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언덕을 넘어 2002-04-01 14:44:30 read : 3776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행 6: 1- 7 // 2002. 3. 3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간혹 인생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에 쓸데없는 고통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행복한 인생은 문제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생의 잘못된 등식 가운데 하나는 '행복한 인생 = 문제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많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괴롭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늘 문제없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인 줄 알기에 문제가 없기를 소원하고, 문제가 없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 인생 가운데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인생이 계속 행복해질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우리는 게을러지고 나태해지고 쉽게 유혹에 무너져 타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미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늘 맑은 날이 사막을 만들 듯이, 문제없는 인생은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타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그런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그런 가정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참으로 어려울 때는 그 가정이 하나가 되어 연합하여 열심히 일을 합니다. 조금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남편도 노력하고 부인도 노력합니다. 가난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이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없이 기도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응답이 와서 그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제 아무런 문제가 그 가정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남편이 다른 데 눈을 돌리고, 자녀가 비뚤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문제 가운데 휘말려서 고난 속에서 부르짖으며 차라리 그 때가 좋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인물들이 그러한 길을 밟아왔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심각한 죄를 지었을 때가 언제입니까? 그가 고통을 당했을 때가 아니라 아무런 일이 없었을 때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잘 살게 되고 부하게 되고 모든 문제가 없을 때에 심각한 죄악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사사기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에 몸이 약간 약하게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을 합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으니까 조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에 비실비실한 사람이 오래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타고난 사람들은 몸을 함부로 사용합니다. 이유는 그들의 건강에 문제가 너무 없기 때문입니다. 주로 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면 신체가 탁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보다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우리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없는 교회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땅에 문제없는 교회가 있다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제가 그 교회로 옮겨가겠습니다. 하루는 무디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상담을 합니다. "무디 선생님, 문제없는 교회를 저에게 좀 가르쳐 주세요. 제가 세 번이나 교회를 옮겼는데 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무디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제가 문제없는 교회를 알긴 아는데 추천을 못해 주겠다."라고 했어요. "왜 못해 줍니까?" "제가 당신을 그 교회에 소개해 주는 그 날로 그 교회는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여러분, 문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문제없는 가정과 교회도 없습니다. 본문의 예루살렘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기가 막힌 일 아닙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성령이 충만했던 교회요, 날마다 부흥한 교회요, 사랑이 넘쳤던 교회입니다. 얼마나 사랑이 넘쳤는가? 성도 가운데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성도에게 나누어주었어요. 얼마나 부흥되었는가? 한 주일에 3천명이 등록하는 놀라운 교회였어요.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던 그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사도행전은 지적하십니다.
지난번 공부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러했습니다. 위선의 문제가 그 부흥하는 교회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핵심요원이요, 주역이었던 한 부부가 짜고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부부를 하나님이 강대상, 헌금을 바친 그 자리에서 데려가셨습니다. 오늘날 이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누가 그 교회를 나오겠습니까?
또 다른 문제가 예루살렘 교회에 등장합니다. 그 문제는 바로 분열과 원망의 문제였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본문을 보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두 개의 당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패를 나누려고 나누어진 것이 아닌 문화적인 전통 때문에 나누어진 당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고향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다른 나라에 가서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특별한 이름, '디아스프라'라고 불렀습니다.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본국에 사는 유대인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 흩어졌던 사람들은 때로 예루살렘에 들어와 정착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의 고향이니까요.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되는 가운데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고향에서 그대로 살아온 히브리파 유대인들이며, 그들은 히브리말을 썼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유대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 교회에 헬라파 사람들도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이 사람들은 언어가 달랐는데, 헬라 말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히브리 말은 그냥 알아들을 정도지 잘 말하지는 못했어요. 그들의 생각은 로마 사회에 젖어 있었어요. 로마 정치에 완전히 물이 들었던 겁니다. 그들은 굉장히 개혁적이었습니다. 율법을 고수하기보다는 좀더 개혁적인 생각을 가지고 늘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문화가 다른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모였으니어떻게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나라도 얼마나 다릅니까? 이 좁은 땅덩어리를 다녀보면 다 다릅니다. 저도 이번에 설악산, 서울, 경북 예천 등을 두루 여행했는데, 어른들을 뵙고 인사하며 가족들을 만났어요. 그런데 가는 곳마다 음식 맛도 다 틀리고 말씨도 틀리고 사는 습관도 틀립니다. 하물며 외국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과 본국에서 살던 사람들이 모였으니 여기에 얼마나 큰 문제가 있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갈등이 생겼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예로 들면,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당시인 6년 전에는 노년층이 많았어요. 한눈에 봐도 제가 굉장히 어린 사람 축에 속했습니다. 어린 사람이 목회를 하는데 황송하기도 하고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그런데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더 많아졌어요. 이런 상황에서 목회하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고의적이 아니더라도 자연적으로 문화의 충돌이 생기는 겁니다. 제가 목회 하면서 이 문제가 어렵기에 많은 시간을 두고 기도하였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과 상당히 젊은 분들의 뜻이 팽팽하게 맞서 있어요. 예배 순서를 대하는 태도, 예배에 대한 생각도 틀립니다. 모든 것이 틀립니다. 찬송을 하나 해도 그렇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찬송가를 부르면 지루하다고 하여 그들의 취향에 맞춰서 복음성가를 부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른들이 "하나도 모르겠다. 교회가 어디로 가는 건가!"라고 탄식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에도 이런 동일한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문화적 갈등이 결국 큰 문제로 비약하게 되는 겁니다. 그 당시에 구제를 하게 되었는데, 한 달에 한번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쌀로써 조금씩 매일 그들을 도와 주었어요. 일제 시대를 생각해 보세요. 일본의 압제를 받을 때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집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에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매일매일 쌀을 조금씩 나누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현상이 생겼는가 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불평과 원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가만히 보니 고향에 있던 히브리파 과부에게는 쌀이 잘 배급이 되는데, 외국에서 온 헬라파 사람들에게는 쌀 배급이 되지 않는 겁니다. 거기에서 원망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은 무서운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왜 멸망했는지 아십니까? 원망때문에 멸망한 겁니다. 원망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늘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진 사람에게 가서 차라리 불평을 한다면 그 일이 개혁될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직접 얘기하지 않고 저 뒤에서 속삭입니다. 한두 사람이 알고 또 얘기하다보면 모든 인생이, 그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이, 사도들이 행하는 모든 것이 원망스럽게 보이는 겁니다.
저는 그런 것을 경험해 보았어요. 갑자기 어느 한 가지 일이 굉장히 짜증스럽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어느 한 가지가 불만스럽기 시작합니다. 그 불만이 점점 크게 다가오면 나중에는 그것이 내 인생을 삼켜버립니다. 다 싫어집니다. "왜 교회가 이러냐? 성도들은 왜 이러냐?"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작은 원망이 하나 시작됩니다. "왜 이렇게 에어컨 바람이 골고루 안 오냐?" 이 원망부터 시작해서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배시간이 왜 이렇게 지루하지?" "아휴, 박 목사가 휴가 갔다 오더니 설교도 제대로 준비 안 했네! 듣기 싫다!" "국수맛은 또 왜 이렇지?" 원망이 점점 커져 갑니다. 이것은 사탄의 놀라운 계책입니다.
6장의 문제가 작은 문제 같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지금 굉장히 큰 문제에 봉착하였습니다. '원망의 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멸망시켰던 직접적인 원인, 그 원망이 점점 밑에서부터 자라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그들은 몇 가지 원칙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예루살렘 교회가 문제를 대처하는 원칙을 공부함으로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과 가정 속에 숨어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하셔서 주의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러분, 문제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문제가 없는 가정은 없습니다. 문제가 없는 교회도 없습니다. 영안교회도 문제없는 교회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문제는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발생한 문제를 어떠한 태도로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문제가 찾아올 때 과연 어떻게 그 문제의 언덕을 넘을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은 몇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1. 일을 중단하는 것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하지 말라
이것이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입니다. 일을 하면 문제는 필연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들 대부분은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 일을 중단해 버립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즉 도와주는 일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실컷 구제했는데 원망이 생겼어요. 누가 원망을 했느냐 하면 도와준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받은 사람이 원망을합니다. 늘 받는 쪽이 불평이 많습니다. 주는 쪽은 불평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차라리 주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되다! 주면 불평이 없습니다. 그러나 받다보면 늘 거기에 작니 많니 합니다.
자녀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아예 유산을 안 남기면 그 집에 분쟁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산을 조금이라도 남기면 '누가 더 많이 가졌네, 누가 어머니를 더 모셨네.' 하면서 받은 쪽에서 늘 불평입니다. 부모가 불평하는 것 봤습니까?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파 사람들, 구제를 받는 사람들에게 원망이 생겼어요. 그러니 주는 쪽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할까요? 요즘 말로 하면 제 돈을 실컷 주고 욕은 됫박으로 얻어먹은 겁니다. 이렇게 내가 도와 주었더니 불평이 돌아오더라는 겁니다. "내가 도와주었더니 네가 불평을 해? 작으면 작은 대로 받고 많으면 많은 대로 받는 거지, 내가 안 주면 어떡할 거야! 오늘부터 안 도와 줄란다." 이것이 우리의 보통 관습입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불평과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중단해 버리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런 방법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중단하는 것보다 더 쉬운 방법은 없습니다. 교회 봉사를 하다보면 어려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봉사를 그만두는 겁니다. 성가대, 교사, 집사, 구역장, 어느 직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없습니다. 문제가 찾아올 때 가장 쉬운 것은 사표 던지고 떠나가는 겁니다. '집사 안 할란다! 여전도회 그만 할란다!' 이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요, 우리가 보통 쓰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은 갈라서는 겁니다. 형제간, 성도간에도 교제하다 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럴 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서로 교제를 안 하는 겁니다. 형제 관계를 청산해버리고 사는 동안 얼굴을 맞대지 않습니다. 같은 교회 다니면서도 동문과 서문으로 다닙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부딪히지 않고 말을 안 하는 겁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겁니다. 또한 그것은 포기이므로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끊임없이 문제를 통해 우리의 일을 중단하게 만듭니다. 과거 역사를 봐도 얼마나 중요한 하나님의 일들이 작은 문제 때문에 중단되었습니까? 사탄은 이것을 노립니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희생했는데 이것밖에 돌아오지 않는구나!"하고 우리 마음속에 나쁜 생각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중단해라! 그만 두어라!'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 문제 때문에 과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셨던 중요한 일을 중단한 적은 없습니까? 지금은 어떻습니까? 혹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아름다운 관계를 포기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요? 부모와 자녀관계, 부부관계, 며느리와 시어머니,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그 아름다운 관계를 단절한 채로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문제의 해결에는 수고가 따르고, 고생이 따르고,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포기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수없이 다가오는 문제의 언덕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포기가 아닌 해결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문제로 말미암아 일을 중단하는 일이 여러분 일상사 가운데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 우선 순위를 재정립하라
무슨 일이든지 문제가 생기면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보통 갈등은 본질적인 것 때문에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가정과 교회, 어디서건 문제가 생길 때 본질적인 것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비본질적인 것들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문제 있는 교회, 달라지는 교회, 시끄러운 교회에 가보세요. 전도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성경공부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찬양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이런 것으로 싸우는 교회는 없습니다.
대개의 교회가 왜 싸우고 분쟁에 휘말리게 되는가? 건물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놓고 한쪽에서는 빨간색 페인트를 칠하자, 또 한쪽에서는 하얀색을 칠하자 하면서 처음에 티격태격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감정싸움으로까지 가는 것이지요. 잘 관찰해 보십시오. 예배순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가 구역장을 해야 하는가, 구역은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
전부 비본질적인 것 때문에 갈등이 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질적인 것 때문에 싸우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개 작은 겁니다. "왜 당신은 매일 집에 오면 아는 척도 안하고 신문만 봅니까?" "왜 당신은 말을 안 합니까?" 이런 것은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말을 좀 안 하면 어떻습니까? 남편은 직장에서 말을 많이 하니까 집에 오면 말이 하기 싫은 겁니다. 또 아내는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입을 못썼는데 드디어 상대가 나타났기에 '입 좀 써보자!' 그러는데, 남편이 말을 않는 겁니다. 작은 것 때문에 늘 가정이 파탄되고 단체가 파탄되는 겁니다. 서로 조금만 양보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되는가? 본질로 돌아가야 됩니다.
제가 어느 날 기차를 타고 내려오다가 부산 태생의 그리스도인을 만났어요. 그가 간증을 하는데, 사업에 실패를 했습니다. 매우 괴로워서 태종대 자살바위를 찾아갔답니다. 그런데 그 바위가 얼마나 우악스럽게 크던지 뛰어내리면 너무 아프겠더랍니다. 그래서 감히 자살을 못하고 밑에만 계속 내려다보고 있는데 몇 시간이 지나서 해가 지는 겁니다. 석양이 지는 것을 봅니다. 그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는데 오죽 괴로우면 자살하려고 했겠어요? 그때 하나님이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너는 왜 사니? 돈 때문에 사니? 돈이 네 인생의 목적이니?" 그때 그가 대답합니다. "하나님, 무슨 말씀하십니까? 제가 그래도 믿음은 적으나 그리스도인인데 어떻게 제가 돈을 목적으로 살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음 질문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네가 왜 죽으려고 하니? 지금 돈 때문에 죽으려고 하는 것 아니니?" 깜짝 놀랐습니다. 사업에 휘말려서 그 문제만 보니까 너무나 괴로워서 자살하려고 했는데, 그가 자살바위에 가서 깨달은 것은 인생의 본질을 다시 본 겁니다. 우선 순위를 본 겁니다. "그렇구나! 내가 돈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구나!" 그까짓 사업 망해서 아파트 다 처분하고 사글세방으로 들어가면 어떤가! 하나님이 건강 주시니 감사하고, 살아있는 것 감사하고... 그는 완전히 거듭나서 돌아왔어요. 인생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달라질 수가 없더라는 겁니다. 본질을 깨닫고 나니 "아! 그렇지, 내가 돈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구나!" 이것 하나를 깨달으니까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더라는 겁니다.
우리가 문제 가운데 있고 굉장히 괴로울 때 왜 그런가? 우선 순위와 인생의 본질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해서 괴로울 때가 많다는 겁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열두 사도에게 구제의 문제가 생겼어요. 그런데 그들이 한 일은 우선 순위를 재정립한 것입니다. 구제를 해결하기보다 우선 순위, 하나님이 자기들을 왜 교회에 세우셨는가 하는 우선 순위를 정립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성경은 가르치십니다.
문제 가운데 있습니까? 마음이 굉장히 어려우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우선 순위를 잘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 마음속에 고민과 온갖 폭풍이 가득할 때는 우선 순위가 바뀌어 있을 때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본질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보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을 우선 순위에 놓기보다 저 밑에 있는 다른 어떤 것을 붙잡고씨름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업이 그렇습니다. 결혼이 그렇습니다. 내 평화와 건강이 그렇습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선 순위 1번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우선 순위 1번은 하나님과의 교제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이 회복하고 나면 그 나머지 문제는 자동으로 다 해결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 가운데 있으신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토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여러분 인생의 본질을 다시 정립하십시오. 내가 왜 사는가? 하나님은 왜 나를 구원하셨는가?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기 원하시는 일들이 무엇인가? 과연 돈 몇 푼을 더 버는 일인가? 조금 더 건강을 찾는 일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남겨놓으셨을 때는 당신의 분명한 목적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 목적을 찾으십시오. 그 목적을 회복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 삶 가운데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던 문제의 폭풍이 어느덧 사라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문제의 언덕을 넘을 수 있는가? 포기가 아닌 해결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일을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선 순위를 재정립해야 합니다.
3. 일을 분담하라
제가 목회 하는 동안 대개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빠져서 고민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을 혼자 떠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문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일, 회사일, 교회일, 무슨 일이든지요. 저는 목사님들도 그런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1년 전에 한 목사님을 만났는데 너무 괴로워서 목회를 못하겠다는겁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 진단을 좀 해야겠다고 하며 얘기를 쭉 해보라고 했어요. 그 분은 굉장히 탁월한 분이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특징은 모든 것을 혼자 다 하셨어요. 심방, 설교 등 그 목사님은 모든 것을 혼자 하였습니다. 밑에 부목사님들이 계셨지만 일을 맡기지를 못했어요. 혼자서 새벽기도부터 밤 12시까지 정신 없이 뛰었어요. 급기야 그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이제는 목회를 못하겠습니다." 하면서 제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혼자 하게 되면 굉장히 편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제일 편한 정치를 말하면 '독재'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독재에 익숙하잖아요? 옛날 왕들이 독재를 해왔고,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해왔고... 그래서 조금 민주화를 하려고 하면 문제가 더 많아집니다. 우리는 여기에 익숙하지 않은 겁니다. 독재를 하게 되면 회의가 없습니다. 독재는 혼자 하니까 굉장히 편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의 책임을 혼자 다 안아야 합니다. 짐을 혼자 다 져야 하는 겁니다. 독재가 잘 나갈 때는 너무 쉽게 잘 나가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상의를 하는 단체와 가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자살하는 가장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업이 잘 나갈 때 그 가장은 왕입니다. 그런데 사업이 무너지면 혼자 독재하였기에 그 책임을 혼자 다 져야 합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자살바위를 찾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독재의 단점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들에게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때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일임하라'고 얘기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중요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1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절)
사도행전을 잘 읽어보면 '평신도'라는 말이 없어요. 사실 이 '평신도'라는 말같이 나쁜 말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제자로 불리었어요. 우리가 생각할 때 제자는 특별한 사람인 줄 압니다. 그저 안수 받아야 되고 뽑혀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도행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누구나 다 제자라고 불렀어요.
하나님께서 왜 교회를 만드셨는가? 한두 사람이 일하라고 이 교회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문제가 많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교회에 가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몇몇 사람이 그 교회를 주동하는 겁니다. 이 때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다룰 수가 없습니다. 깨져버립니다. 왜냐하면 모든 원망이 그에게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실 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제자 삼기 원하셨고, 우리 모두를 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삼으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어떤 교회가 훌륭한 교회인가? 모든 신자가 살아서 자기의 은사를 개발하는 교회입니다. 어떤 가정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인가? 가장 혼자서 모든 생계를 책임지는 가정이 아니요, 가족 모두가 힘써야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청소를 시키십시오. 저는 청소를 시키고 구두를 닦게 합니다. 하루는 작은아들이 "아빠, 나 오늘 아빠 구두 닦았어!" 그래요. "응, 그래!"하고 지나갔어요. 그 다음날은 노란 쪽지에 "아빠, 나 구두 닦았어!" 내놓으라는 거지요. 대가를 주든, 안 주든 가정의 일은 다 같이 해야 합니다. 고민도 기쁨도 같이 해야 되고, 역할도 같이 함으로 일을 분담해야 합니다. 남편의 부담을 아내가 져야 되고 부모의 부담을 자식이 져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본문의 사도들을 보십시오. 구제의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은 일곱 사람을 뽑습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자신들이 해오던 일을 그들에게 맡깁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들만이 해오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오늘날로 말하면 평신도들에게 맡겨버린 겁니다. 이 일곱 사람이 누구인가? 뒤에 보면 스데반 집사라고 했으니까 아마 집사가 아니냐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떤 학자는 스데반이 동명이인(同名異人)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흔한 이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본문에서 집사라 하지 않고, 그냥 일곱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일곱 사람을 뽑아서 구제하는 일을 다 맡겨버린 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남에게 일을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보기에는 나보다 후배요, 미숙한 것 같아도 그들에게 일을 맡겨야 합니다. 혼자서 하려고 하는 곳에는 늘 문제가 끊이지 않는 법입니다. 나 혼자 하면 아무래도 비능률적입니다.
그러나 맡겨서 해결하면 능률적이 됩니다. 나 혼자 이일 저일 다 할 수는 없잖아요. 제가 우리 교회에서 1인 1직분을 주창한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처음에 와서 보니 한 사람이 성가대, 교사 다 해요.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1인 1직분을 해야 합니다. 제가 바라기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 한 가지만 했으면 좋겠어요. 성가대는 성가대만 하고, 교사는 교사만 하고, 구역장은 구역장만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최근에 구상한 것 중의 하나가 더 맡겨야 되겠다 입니다. 우리 교인들의 일을 더 분산시켜야 되겠다는 겁니다. 새가족도 5주 성경공부를 끝내고 등록만 하면 분량대로 일을 맡겨야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일을 일임합시다. 여기 있는 집사님들, 일을 성도들에게 일임하십시다.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일을 찾으셔야 됩니다. 어느 단체에 속하건 일을 분담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짐을 지고 계십니까? 한번 맡겨 보십시오.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맡겨 보시고 서로서로 짐을 나누어질때 커 보이는 문제가 나도 모르게 해결될 줄 믿습니다.
4. 서로 양보하라
저는 성경을 읽다가 아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일곱 사람의 이름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다 헬라식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헬라파 사람들이 불평을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쌀을 다 가져가고 왜 우리는 쌀을 잘 안 주느냐'라는 헬라파 사람들의 원망이 생기니까, 사도들이 모여서 일곱 명을 뽑아 쌀 나누는 일을 다 맡겼는데, 히브리 사람에게 맡긴 것이 아니고 헬라파 사람에게 다 맡긴 겁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양보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큰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당파와 원망이 생겼습니다. 불평이 생겼어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는가? 성경은 얘기합니다. 이들이 서로 양보할 줄 알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사도들은 다 히브리파 사람들입니다. 열두 명이 모두 히브리파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구제하는 일에 불평이 생기니까 일곱 명 관할하는 사람을 전원 헬라파에서 뽑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가정에 왜 분쟁이 생깁니까? 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까? 한국 교회에 왜 작은 문제가 점점 더 큰 문제로 번져가고 있습니까? 문제는 우리에게 양보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일을 과감하게 희생해야 합니다. 남에게 양보해야 합니다. 권리를 양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라만 해도 그렇습니다. 경상도 사람이 십 수년을 정치했어요. 그러면 전라도 사람이 한 5년은 정치를 하게 놔두어야지요. 그곳은 실업자가 없다고 합니다. 저는 안 가봐서 잘 모르겠어요. '경상도 사람 여러분, 좀 양보합시다!' 나라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고 설움을 받았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요직을 다 독식한다고 하는데 그래봐야 몇 년 합니까? 양보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서로 원수같이 앞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을 뒤로 끌어당깁니다. 정치가 얼마나 치졸합니까? 정치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걱정되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저런 신문과 방송을 보고 도대체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루살렘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의 문제 해결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너희가 문제 해결을 원하느냐? 네 가정과 네가 속한 단체의 문제가 해결되기 원하느냐? 그렇다면 양보하라! 너를 희생시켜라!"
이들이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니까 7절에 놀라운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첫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능력이 더해졌어요. 두번째로 제자의 수가 많아졌어요. 부흥되어졌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그렇게 율법적이던 제사장들도 이 도에 복종했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남에게 말 못하는 개인적인 문제, 가정의 문제, 그 문제가 어떠한 것이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원리에 따라 오늘 당면한 문제의 언덕을 다같이 넘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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