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다윗은 마지막 행을 기록하기 전 자기가 살아온 생애의 발자국을 다시 한번 돌이켜 봅니다. 주마등처럼 지나간 세월의 길에는 죄인의 발자국이 있는가 하면 성도의 발자국도 있습니다. 죄인이요 성도로서의 다윗의 발자국이 앞서 있고 거룩한 목자의 발자국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앞서가는 죄인의 발자국이 지워져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고 다윗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목자의 심정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범죄하고 실패하고 낙심했지. 좌로도 우로도 치우쳐 행했지. 그런데 내 뒤에 오시는 목자께서 나의 잘못된 발자국을 지워주셨구나. 내 걸음을 교정해 주시고 정리해 주시고 온전케 해 주셨구나. 성도의 발자국만 남겨주셨구나. 그럴 줄 알았으면 내가 더 힘있게 디디고 용기있게 다닐 것을!"
문민정부 5년은 꿈결같이 지나갔고 국민의 정부 5년도 물결같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모두들 "그때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또한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꿈결같이 지나가는 세월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건은 모두가 우리들의 밥이요 복입니다. 장상 총리서리의 좌절에 대한 젊은 기자의 시각은 예리합니다. "중심에 서려고 하지 않고 변방에 남으려는 사람들, 왕궁을 떠나 폐허로 향하는 사람들이라야 백성의 지도자가 되고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백성을 섬기며 살지 않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오늘 하나님이 느헤미야를 찾으신다면 나는 합당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국민일보 미션 02. 8. 3). 저는 우리 교회 젊은이들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네팔과 태국과 하기봉사를 떠나는 그들은 21C의 젊은 느헤미야입니다. 천국의 미소운동으로 새가족을 반기는 나이든 느헤미야 여러분에게서도 소망을 봅니다. "나한사람 밝은웃음 모든사람 기쁨준다" "내얼굴의 환한미소 사람마다 웃음준다" 은혜를 받는 것만큼 은혜를 표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종말론적인 생애, 마지막 시간 선상을 살고 있습니다. 후회없는 20년, 만족스런 10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찬 189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버리고…"를 부릅시다.
"그의 말만 듣지 말고 그의 발자국을 보라 그가 성자인지 사기꾼인지 내가 말해 주리라"고 어떤분이 말했습니다. 다윗은 지난 경험속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자기를 뒤따르며 자신의 생애를 책임지시며 자신에게 관계된 모든 것을 친히 완전케 하시는(시 138:8) 목자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발자국을 자기의 실패하는 오른발과 왼발처럼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나를 뒤따르는 발자국!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발자국이 아닌가?" 히브리어 성경에 있어서 선하심이란 하나님의 온전하신 능력을 말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다윗의 일생을 덮었고 모든 불완전한 것을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다윗의 생애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약했을 때, 위험에 처했을 때, 곤고했을 때, 그를 구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강하게 해주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이었습니다.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이 다윗을 전쟁에서,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적의 손아귀에서, 이 세상 온갖 위험에서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 성경에 있어서 인자하심이란 하나님의 불변하신 사랑을 말합니다. 약속에 변함이 없으시고 그 언약에 진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다윗의 생애를 강권했습니다. 다윗이 범죄했을 때도 그 사랑은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이 실패하고 배반했을 때도 그 사랑은 다윗을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을 사랑하시고 그 영혼을 늘 소생시켜 주신 것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었습니다.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다윗을 불순종에서, 불신앙에서, 마귀의 손아귀에서, 이 세상의 죄악에서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매 사건속에 깃들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로다" 다윗은 멀리 이 세상의 순례가 끝나는 임종의 순간을 상상해 봅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는 시점에서 내 평생을 돌아볼 때 나의 빛나는 발자국을 기뻐할 수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 없이도 자랑할 수 있는 나의 노래가 있을까?" 다윗은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듭니다. "나는 약했지. 나는 실패했지. 내 생애의 종착역에서 나의 자랑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뿐이야. 내가 의지하고 찬양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 밖에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다윗은 그의 펜을 들어 이렇게 씁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생애속에 깃들인 하나님의 완전하신 능력을 보세요. 그리고 여러분의 평생에 나타난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을 보세요. 우리들의 불완전함 가운데 항상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능력의 실행을 보십시오. 우리들의 변화무쌍함 가운데 항상 동재하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실천을 보십시오. 범죄한 사람은 약합니다. 약점없는 인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언제나 우리 자신의 약점은 덮어놓고 남의 약점 말하기를 얼마나 좋아합니까? 사람은 욕하면서 배웁니다. 말로서는 대동강도 팔아먹습니다. 우리는 남의 불행이나 핸디캡을 들추는 못난 습성을 버리고 도리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미하는데 보다 열성적이도록 합시다.
우리들의 찬미제목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산 자처럼 부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능력이 저와 여러분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제는 죽자고 해서 죽고, 이제는 다시 살자고 해서 다시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달렸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역사하사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이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 복음의 사랑밖에 우리에게는 아무 말할 것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옹졸하고 못난 사람들의 관심은 겨우 조그만한 Gossip들, 남에 대한 험담과 세상잡담 뿐입니다. 그런 것은 사실 성도의 정숙미(Modesty)에 관계된 것이지 죄라고 할만한 것도 못됩니다. 그보다는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더 죄에 가깝습니다. 자기의 경건을 자랑하고 자기의 의를 뽐내는 마음의 교만이야 말로 죄라고 할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죄 같지도 아니한 죄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사람을 자랑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치고 변덕부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의지할 바가 못됩니다. 그 사랑은 상황따라 조건따라 변합니다. 오늘의 사랑이 내일의 사랑과 연결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사랑 때문에 울고 웃기를 얼마나 해왔습니까? 우리의 과거는 사람의 사랑 때문에 기뻐하고 슬퍼한 것, 그것을 믿고 속은 것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감연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속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러시아의 솔제니친이 말했지요. "우리의 불행은 하나님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교회의 문을 닫으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닫으시고 복의 문을 닫으신 것이다" 부지런히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며 나오며 생명의 꼴을 얻고(요 10:9)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지른 남의 잘못은 어제의 내 잘못이었고 잘못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세익스피어의 말을 기억하면서 사람이 준 상처를 초월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이 있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선한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인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역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히 13:8의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속죄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의가 되십니다.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나의 사랑도 변하고 다른 사람의 사랑도 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 불변입니다.
다윗은 인생의 황혼, 순례자의 귀향을 내다봅니다. "나도 늙어서 치매가 될 수도 있고 믿음이 약해질 수도 있겠지. 또 무슨 변덕을 부릴지 내 마음 나도 몰라.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하나님의 영원불변하신 약속의 사랑에 근거한 확실한 것이 있지.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틀림없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 여호와 하나님의 불변하신 사랑이 끝까지 나를 따른다는 것, 죽음을 깨뜨리신 그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그 사랑이 내게 임하여 죽음의 공포와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고 나로 하여금 넉넉히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거야" 이 세상에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안 다윗은 그의 미래와 영원한 장래 역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의지하고 있음을 알고는 한없이 기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 26:4). 할렐루야!
여러분의 생애를 지금까지 뒷받침해 온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친절하신 팔과 발자국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땅에서 구한 것들은 천국의 깃털에 지나지 않습니다(막 10:35-40). 예수님이 이 세상과 차원이 다른 천국을 약속하실 때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자도 하늘나라에서는 제일 작은 자보다 못하다(마 11:11)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주님께서 우리들의 평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들의 일생과 임종을 인도하십니다. 신후사를 맡아 처리해 주시고 완전케 해 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그 부활의 아침에는 우리 몸까지 다시 살리사 예수께서 약속하신 아버지의 집으로 맞아들이실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선하신 목자이십니다. 선하다는 것은 착하고 좋다는 것 이상으로 강하고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자하신 목자이십니다. 인자하다는 것은 부드럽다는 것 이상으로 사랑함에 있어 변함도 없고 실패도 없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 불완전하고 변덕스런 인생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능력과 불변하신 사랑이 부족하고 죄많은 우리들을 친히 완전케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자기의 평생과 임종과 부활을 다 맡겨 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날마다 맡겨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시작한 다윗의 신앙고백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니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는 숭고한 소망을 노래함으로써 그 짧고도 긴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7:1).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