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저는 의학을 전공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상식적인 선에서 말씀드린다면 서양의학은 질병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 몸의 이상 증상을 치료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동양의학은 밖으로 나타난 증상치료보다는 그 질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내어서 치료한다는데 있다고 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감기에 걸렸을 경우 대개 나타나는 현상들은 고열에, 기침과 콧물, 그리고 목이 붓는 현상등등일 것입니다. 이럴 때 서양의학은 열을 내리게 하고, 기침을 멎게 하고, 목이 붓지 않도록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면 감기는 낫게 됩니다. 그러나 동양의학은 열과 기침, 그리고 목이 붓는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예를 들어 그 원인이 몸이 허약한데 있다면 원기를 회복하는 어떤 치료를 한다는 말입니다.
의학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제가 생각하기에는 둘 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질병의 현상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 원인을 찾아내어서 치료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무시되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양의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동양의학, 좀 더 쉽게 말해서 한방에 대해 불신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임상실험을 거친 서양의학보다는 한방이 그런 면에서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위에서 수술을 통해 못 고치는 병도 침이나 기타 한방치료를 통해서 치유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니 사실은 둘 다 중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증상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고, 원인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무시되거나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을 치유하실 때에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한쪽에 치중하지 않으시고 이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셨습니다.
즉 어떤 때는 나타난 질병의 현상들을 제거하셨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그 질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도 하셨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시각장애인의 눈에 침을 바르고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게 하심으로 눈을 뜨게 하신 것은 겉으로 나타난 질병의 현상을 치료한 것입니다. 반면에 네 명의 친구가 데리고 온 중풍병자에게는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죄'라는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는 어디에 해당되는 것입니까? 이 여인의 경우도 병의 근원에 대한 치유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녀는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라든가 아니면 뇌출혈에 의한 중대한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 여인은 그보다 더 깊은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대인 기피증입니다. 아니 성적으로 부도덕한 생활입니다.
어떤 분들은 대인기피증이 무슨 질병이냐?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또 성적으로 부도덕한 것은 윤리와 도덕의 문제이지 그게 무슨 질병이냐? 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대인기피증은 오늘날 정신적인 치료를 요하는 심각한 질병 중에 하나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적으로 부도덕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온 사회를 병들게 만듭니다.
며칠 전에 '여수는 떨고 있다'는 제목하의 충격적인 사건이 텔레비전을 통해 보도된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윤락녀가 자신이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17개월 간 거의 매일 다섯명의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간동안에 윤락가를 한번이라도 갔던 경험이 있는 남자들이 불안에 떨면서 보건소에 전화 문의를 하고, 실제로 에이즈 감염여부에 대한 검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 윤락녀도 잘못이 있고, 윤락가를 찾아간 남자도 잘못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도덕하고 그릇된 성(性)이 우리사회를 얼마나 병들게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이 사마리아 여인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을 기피하는 병도 생겼습니다. 주님은 이 질병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원인을 치유하기 위해 주님은 그녀의 가장 아픈 부위를 먼저 건드리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앞에 있는 분이 설마 자기가 다섯 번씩이나 결혼에 실패하고, 여섯 번째는 아예 결혼도 하지 않고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정도는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척하면 삼척'이라고 결혼을 다섯 번씩이나 한 사람의 모습이 어찌 처녀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한눈에 봐도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기야 요즘은 결혼하고도 아줌마 같지 않고 처녀같은 몸매를 유지하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미시'라고 부릅니다. 본인이 결혼한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정말 결혼한 사람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몰라도 결혼을 다섯 번씩이나 한사람을 '미스'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보는 사람의 눈이 좀 어떻게 되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말은 굳이 예수님이 아니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그녀는 '남편이 없다'고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예수님이 자기에게 남편이 몇 명이 있었고, 지금은 동거중이라는 사실을 알아 맞추는지 못 맞추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남편이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남편'이라는 말을 듣는 것 자체를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섯 번이나 결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녀가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면서 정상적인 결혼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했다고 해서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주님께서 모르실리 없습니다.
아마 그녀는 더 이상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동네 여인들이 우물 긷는 시간에 자신이 나왔다면 분명히 남편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런 것이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에 다섯 번 실패한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지금은 아예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의 시선을 피해 기껏 아무도 찾지 않는 이 시간에 우물가에 왔는데 이번엔 유대인 남자가 '남편'에 대한 얘기를 꺼내고 있으니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래서 남편이 없다고 했는데, 주님은 이쯤에서 '그래 알았다'라며 대충 끝을 내지 아니하시고 이번엔 아예 그녀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사실과 지금 함께 생활하고 있는 여섯 번째 남자는 남편이 아니라 동거하는 사람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쯤되면 그녀가 부끄럽고 창피한 것은 둘째치고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겠습니까? 자기의 비밀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분이 자기 앞에 있으니 한편으로는 두렵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보는 사람이 내 안에 있는 깊숙한 비밀을 알고 있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예를 들어 요즘 정보가 얼마나 많이 노출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하루에도 여러통의 우편물을 받아보고 있습니다. 그 중에 대부분은 교회와 관련된 곳에서 보내오는 우편물이지만 가끔은 전혀 교회와 상관이 없는 곳에서 제 이름으로 날아옵니다. '목사'라고 쓰여있지 않으면 김해곤집사님 앞으로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착각할 정도로 말입니다.
화장품회사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건강원에서 오기도 하고, 사우나 혹은 보신탕집에서도 홍보물을 보내옵니다. 그런가하면 채식전문 뷔페가 생겼다 하여 또 홍보 안내지를 보내왔습니다. 아마 교회가 뷔페를 많이 이용한다는 것을 아시는 분인 듯 합니다. 그런데 앞면에 보면 온유한교회 김해곤목사라고 정확하게 제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받아볼 때 그 안에 내용이 어떤 것인지 와는 상관없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게 되었고,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나에 대해 알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 같은 것도 혹여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놀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 사실을 들추어내고 계십니까?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본원인은 부도덕하고 음란한 생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기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매사에 자신이 없고,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부도덕하고 음란한 생활이었습니다. 즉 그녀에게 있는 죄 때문에 그녀의 삶이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녀의 죄를 지적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죄를 지적 받았을 때 그녀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과 20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이 지금 여기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은 뚱딴지같은 말을 그녀가 했습니다. 왜 그녀는 갑자기 예배에 대한 얘기를 끄집어 낸 것일까요?
사실 우리가 죄에 대해 지적을 받았을 때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반응은 화를 버럭 내면서 '당신이 도대체 뭔데 그런 말을 하느냐? 내가 죄를 짓는데 보태준 것이라도 있느냐?'면서 따지듯 덤벼들든지 아니면 '그래! 내가 그런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인데 지금 와서 날더러 뭘 어떻게 하란 말이냐?'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죄를 시인하는 경우는 지극히 찾아보기 힘듭니다. 죄를 짓고도 더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하려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여인은 자신의 죄를 지적 당했을 때 화를 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잘못했다고 죄를 인정하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 대해 그 어떤 변호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이 '예배'에 대한 말이었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어디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었습니다. 왜 사마리아 여인은 여기서 예배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이런 추측은 가능합니다. 그녀가 죄를 지적 받았으니까 그 분위기가 얼마나 어색하겠습니까? 선생님이 교실에서 잘못한 학생들을 야단칠 때를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고 죄를 지적받는 아이는 머리를 푹 쑥이고 있습니다.
물론 요즘도 교실에서 잘못을 지적받을 때 아이들의 모습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학교다니던 시절은 그랬습니다. 그런 분위기는 정말 썰렁합니다. 빨리 그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것과 비교해서 생각해 본다면 아마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얘기의 주제를 '예배'로 돌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주제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예배'에 대해서 말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지적 받는 자리에서 그녀가 예배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는 것은 그녀가 이 예배를 통해 자신이 저지른 부도덕한 죄로부터 회복되어지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란 죄인이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교회주보에 보면 예배순서에 '고백과 간구'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 예배시간에 여러분의 죄가 고백되어지십니까? 왜 우리가 이 시간에 우리의 죄가 고백되어져야 합니까? 그래야 우리 가운데 있는 질병이 치유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육체적 질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모든 질병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가끔 새벽기도때 눈물을 펑펑 흘리며 기도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지 그 흐느끼는 소리를 듣노라면 그런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눈물을 흘리실 수 있습니까?
며칠 전 극동방송을 듣는데 어떤 분이 월드컵과 관련해서 이런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교회도 월드컵 때문에 온통 난리라는 표현을 쓰면서 교회 내에 대형스크린을 설치하여 교인들이 함께 모여 월드컵을 시청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끝에 그분이 하신 말이 아직도 제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월드컵을 위해 기도하고 심지어 예배시간을 조정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우리가 응원을 해야 할 일이면 함께 열심히 응원을 해야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월드컵에 거는 기대감과 감격만큼 예배에 대한 감격과 기대감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월드컵으로 인해 누리게 된 감격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이것만큼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중국선교를 위한 기도모임이 있어서 참여를 했습니다. 모든 분들의 합의하에 3시 20분까지 기도회를 하고 미국과의 경기를 지켜보았습니다. 텔레비전을 켜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었습니다. 그때 기도회에 참여했던 어느 여전도사님의 말씀이 자신은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만 봐도 은혜가 되고 감격이 밀려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으려 하다가 제가 한마디했습니다. "전도사님! 은혜는 주의 말씀을 통해서 받으셔야지요?"
혹시 여러분 중에도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은혜 받은 분 계시지 않습니까? 은혜와 감격은 예배를 통해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미 예배에 대한 감격과 기대감은 오래 전에 상실해 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려도 우리의 마음은 냉냉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죄가 고백되어질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한시간 우다닥 예배를 드리고 쏜살같이 빠져나가 버립니다.
그저께 우리나라가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그 운동장을 보셨습니까? 사람들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경기는 끝났고 선수들도 다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감격을 간직하고 싶어서 운동장을 찾은 관중들은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급적이면 빨리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빠져나가고 싶은 것이 우리의 예배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죄 용서함을 경험한 사람들의 참된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죄의 짐을 지고 가는 인생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죄가 지적 받았을 때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예배를 통해 자신의 죄가 고백되어지고 죄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때 주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한가지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장소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진실로 삶의 회복을 위한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면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려는 마음의 자세와 생각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잘못된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은 22절에서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사마리아인들은 오랫동안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예배를 드렸지만 그들이 드린 예배는 알지 못하는 예배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예배의 어떤 절차나 형식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안내를 어떻게 서고, 예배드릴 때 언제 일어서고, 언제 앉고, 어느 때 교독문을 낭독하고, 이런 것을 몰랐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예배를 드려왔기 때문에 적어도 이런 것에 관한 한 모두가 박사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알지 못하는 예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수천년동안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정성껏 준비한 예물도 바쳤습니다. 아마 순서에 따라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드린 예배는 하나님과 별로 상관없는 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사함과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함을 얻는 예배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계시하신 그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들도 알지 못하는 예배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준비한 예물도 드리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예배를 드리지만 예수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분을 통해 구원받는 그 놀라운 사실에 대한 감격을 가슴에 담고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형식만 갖추었다고 해서 진정한 예배는 아닙니다. 예배는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짜여진 예배 순서에 따라 드리진 한시간의 예배에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감격을 누리고 그분의 피뿌린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삶과 새로운 인생,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23절과 24절에서도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론 한마디로 이거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사마리아사람들이 드린 예배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예배를 드렸습니까? 장소적 개념의 예배였습니다. 즉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가야만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장소를 벗어난 예배는 별로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물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배드리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소도 필요없고, 제물도 필요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준비하지 않은 제물,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하신 제물을 통해 드리는 제사가 참된 제사이며 참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하신 제물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빠진 예배는 그 어떤 형태로든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백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에 낯선 흑인 한사람이 예배를 드리려고 찾아갔습니다. 인종차별이 심한 그곳에서 흑인을 들여 보내줄리 없습니다. 문전박대 당한 흑인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서 하나님께 원망 섞인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들이 내가 흑인이라고 아예 교회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교회가 생긴지 100년이 되었지만 나도 아직 한번도 그 예배당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라고 말입니다. 이 교회는 지난 백년동안 하나님이 없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예배,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린 복음이 없는 예배 그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왜 이단들의 궁극적으로 멸망당합니까? 그들도 똑같이 예배드리고, 똑같이 헌금도 드리는데 왜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없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 피뿌린 복음이 그 예배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참된예배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제물을 통해서 이제는 과거와 같지 않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어떻게 해야 그렇게 예배를 드릴 수 가 있습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되고, 의롭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린다는 말은 좀더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예배드리는 장소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지금까지 예배를 드려왔던 그리심산이나 에발산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드렸던 예루살렘도 아니라는 얘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우리의 마음중심이 예배드리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즉 열심히 장소를 찾아서 그곳에 앉아 있는다 할지라도 몸만 머물러 있는 예배는 신령한 예배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이 시간을 통해 나를 만나주시고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감격이 없다면 그 예배는 신령으로 드린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심코 '예배 보러간다'는 표현을 쓸 때가 많습니다. '어디 가세요?' '예배 보러갑니다.' 그런데 그런 표현이 어쩌면 우리의 잠재의식속에 내재되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즉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는 잠재의식 말입니다. 본다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즉 예배에 대해 나는 제 3자의 위치에 있겠다는 말입니다. 운동장에서 선수들의 팀의 명예를 위해 뜁니다. 그리고 관중들은 그것을 지켜봅니다.
물론 이번처럼 열심히 응원을 해서 국민모두가 12번째 선수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2번째 선수로 여러분들이 기여하셨는데 여러분들도 포상금을 받으셨습니까? 승용차를 받으셨습니까? 병역문제가 해결되어졌습니까? 관중은 아무리 응원을 해도 관중입니다.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보러오면 안됩니다. 그러면 나는 언제나 예배에 관한한 관중입니다. 열심히 응원해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급을 받지 못합니다.
교회에 와서 조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이 좋사오니 하면서 마냥 조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코고는 소리에 자기가 깜짝 놀라 두리번두리번 살피시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두리번두리번 좌우를 살피실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코를 곤 것이 아니라 자신이 코를 곤것입니다. 하기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으니 그 사랑을 너무 많이 받으셔서 조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저께 축구경기장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비춰주는데 저는 조는 사람 한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곳에서 조는 사람이 있었다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제일 궁금한 것은 광화문과 시청 앞에 모인 인파들이 화장실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많은 사람을 헤집고 화장실을 갔을리는 없을 것이고 그러면 어떻게 해결했겠습니까? 참아야지 별수 있겠습니까? 축구보려고 그렇게 야단법석들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피뿌린 복음이 축구보다 못합니까?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월드컵보다 못합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축구 보면서 감격해 하면서, 예배드리면서 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축구보는 시간은 기대하면서 예배에 대한 기대감은 없는 것일까요? 무엇이 문제인지를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의 신앙과 예배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16강을 위해서 기도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내 삶에 예배에 대한 기대감은 왜 없는지 그것을 두고 고민하고, 기도하는 일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3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을 주님은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주님은 이런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가끔 장애아이들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왔는데 어디로 갔는지 잘 알지 못해 찾아다니기 시작합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그 아이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하게 다닙니다. 저도 여러분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타게 찾아도 부모가 찾는 심정과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찾았을 때의 모습도 다릅니다. 우리는 '찾았구나!' 하고 안심하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부모는 찾는 순간 그 아이를 가슴에 꼭 안습니다. 이제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아이를 꼭 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 하나님의 모습이 이와같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 사람을 발견하는 순간, 그를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예배생활은 어떻습니까? 이 예배를 통해 여러분의 육적인 질병과 영적인 질병 모든 것이 치유되고 회복되어지는 은혜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아니 그런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고 계십니까? 화요일에 벌어지게 될 16강전에 대한 기대감처럼 오늘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예배생활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