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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짐을 지십시오
    2002-03-25 16:27:19   read : 2960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갈 6:1-5 // 2002-03-17

    인도의 성자 선다씽의 전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사람이 히말라야 산을 넘어가다 추위에 쓰러진 사람을 길에서 보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내 한 몸도 추스르기 힘든데--"하며 그대로 지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 바로 뒤에서 따르던 선다씽이 지체없이 그를 들쳐업고 산언덕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얼마를 걸었을까요? 산 넘어 내려가다 보니 앞서 쓰러진 사람을 외면하고 떠났던 이가 길모퉁이에 역시 추위에 쓰러져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던 이웃을 들쳐 업고있는 자기는 아직도 땀을 뻘뻘 흘리며 살아있는 스스로를 확인하면서 너무나 소중한 진리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남을 살리는 것이 바로 자기를 살리는 길이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믿음의 길'은 산행과 같습니다. 산행하다보면 너무나 힘겨워하며 쉬어 가는 사람, 때로는 지쳐 넘어져 있는 이웃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서 이렇게 힘들어하고 특히 믿음을 떠나 죄에 빠진 이웃들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장교회의 교제 안에 살다보면 종종 함께 믿음의 길을 걷다가 어느날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버리는 소위 병영 이탈자가 발생합니다.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사도도 갈라디아 교회안에서 이런 형제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주후47년경 소위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중에 남방 갈라디아(지금의 터키지역안에 있는 비시디아,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라,더베등)에서 복음을 전하여 설립한 교회들이었습니다.(이 지역의 작은 목장교회들이 모여 전체적으로 갈라디아교회를 이룸--갈1:2/갈라디아 교회들이라고 복수로 표시됨) 그러나 불과 2-3년이 지나 그가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다시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벌써 이 교회들 안에서 처음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가운데 복음을 떠나 육신의 죄 가운데 빠져있는 형제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갈5:19-21의 말씀은 아마도 이들이 빠져있었던 죄의 리스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을 향한 바울의 처방은 한마디로 "서로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서로 짐을 지는 것입니까?

    1.시험중인 형제의 연약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주변에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졌다면 우리가 제일 먼저 보편적으로 보일수 있는 반응은 무엇일까요? 정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죄는 죄에 빠진 본인에게도, 정죄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1절에서 우리가 이런 형제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온유한 심령'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마음입니다. 감정의 지배를 받아 쉽게 이웃을 향해 분노하는 마음이 아닌 성령을 통해 범죄 할 수밖에 없었던 형제의 연약함을 꿰뚫어보는 마음입니다. 고전2장에서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성령만이 인간의 가장 깊은 것을 통달하신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고전2:11)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범죄속에 있는 이웃을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마디로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형제의 범죄를 합리화해주거나 동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의 연약함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회복을 돕고자 함인 것입니다. 이해는 회복을 위한 도움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참된 이해는 "내가 모르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가 잘 안다고 쉽게 정죄하기 보다 이웃을 연구하십시오. 그러면 그를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좋은 상담자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연구하는 자세로 경청하는 사람입니다. 나쁜 상담자는 다 아는 뻔한 이야기처럼 피상적으로 흘려듣고 상대방에게 서둘러 결론을 들려주는 사람입니다.

    유명한 맥아더 장군이 생도시절 군사과학을 공부하면서 '상대성의 원리'에 대한 구술시험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이론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일단 그 내용을 암기해 두었다고 합니다. 교수 휘벌거박사가 맥아더에게 "자네는 상대성의 원리가 무엇인줄 아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암기한대로 구술하자 그는 다시 맥아더에게 "자네는 그 뜻을 이해하는가?"라고 묻자, 그는 땀을 흘리며 "솔직히, 모르겠습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휘벌거교수는 빙그레 웃으며"되었네, 자네는 좋은 학생이 될 수 있네. 무지를 아는 것이 이해의 시작이라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그에게서 상대성 원리보다 더 소중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수 있는 용기"를 배웠다고 회상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정죄는 사람을 다 안다는 피상적 판단에서 비롯됩니다. 이웃의 짐을 나누어지고자 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그를 이해하는 학생이 되십시오. 시험중에 있는 형제를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2.무엇보다 자신의 경계를 삼아야만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설령 내 이웃의 범죄가 명확한 사실로 드러나도 우리가 그의 실수를 다룰 때 "그것은 나도 범할수 있는 실수"라는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이웃들이 범하는 어떤 죄도 내가 범할 수 있는 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는 '무릇 섰다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 총장을 지낸 유명한 설교가인 척 스윈돌 목사님의 일화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그리스도인은 교통신호부터 철저하게 지켜야한다"고 어느 주일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같은 주일 오후 교회에서 나와 집으로 운전하시다가 깜빡 다른 생각을 하면서 교차로를 건너다 신호를 위반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그것을 깨달은 때 이미 늦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같은 때 교인 한분이 지나다가 스윈돌 목사님이 신호위반을 하신 것을 목격하게 되었고 목사님 자신도 그것을 알아채리고 미안한 맘으로 모른척하고 집으로 가셨는데 그날 저녁 그 교인이 전화를 해서 그 이틑날 점심때에 '만나자'고 하더랍니다. 약속을 했는데 걱정이 많이 되었답니다. '피할길'을 달라고 기도했답니다. 한 아이디어가 생각났습니다. 이틑날 식당에 가보니 예상대로 그 교인과 다른 교인 몇분이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윈돌 목사님은 준비한 목걸이를 차고 들어 갔는데 거기에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부착물이 달려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웃었을까요? 그때 목사님은 다시 뒤로 한바퀴 돌으셨는데 등뒤에도 부착믈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나를 쳐라"고 씌어있더랍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우리자신의 실수의 가능성을 알고 미리 경계를 삼아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웃이 실수할 때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교훈이 될 것이며, 나를 위한 유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4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자신을 살피는 삶을 통해 오히려 자랑할 것이 있는 유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짐을 지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의 짐을 질줄 아는 사람만이 남의 짐도 질줄 아는 인생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3.사랑으로 형제의 회복을 도와야만 합니다.

    본문1절에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고 할 때 이 단어의 뜻을 아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주로 'caught'혹은'overtaken'이라는 단어가 씌어지는데 우리말이나 영어로도 원문의 뜻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지 못합니다. 본래 이 단어의 뜻은 '혼자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궁지에 빠진"이라는 의미입니다. 병 속에 손을 집어넣고 무엇인가를 꺼내려 하다가 손이 빠지지 않는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이제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런 궁지에 빠진 형제나 자매를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복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1절에 '바로 잡으라'는 말은 이런 회복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단어는 두가지 용도에서 씌어집니다. 하나는 우리의 신체의 뼈가 어긋났을 때 뼈를 '바로잡는다'는 용법입니다. 다시 우리의 정상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용례는 어부가 쓰는 그물이 못쓰게 된 것을 '수리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고기잡는 그물로서의 기능이 가능하도록 회복시키는 것이지요. 이런 회복의 사역을 할 때 우리는 또한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할까요? 바울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고 본문 2절에서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모세의 법에는 대표적으로 십계명만 해도 10개의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명은 오직 하나-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할 때 율법은 이루어집니다. 사랑할 때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으로 사랑한다면 형제의 회복을 도와 그가 다시 일어서도록 해야 합니다.

    로마의 유명한 바티칸 대성당 뮤지엄에 가면 미켈란젤로의 걸작품 피에타상이 있습니다. 높이 171cm의 대리석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미켈란젤로가 마리아의 옷자락에다가 서명한 그가 특히 아낀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수년전 이 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철책선을 뛰어넘은 망치를 든 한 청년에 의해 무참하게 훼손된 일이 있었습니다. 박물관은 이 작품을 포기했을까요? 아니지요. 그들은 이 작품을 회복시키기 위한 세계적인 조각가 팀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회복작업에 착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의논한 끝에 우선 몇 달을 깨어진 이 작품을 감상하는 일에 보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통해 미켈란젤로의 눈과 가슴을 갖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들의 눈이 미켈란젤로의 눈이 되어 이 작품에 나타난 마리아의 연민, 고통과 환희를 보고, 그의 가슴이 되어 그 연민을, 그 고통을, 그 환희를 함께 느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이 작품을 거의 완벽하게 재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들 목장교회가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상처나고 깨어진 형제, 자매를 붙들고 목장원들이 함께 그를 빚어 만드신 하나님의 눈과 가슴이 되어 그의 고통과 비참을 함께 느끼며 마침내 그를 도와 그를 회복시키는 작업--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며 우리의 회복의 사역인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십자가의 사역이 아닙니까! 우리의 죄와 고통을 함께 느끼시고 마침내 우리 죄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회복하게 하신 주님의 사랑--이 사랑에 빚진 자가 되었다면 이제는 우리도 서로의 짐을 기쁘게 져야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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