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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리하는 자는?
    2002-05-03 21:35:33   read : 272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계시록 2:12-17



    오늘은 요한계시록 2장 12절에서 17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승리하는 자는?"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17절을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기는 그'에게 온갖 축복을 약속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두고 겨루고 싸우기에 이긴다고 하는 말을 쓰는 것이지 겨루는 일도 없고 싸우는 일도 없다고 한다면 이긴다는 말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김씨와 싸운 것도 아니고, 이씨와 싸운 것도 아니요, 박씨와 싸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철저하게 대적하고 싸운 것은 마귀와 그 세력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겨루어야 하는 것은 혈과 육이 아니라 악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싸워 반드시 이겨야 되는 대상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개인의 마음 속에 충동질을 하므로 역사하는 일도 있고, 이단과 사이비를 통해서 우리들의 믿음을 파괴시키는 역사도 합니다. 우리 교회 근처에 사이비 이단이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정권이 가지고 휘두르는 권세를 통해서 역사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옛날에 로마 정부가 얼마나 기독교를 박해합니까? 히틀러 정권이 얼마나 교회를 잔해합니까? 그런가하면 일본의 도조 정권입니다. 소화천왕이라고 하는 것은 허수아비뿐이고 사실상 도조라고 하는 내각 총리가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고 교회를 향해서 신사참배를 하게 한 것입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정권들을 통해서 교회에 핍박을 가하곤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막스레닌주의가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전부 자기네들의 의도로 된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역사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즉 우리 성도들은 이런 마귀와 대적해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어떤 사람들이 승리하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순교적인 신자가 승리합니다. (12-13)
    마태복음 10장 38절을 보면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때 내게 합당할 뿐이요, 자기 십자가는 지지 않고 나를 좇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는 자가 내게 합당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지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것은 이천년 후의 오늘에는 우리들에게 십자가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알게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쓸 때 혹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너무 잘 압니다. 로마가 주위의 많은 나라를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들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사형을 집행 할 때 어떤 방법으로 사형을 집행했는지 아십니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을 집행 할 때 보통 교수형으로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로마가 식민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로 사형을 집행하는 제도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참혹한 사형제도는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통나무로 만든 무거운 십자가를 감옥에서부터 사형을 집행하는 장소까지 누가 지고 가는지 아십니까?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죄인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 당시 거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저 사람은 죽으러 가는구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신 말씀에는 그런 배경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반드시 죽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고 할 때에는 죽을 각오를 하고 목숨을 내 놓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주께 합당합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따르다가 기분이 내키지 아니 하든가 손해가 되면 도망을 가는 그런 교인들이라면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므로 순교적인 정신, 순교적인 각오와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주님께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2절에서 13절을 보면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목숨을 내 놓고 사는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죽여봐'라고 하면서 목을 내 놓고 달려드는데 누가 당해내겠습니까? 그래서 자살특공대가 무서운 것입니다. 목숨을 내 놓고 폭탄을 지고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내 놓고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지금 읽은 본문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본문은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주님이 사도요한을 통해서 설명을 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버가모 교회 감독 즉 담임목사는 안디바입니다. 그 지역에서 세도부리는 사람들 즉 로마 정권의 앞잡이들에게 마귀가 충동질을 하여 교회를 잔해하고 미워하게 합니다. 그 중에도 그 교회를 이끌어 가는 감독 안디바를 그렇게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안디바를 붙잡아다 놓고 목을 쳐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디바는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순교를 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교인들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 감독을 비롯해서 전부 순교적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즉 순교적인 정신, 순교적인 각오, 순교적인 자세로 목숨을 내 놓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순교적인 성도가 아니면 누가 마귀를 이기고, 불의의 세력을 대항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순교적인 성도가 세상을 이기고 악마를 이긴다는 말입니다.
    Horace mann은 "순교로 죽는 것보다 순교자로 사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을 했습니다. 순교로 목베임을 당하고 한순간에 죽는 순교자보다 순교자적인 자세로 평생을 사는 삶이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지금 읽어 드린 본문에 나오는 버가모 교회 감독 안디바는 죽은 순교자입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인들은 살아남아 있는 산 순교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순교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내 놓고 주님을 따르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회개하는 신자자 승리합니다. (14-16)
    예수님의 길잡이로 와서 예수님을 증거했던 세례요한이 한번은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마 3:8).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겠다고 요한에게 나왔습니다. 그 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너희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려고 하면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즉 회개는 말로 끝내는 것이 아니요, 회개는 마음으로 끝내서도 안 되는 것이며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믿음 생활이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이란 말로 다 믿어 버리는 것입니까? 마음으로 끝내버리는 것입니까? 믿음은 생활 속에 열매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산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네 돈 주머니가 회개하기 전에는 너의 회개를 믿지 못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회개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4절에서 16절을 보면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였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외부적으로 핍박이 가해져 올 때에는 죽일 테면 죽이라 하고 단합을 하였고 목숨을 내 놓고 싸웠습니다. 그 결과 그 어려운 핍박과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안으로 파고드는 이단과 사이비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더라는 것입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의 교훈을 가지고 성도들을 유혹할 때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고 말았습니다.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쓸 때와 발람 선지가 활동할 때는 1,600년의 기간이 있습니다. 1,600년이 지난 요한의 때에 발람이 가르쳤던 교훈을 그대로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도와 목적은 똑 같습니다. 그래서 발람의 교훈이라고 한 것입니다.
    발람의 교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디안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겠습니까? 허락하지 않으셨더니 발람이 돈을 많이 받고 발락 왕에게 한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미디안 신에게 제사 드리는 때에 그들을 미혹하여 제사에 참석케 한 다음에 제물을 먹게 하고 창녀들과 함께 음행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사 끝에 그런 일이 없지만은 그 당시 중동지방에는 제사의 끝에 이르러 거룩한 창녀들과 함께 음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을 기쁘게 한다고 해서 그리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가 우상 숭배였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우자고 하면 대들어 싸워서 이기곤 하였지만 미혹하여 그런 곳에 초청할 적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제사에 참석하여 이방신의 제물을 먹고 거룩한 창녀들과 음행 하는데 가담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진노하사 이스라엘이 크게 혼이 났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발람은 발락을 충동질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서서히 하나님에게서 떠나도록 농간을 부린 것입니다. 이것이 발람의 교훈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쓸 때에 발람의 교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으니 구원은 한 번 받으면 끝나는 문제이기 까닭에 아무렇게 살아도 괜찮다'라고 하면서 도덕을 전혀 무시하고 살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나는 구원을 얻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요, 천국의 백성이다'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즉 믿음에서 도덕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핍박이 가해올 때는 함께 협력하여 싸웠었는데 발람의 교훈에 미혹이 되어 '그렇지 우리가 한번 구원을 얻었으면 끝나는 것이지, 구원을 얻은 다음에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인가?'라고 생각하고 자기들 멋대로 살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 '하나님 나 떠납니다'하고 떠납니까? 그렇게 해서 자기도 모르게 한 발자국, 두 발자국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발람의 교훈입니다.
    그러면 니골라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니골라라고 하는 사람은 본래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으로 패거리를 만들었습니다. 니골라가 패거리를 만들려고 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끼리 끼리자꾸 모이다 보니 패거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니골라의 주장은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다 라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아니라는 겁니다. 그 믿음에 율법을 더해서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 할례부터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을 듣고 보니 많은 교인들은 그렇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냥 믿습니다 라는 것으로 구원을 얻나? 우리도 무엇인가 하는 것이 있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패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패거리가 어느 정도가 커지고 난 후에는 더 커지지 않으니까 여기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겠다 하여 유대교로 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니골라당의 교훈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니골라당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니골라의 교훈을 받은 제자들이 자기 선생이 너무 철저한 율법주의자니까 이제 '우리는 율법에 구애를 받지 않겠다'하여 반율법주의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면 그것을 율법주의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믿는 마음으로 설악산에 가고, 나는 믿는 마음으로 대천해수욕장에 간다. 뭘 그렇게 반드시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되는가? 그것은 율법주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곧 현대판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하나님께 '나는 떠납니다'하면서 떠납니까? 이런 식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니골라당의 교훈은 쾌락주의입니다. 예수 믿고 인생을 즐기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카바레도 가고, 믿음으로 설악산도 가고, 믿음으로 대천해수욕장도 가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현대적이고 지성적인 교인인양 자처하는데 니골라당의 미혹에 빠졌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회개치 않으면 내 입에서 나오는 검을 가지고 너희와 싸워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도 현대판 발람의 교훈을 좇는 자가 있는가 하면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는 자에게는 과거를 묻지 아니하고 깨끗이 용서해 주시므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다시 본래의 믿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악령과 더불어 싸워 승리하게 됩니다.
    루터가 작센 선제후 프레드리히의 도움을 받으면서 산장에서 성경 번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라틴말 성경을 가지고 강단에서 읽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누가 알아 듣겠습니까? 우리 한국 초대 천주교에서도 그랬습니다. 전혀 성경을 모르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하면 안된다 하여 독일말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마귀가 성경을 번역하면 큰일났다 생각하고 루터의 죄목을 써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네가 언제 어디서 이런 죄를 지었는데 네 주제에 무슨 종교개혁을 하고 성경을 번역하느냐?"라고 하면서 비웃었습니다. 그러니까 루터가 잉크병을 들고 던졌습니다. 마귀가 맞았겠습니까? 잉크병이 담벽에 맞아 담벽에는 잉크 자국이 생겼습니다. 마귀가 계속 비웃자 루터가 그 죄목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죄목을 보니까 마귀가 기가 막히게 잘 알고 죄목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것을 본 루터가 붉은 잉크로 그 죄목들 위에 십자가를 써놓고는 "가지고 가. 나는 이미 다 회개하고 용서함 받았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담대하게 성경을 번역하고, 담대하게 종교개혁을 해서 성공하고 승리하였습니다. 루터에게 회개함이 없었다면 마귀가 죄목을 기록해 가지고 왔을 때 주저앉아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위한 회개는 평생 한번이지만 매일 짓는 죄를 회개하고 담대함으로 그 날 그 날의 승리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는 자만이 악령과 더불어 싸워이깁니다.

    셋째, 말씀을 청종하는 신자가 승리합니다. (17-)
    말씀에 대해서 신학에서는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로고스 인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이 바로 로고스요, 예수님입니다. 둘째는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을 선포하고 있지 않습니까? 셋째로는 기록된 말씀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성경입니다. 하나의 책으로 되어진 성경이 무엇입니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쓴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쓴 것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을 보면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성경은 성령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쓴 다음 우리들에게 말해 준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이기 까닭에 성령의 감동 없이 우리가 성경을 읽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뜨거워짐이 없고, 깨달음이 없고, 순종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7절을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이 사도요한을 감동시켜서 주시는 말씀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냈는데 성령이 감동하사 써서 보내는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들으라 하는 데는 들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순종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말씀 청종을 의미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순종치 않으면 절대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말씀 충만은 순종을 전제로 합니다.
    읽지 않는 성경을 산다고 구원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가족 수대로 전부 사다 놓았지만 읽지 않는 그 성경이 나를 구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순종치 않는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성경이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기는 열심히 읽는데 절대로 그 말씀을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교회 구역장 권찰님들이 하루에 성경 4장을 읽고 노트 해 내라고 하니까 그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읽기는 읽는데 전혀 순종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성경이 나를 구원하겠느냐? 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기록된 말씀이기에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열심히 듣고 순종할 때 즉 청종하는 신자가 악령과 더불어, 불의한 세력과 더불어 승리하는 것입니다. 악령은 말씀을 청종하는 자를 가장 무서워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닙니다. 악령과의 싸움입니다. 여기에서 승리하는 자는 첫째 순교적인 신자입니다. 목숨을 내어놓고 주님을 따르고 믿는 자만이 나가서 일당백을 하고 일당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회개하는 신자입니다. 우리는 육신도 연약하고 죄의 본성을 본래 가지고 태어나기 까닭에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가 담대함을 얻고 루터처럼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저앉고 맙니다. 셋째 말씀을 청종하는 신자입니다. 즉 말씀으로 무장한 자입니다.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듣고 깨닫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나아가 그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자 즉 청종하는 자가 믿음 생활에서 승리하고 악령과의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순종하므로 나가서 일주일 동안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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