 잠간 소유했었다.
그러나 미국측은 슈벨트제독 등의 추궁과 항의와 함께, 중국정부를 통해 계속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조선정부는 할수없이 이배를 미국에 돌려보냈다. 배는 1867년 일단 본래 소유주였던 Samuel Cook에게 돌아왔다가 보스턴의 William F. Weld & Co. 가 구입하여, 뉴욕- 뉴올리언즈 간의 수송선으로 운항되었다. 1874년 1월 10일, N. Carolina 앞바다에서 배에 물이 새는 사고로 1874년에 침몰됨으로 파란만장했던 14년의 과히 길지 않은 ‘일생’을 마감했다.
이 설은 Tod & Macgregot Ship List, US. Military Encyclipedia, Vic Socotra: 'Capture the Flag' Retrieved (Nov. 10, 2007) 등 여러 자료들에 수록되어 있다. 특히 ‘기업, 문화 등의 연구가’, Donald G. Southerton이, 2005년에 낸 'Interpid Americans: Bold Koreans- Early Korean Trade, Concessions, and Enterpreneurship', (iUniverse, Inc. 2005), 에 배의 선주에 대한 도표를 제시하며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Don Southerton의 책, 도표에 있는 제너럴셔먼호 소유주는 다음과 같다,(남북전쟁때부터):
1863- 1865: US Navy, 1865-1866: Samuel C. Cook, 1866년 7월경- 9월: W.S. Preston, 1866년 10월-1868년: 대원군, 1868-1874: William F. Weld & Co.
일부 편향적 시각을 가진 ‘글쓰는이’들이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배의 이력에 대해, ‘셔먼호는 미해군의 전신 'USS. Princess Royal'이 아니다. 해적선이었다’ 등의 이상한 설들을 퍼뜨리고 있으나, 그것은 다양한 자료들을 조사 연구하지 않은 ‘가짜(fake)’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