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예수의 매력은 바로 예수 자신께서 선언하신 인자의 영광입니다. 그는 자신이 짊어지실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하는 역설의 진리였습니다(요 12:24~26). 그는 이때를 위해서 왔다고 하였습니다(요12:27).
그는 자신이 짊어지실 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응답의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요12:28). 인자의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인데, 그것은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요한복음 12장 32절에서 인자의 영광을 표현하였습니다. 그것은「내가 땅에서 들리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들림’(uJyovw)은 예수 자신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위하여 땅에서 들려 올려짐을 가리킵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킵니다(요 12:32). 그 ‘들림’의 결과 그것이 많은 사람을 예수에게로 이끄는 힘, 곧 매력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들림’과 ‘이끌림’은 예수께만 있었던 위대한 매력, 생명의 매력, 구원의 매력, 불사의 매력이었다는 말입니다.
Ⅰ. 예수의 ‘들림’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2절에 「내가 땅에서 들리면…」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요 12:34)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로부터 약 1500년 전, 모세를 통하여 나타낸 하나님의 구속사를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되었던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였을 때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불뱀들을 명하사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하였습니다. 그 뱀에게 물려 독으로 죽은 자가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백성들이 모세에게 나아와 저들의 범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뱀들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모세는 지체없이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으로 불뱀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 놋뱀을 쳐다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쳐다보는 자마다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죽음의 독소에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장대 위에 놋뱀을 들려서 그것을 쳐다보게 함으로 죽음에서 구원받게 하는 ‘들림의 계시’는 하나님 자신께로 부터 왔습니다. 사람이 뱀에게 물려 죽게 된 사실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죽게 된 죄인을 가리킵니다(창 3: ). 장대 위에 달린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에게 구원을 준 사실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속죄의 진리를 예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들림의 진리’, ‘들림의 계시’, ‘들림의 복음’이 하나님 자신께로부터나온 신적산물이라고 한 사실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는 진리입니다(욘 2:9).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들어올리셨습니다. 여기에 구원종교로서의 기독교의 타율성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요 3:16).
Ⅱ. 예수의 들림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까리킵니다.
요한복음 8장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2절 중에 「내가 땅에서 들리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 중에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그 들림은 성부 하나님의 계획이요,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들림은 인자 되신 예수 자신이 당할 필연적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것과 거기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사실을 가르치셨다고 하였습니다(마 16:21). 그는 또 말하기를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자신이 당할 들림의 필연성을 예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들림의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가?
보통 사람들은 죽을 때 누워서 죽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땅에서 들려 십자가 위에 서서 죽었습니다. 원수들이 그를 십자가상에 높이 올려놓고 죽였습니다.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그것은 ‘공개적인 죽음’이며, ‘극치의 죽음’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① 수치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 모든 인류는 자신의 죄가 거기에서 공개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롬 4:25).
② 죄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죄는 마땅히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됨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공개였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롬 6:23).
③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의 극치가 드러났음을 보여줍니다.
들려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았던 사형집행 장교인 백부장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라고 하였습니다.
④ 죄인구원을위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극치를 공개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하였습니다.
⑤ 완전한 대속의 극치를 보여주는 들림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자신의 목숨이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막 10:45).
⑥ 완전한 속죄성취와 승리의 극치를 공개하는 들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높이 들려진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속죄성취를 선언하였습니다.
⑦ 들림은 사실상 영광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속죄를 위한 예수의 죽음이 인자의 영광이요, 또 아버지의 영광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요 12:24, 28). 그렇기에 하나님의 구속사는 역사의 중심입니다. 그것은 역사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실상 구속사의 절정이었습니다.
Ⅲ. 예수 들림의 결과는 모든 사람을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2절에 다시 말하기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이끌다’(eJlkuvw)라는 말은 ‘잡아끌다’, ‘이끌어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타력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뜻합니다. 곧 ‘하나님이 이끄시는 힘’에 대해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면 ‘모든 사람을’(pavnta") 이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만인구원설을 이름인가? 아닙니다. 여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가리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의 예정을 입은 자들입니다(요 13:1, 엡 1:3~14). 저들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3:48). 바로 마태복음 1장 21절의 예수 이름, 곧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란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의 초지역, 초인종을 말하며, 역사의 전 시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어느 때, 어디에 살든지, 곧 누구든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전 우주적 구속의 효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끄시는 생명의 매체, 생명의 자석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의 속죄은총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사 이끄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영의 ‘인도’(a[gontai)는 소경이나 어린아이의 길을 인도하는 경우에서 온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예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유도함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들림은 목적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갈 길로 가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들려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다시 찾는 길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죄인 구원을 목적하고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 곧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매력(kalov")이었습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대속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자이신 그 아들을 사람으로 보내어, 사람들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높이 들려 우리의 죄 값을 대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십자가로 유도하여 예수를 믿게 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들림의 예수’는 매력의 총체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감 속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또 다시 말하기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하늘의 문에 닿을 수 있을 만큼 높이 솟아있는 유일한 사닥다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George Dona Boardam).
‘십자가의 언덕은 그 중요성에 있어서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곳에서 미움의 최악과 사랑의 최선이 만난다.’라고 하였습니다(S. D. Gordon).
우리는 영화 ‘왕 중 왕’을 압니다.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은 데밀(Cecil Demille)이었습니다. 그 영화 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운명을 바라보는 군중들의 장면을 연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엑스트라들이 200명이나 동원되었습니다. 엑스트라들이 로마병정, 여러 유의 유대인, 군중들로 분장을 갖추고 촬영에 들어가려고 할 때, 데밀 감독은 마이크를 붙잡고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5분만 조용한 시간을 가집시다. 종교가 없는 분은 자기 어머니를 생각해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종교가 무엇이든 마음대로 기도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모든 엑스트라들은 조용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장엄한 오르간이 연주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5분 동안에 그 여러 유의 엑스트라들이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영화촬영인데도 사람들의 마음과 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에게 완전히 이끌려 흡수된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로마군병으로 분장된 사람들까지도 그 얼굴이 황홀하고 거룩하게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감독 자신도 그 5분동안에 이런 효과가 나오리라고는 예측도 못했던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직접 목격했던 그 영화의 감독 데밀은 그때의 감격을 술회하기를, “하나님 자신이 나의 허물을 대신 책임지고, 인간이 되었고, 고통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감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들림의 예수는 우리 생명의 매력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내 죄를 봅니다. 죄의 결과 심판의 죽음을 봅니다. 무죄하신 예수를 봅니다. 그것은 죄인 사랑을 나타낸 하나님 자기 사랑의 극치였음을 봅니다. 거기에서 완전한 대속과 속죄성취의 승리를 봅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매력입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통하여 생명을 출산시키는 위대한 역설의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