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관심사에서 시작 2024-06-18 07:29:13 read : 868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현재의 관심사에서 영원을 주라
매 설교는 꼭 말해야 할 한 가지를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전체의 내용이 하나만 가리키고 있어야 한다. 한 가지 주제가 구원의 한 면을 가리켜야 한다. 그래 들은 내용이 마음에 확실하게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에 계속적으로 작용해서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
문제는 그 논지가 과연 구원으로 이끄느냐는 것이다. 구원은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이다. 영혼으로부터 시작되어서 이 세상의 삶에도 영향을 준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 비슷한 것을 주는 것으로 설교는 마치지고 만다. 여기서는 구원과 그렇지 않은 구원 비슷한 것을 가려보겠다.
1. 청중의 관심사를 설교하라
설교자는 언제나 청중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관심 없는 내용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을 일으킬 질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설교자는 항상 청중의 관심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관심을 영원한 관심과 연결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노인들이 당하는 소외감과 죽음의 두려움을 말해봐야 전혀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한다. 차라리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찬란한 미래를 말해준다면 관심을 갖는다. 잘 사는 사람들에게 가난 극복하는 이야기 역시 흥미를 주지 못한다.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른 흥미가 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병고침보다 더 관심 끄는 내용이 없다. 빚으로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위로와 돈 버는 이야기보다 더 흥미를 유발시킬 내용이 없다. 가족 없이 멀리 출장 나온 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큰 힘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논지는 흥미를 유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청중의 욕구에 민감해야 한다. 유능한 설교자는 앉아 있는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듣는 이의 귀가 솔깃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내내 관심사에 집중한다. 자기의 관심사를 말하는 동안 청중은 절대적으로 집중한다. 관심사를 벗어난 내용은 청중을 잡지 못한다.
설교가 자기의 문제를 말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해답이 얻어진다면 청중은 열심히 그 설교자를 추구할 것이다. 계속 그 설교자에게서 들으려고 한다. 자기 문제를 항상 명쾌하게 해결해 준다면 왜 다른 곳에 가겠는가? 그 설교자가 기다려지고 만사를 제쳐놓고 말씀 들으러 달려갈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설교자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사에 민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선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심방과 상담과 대화를 통해 그들의 문제를 들으라.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내용들, 삶 속에서 알고 싶어 하는 것들에 귀 기울이라. 시대, 상황, 경기에 따라 사람들의 일차적 관심사도 변해간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내용도 알아야 한다. 물가라든가, 부동산의 동향, 내 집 마련의 기회, 수험생들의 문제, 청소년 비행, 도둑과 떼강도의 극성, 농산물 수입개방, 공공요금 인상, 국제화, 환경, 통일, 등등 일반적으로 흥미를 일으키는 내용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꼭 시사적인 것들을 안 해도 관심사는 말해야 한다. 가정생활, 자녀교육, 경제적인 향상, 신앙의 성장, 외로움, 열등감, 불안감, 좌절과 실패, 그리고 행복과 소망 같은 것들은 언제나 관심사에 포함될 수 있다. 이것들이 궁극적인 관심사는 될 수 없지만 그리로 인도하는 첫 단계로 사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설교의 도입 부분은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첫 몇 마디에서 청중의 욕구와 맞아 떨어지면 듣게 하는 데는 일단 성공한다. 관심 없는 이야기로 시작된 설교는 청취를 중단시킨다. 유능한 설교자들은 항상 청중의 관심을 이끌어 낸다. 듣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든다.
문제는 그 관심사가 궁극적이냐는 것이다. 잠시 동안만이 아니고 영원하고 변함없는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냐는 것이다. 병이나 빚 문제 해결하러 왔다가 영혼구원 받고 천국 얻게 되었다면 잘 된 일이다. 하지만 예수 믿고 여러 해 지났어도 여전히 건강과 돈 문제에만 관심 쏟는다면 큰일이다.
2. 일시적 관심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라
흔히들 외로운 자와 함께 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가난한 자와 나눌 것을 신자들의 가장 중요한 덕으로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이런 수준은 다른 종교에서도 말하고 있다. 신앙 없는 사람도 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가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해야 한다.
교회가 이웃 돌보고 사랑하는 일을 잘 못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 불신자들이 비판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랑에서부터 선행이 우러나오게 되어 있다. 하지만 신앙이 없이 하는 선행으로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더 근본적이고 요긴한 데로 나아가자.
틸리히는 신학을 할 때 언제나 “철학에서 문제를 찾아 신학에서 해답을 얻는” 방법을 쓴다고 한다. 연계의 방법이다(Method of co-relation). 인간 세상에서 인간이 당하는 문제를 보고 성경에서 해결의 답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과 신학을 연결시키려 했다. 얼핏 보면 훌륭한 방법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 있다. 과연 죄인인 인간이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진단할 힘이 있는가? 소경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가? 영적인 지식이나 능력이 전혀 없는 인간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알아서 자신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는가? 전혀 가능하지 않다.
현대신학은 이성으로 인간문제를 진단하려 한다. 이성이 진리를 판가름하는 기준이다. 성경도 이성에 의해 해석된다. 인간문제도 이성의 법에 의해 제기되고 같은 법으로 해석된 성경을 통해 답을 주게 되었다. 고로 틸리히의 방법으로는 이성의 수준 밖에는 문제 제기도 진단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 문제는 자연 속의 삶으로 국한되고 말았다. 초자연은 이성을 벗어나는 것이기에 무시되었다. 창세기 앞부분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종교적 또는 신화적 기록으로 본다. 그러므로 원죄의 개념도 아주 상징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상 현대신학에서 죄의 심각성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 계시, 천사, 심판의 초자연 또는 영적 개념은 자연의 영역 속으로 끌어내려져 상징 또는 신화로 설명되었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세계는 의식적이건 무의적이건 부정하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천당과 지옥과 내세는 미개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오늘날 누가 지옥을 설파할까?
그러므로 인간사회, 이성, 도덕, 자연의 법칙 등에서 구원에 해당되는 것을 찾게 되었다. 구원은 세상에서 좋은 그 무엇이었다. 사랑, 의지, 정신, 이상향, 윤리, 고난 받는 삶, 사회주의 등이 구원의 의미로 대치되었다. 많은 설교자들이 전통적인 천당 대신 이러한 개념들을 구원으로 설교하였다.
오늘날 기복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 역시 자유주의자들처럼 자연 영역 속에서 거짓 구원을 추구한다. 병고침, 사업, 자녀 잘되는 것, 만사형통등 순전히 세상적이고 자연적인 복만을 찾아 헤맨다. 이것들이 사람들의 관심사인 것은 틀림 없다. 그래서 이런 축복을 내리려는 부흥회가 성행한다.
그러나 인간 문제가 자연차원에서 그쳐지는가? 구원이 그런 수준인가?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병도 낫고 사업도 잘되는 것을 누구나 바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진짜 복의 그림자일 뿐이다. 병 나음은 영원한 부활의 그림자요 사업형통도 영원한 복락의 잔가지일 뿐이다.
성경에서 보는 인간의 상황은 병이나 낫고 사업이나 잘되는 정도의 한가한 게 아니다. 물론 성경에 병 낫고 자식 잘되는 것이 있다. 이걸 추구하는 게 잘못된 건 없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안 된다. 육신적으로 잘되어서 영적인 갈급함을 잊어버린다면 차라리 잘 안 되는 것이 영혼에는 좋다.
그러므로 유능한 설교자는 세상적인 관심사에서 시작하더라도 영적이고 영원한 관심사로 유도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설파한다. 영원한 구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삶에 대한 갈급함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3. 성경에서 본 인간의 상황과 구원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문제는 실로 무섭고 급박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영원한 멸망을 앞에 두고 정신 없이 돌아다니고 있다. 이 순간에도 수없는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영혼은 내 아버지나 내 남편이다. 여기 대해서 너무도 무지하고 무관심한 것이 인간이다.
이 상태는 죄라는 단어를 떠나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누구든지 죄가 무엇인지 깨달으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루터는 인간이 죄를 어렴풋이라도 알게 된다면 두려움과 고통 속에 발광하고 말 것이라고 했다. 신자가 되어 깊이 깨달았다고 해도 지극히 피상적인 정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죄는 현대신학이 보는 것처럼 사회에서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정도가 아니다. 더 근본적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칼빈에 의하면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에서 시작해서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경멸 즉 불신앙으로 이어진다. 자기를 창조하고 선하게 하려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배신이다.
이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살수록 더욱 심해진다. 겉으로는 깨끗한 것 같아도 속은 말할 수 없이 악한 게 인간이다. 그에 대한 형벌은 무서운 것이다. 사망의 그림자는 삶의 모든 분야에 저주를 뿌린다. 삶에서 경험하는 저주는 장차 올 무서운 일에 대한 그림자요 서곡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지옥에 대한 설교가 없다해도 지옥은 실재한다. 거기에는 소망이 없다.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하다. 어둠과 통곡, 꺼지지 않는 불, 영원한 고통, 무서운 일이다. 어떤 표현으로도 그 참상을 만분의 일도 그릴 수 없다. 거룩한 하나님을 침 뱉고 배신한 인간이 받을 형벌이다.
교회사를 통해 볼 때 모든 대각성의 시기에는 인간의 죄와 심판이 선포되며 회개가 촉구되었다. 무한자에 대한 범죄를 유한자로서는 갚을 길이 없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락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기도하고 금식하고 부르짖어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셔야만 가능하다.
성경의 또 다른 주제는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이시라는 선포이다. 자신에게 반역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자신의 몸에 인간의 저주를 담당하신다. 이 대속이 하나님의 구원방법이다. 하나님이 구원을 대신 이루어놓고 믿기만 하라는 것이다. 인간이 할 일은 듣고 믿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이 무엇을 더하면 안 된다.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 믿어야 한다. 아무 것도 안하고 그저 믿기만 하다니!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다. 세상의 지혜로 보면 유치한지 몰라도 구원의 효력은 하나님만큼이나 무한하다. 하나님이 대신 행하셨다! 내 궁극적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렇게 불가능한 문제가 이렇게 쉽게 해결되다니. 너무 쉽기 때문에 세상은 믿지 않는다. 아직도 죄인인 나를 향해 의롭다 하실 때, 믿으면 그 믿음을 의로 여겨준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교리이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임하게 된다. 그래서 참된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는 과거의 자신 전체를 뼈아프게 뉘우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자신의 정체를 받아들인다. 옛 나는 죽고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사실을 믿는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로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해 삶의 능력을 공급한다.
신자는 누구나 자기 정체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신비한 능력으로 채워진다. 매일 매일의 삶은 성화의 과정이다. 설교자는 이러한 내용을 복음으로 선포한다. 그래서 청취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로 가지게 하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청취자가 자기 영혼의 갈구를 듣게 해야 한다. 세상 관심사가 영원한 관심거리로 바뀌게 말이다. 세상 관심거리들로 시작해서 세상 것의 만족으로 그친다면 속이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짜 구원을 주어서는 안 된다. 달콤한 위로와 사탕발림으로 그쳐서야 되겠는가!
4. 구원을 주는 논지 훈련
여기서는 구원의 목표를 확실하게 하는 요지를 연습해보자. 가능하면 영원한 구원에 더 접근하는 표현을 훈련해야 한다. 상대적인 기쁨이나 위로를 주기보다는 그리스도 자체를 주고 그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살도록 설교한다. 그리스도의 생명, 능력, 사랑, 소망, 구원을 주도록 만들어본다.
평: 참된 천국에 대한 순진한 이해이다. 이웃의 짊을 우리가 어느 정도는 나누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천국이 오는가? 이것이 구원의 설교인가?
<고쳐본 내용>
제목: 참된 천국
논지: 예수를 전파해서 마음에 천국을 확장하자
1.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죄사함을 주자
2.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자.
3.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을 주자.
<학생의 요지 2>
제목: 치료의 주님
논지: 치료자이신 예수 믿고 건강하게 살자
1. 중풍병자가 고침받았다.
2. 앉은뱅이가 고침받았다.
3. 귀신든자가 고침받았다.
4. 기타 각색 병든자가 고침받았다.
평: 치료자이신 예수 믿는 목적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사는 것인가? 예수의 주된 사명이 육신의 병 치료인가?
<고쳐본 내용>
제목: 치료의 주
논지: 예수는 영혼의 치료자이시다
1. 병의 치료자이시다.
2. 죄악의 치료자이시다
3. 생명의 수여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자는 영원한 건강을 얻는다.
<학생의 요지 3>
제목: 경건생활의 유익
논지: 가장 가치 있고 복된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다.
1. 바른 인생관을 얻을 수 있다.
2. 바른 물질관을 얻을 수 있다.
3. 바른 내세관을 얻을 수 있다.
평: 경건생활이 무엇인지? 또 가치 있고 복된 삶은 무엇인가? 좀 더 진리에 접근해 보도록 명상하라.
<고쳐본 내용>
제목: 경건생활의 유익
논지: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그의 삶을 받은 것이다.
1. 그의 인생관을 받았다.
2. 그의 물질관을 받았다.
3. 그의 내세의 소망을 받았다.
이번에는 무엇이 참된 소망인지 세상의 것들과 비교해서 영원한 소망을 가지는 한 설교를 만들어 보자. 문제 의식을 가지고 질문을 던진 다음 해답을 논지로 얻어 본 뒤에 진행을 해보자. 여기에서는 참 소망을 향해서 논지를 완성시켜나가는 논리 진행방법을 사용해 본다.
<1 단계>
문제제기: 사람들은 거짓 소망에 속는다. 무엇이 참된 소망인가?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인가? 돈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것인가? 정말로 변치 않고 날로 새로워지는 소망은 없을까? 하나님만이 그 소망이다. 그 안에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 비추어 모든 것을 조명해야 한다.
<2 단계>
제목: 하나님 나의 소망
논지: 하나님만이 살아있는 소망이시다.
1. 고통이 소망을 흔들어놓는다
2. 신자는 위기에도 소망을 갖는다
3. 신자 속의 소망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4. 그 때문에 잔 소망들도 의미를 갖는다
<3 단계>
예화 하나를 통해서 소망의 의미를 설명해 나간다.
하나님 나의 소망
시편 42:6-11
주어지는 삶의 힘은 현재보다는 미래에 있다. 지금 상태에서 발전이 중단된다 생각해 보라. “더 이상 지식이나 재산의 증가도 없다. 진급도 없다. 자식들도 형편없이 살 것이다. 더 이상 행복할 일도 없다.” 이쯤 되면 살 의욕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사람들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이 소망이 사람들에게 힘을 공급한다. “지금은 힘들게 살지만 앞으로는 나아질 것이다. 나는 늙어가도 삶의 질은 더 나은 것이 될 것이다.” 무엇인가 좋은 것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신자들은 모든 면에서 불신자에 비해서 낙관적이다. 소망이 강한 것이다.
1. 위기에 달하면 모든 소망은 흔들린다.
어느 날 이 소망에 이상이 생긴다. “살기가 너무 힘든 것 같다. 일이 안 된다. 잘 될 가능성이 안 보인다. 자식이 잘 안되고 배우자가 속을 썩인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소망이 없어지며 고통만 있다. 소망은 어디로 갔는가?
미국의 저명한 목사인 할리우드 제일 장로교회의 로이드 오길비목사는 이 문제를 가지고 오래 고민하면서 기도하였다. “도대체 소망이란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잃지 않고 확실하게 소유할 수 있을까?”
그는 휴가를 얻어 스코틀랜드로 갔다. 에딘버러 대학 도서관에서 소망에 관한 책자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여러 날을 보냈다. 그러나 별로 소득이 없었다. 그는 아직 소망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처녀가 시집가고 고등학생이 대학 들어가는 것이 소망인가? 말단 직원이 진급하는 것이 소망인가? 그들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도 안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또 다른 소망이 일어나야한다. 평생 이러다가 그치는 것이 소망인가? 무엇이 흔들리지 않는 영원하고 긍극적인 소망인가?
바닷가에서 산책하고 있었다. 부슬부슬 오는 비를 맞으며 멀리 걸었다. 바닷가 울퉁불퉁한 바위 위로 한없이 걸었다. 춤추는 바다를 보면서 생각했다. “소망이란 그저 내용 없는 기다림에 불과한 것인가? 연기처럼 없어지고마는 것이 아닌가? 고통에 빠진 인간이 어떤 도움을 얻을까?”
그러다 사고가 벌어진다. 건너뛰었을 때 미끄러지며 왼발이 바위틈에 낀다. 넘어지며 머리를 바위에 부딪쳐 의식을 잃었다. 정신 차린 그는 다리가 부러진 것을 알게 되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온다. 생각했다. 적어도 2킬로미터 안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비속에 밤이 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런 소망이 없다. 반대로 완전한 절망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간단하게 죽고마는 것인가? 도대체 자신이 사람들에게 들려준 소망이 어떤 것이었던가? 그가 지금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열은 오르고 의식은 가물거렸다. 지금 소망이 요구되는 데 전혀 소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2. 신자의 속에는 꺼지지 않는 소망이 살아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다. 깊은 속에서부터 그 무엇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님은 나를 구하실 것이다. 또한 죽던 살던 나는 두렵지 않다.” 누워서 한 쪽 다리와 두 팔로 몸을 밀고 올라갔다. 언덕은 한 없이 멀었다. 그는 지렁이처럼 움직였다. 그렇게 개울을 건너고 길을 지나야 했다.
시간은 마치 영원 같았다. 그대로 중단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속에서 들리는 음성 때문이었다. “절대로 포기 말라.”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얼마나 오래 버티겠는가? 얼마나 가야 사람을 만나겠는가? 그런데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 살려! 다리가 부려졌어요!” 어둠 속에 아무 응답이 없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이 상황에서 그분은 무얼 하고 계신가? 아니 정말 하나님이 있기나 한가?” 이제 고통 속에 몸은 점점 더 마비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떠날 준비를 하라한다. 그런데도 마음은 평안하기만 하다.
누워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내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렘29:11) 따라 나오는 말씀은 기도하면 들을 것이요 전심으로 찾으면 만나리란다. 그러나 말뿐이지 무슨 실제 도움이 있나?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기가 믿어온 하나님께 매달린다. 비장하게 신앙을 고백한다. “하나님, 용서하십시오. 나는 당신보다는 당신이 주시는 도움을 더 원했습니다. 이제 알았습니다. 당신만이 내 소망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당신에게 나를 맡깁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비가 멈추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는 이 한적한 곳을 걷고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의 지친 목소리를 그들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곧 발걸음을 돌려서 왔다. 한 중년 남자와 십대 자녀들이었다. 그는 휴가온 심장 전문의였다. “우리가 이리로 온 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당신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충격 속에 있어요. 이 밤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3. 하나님 자신이 바로 참된 소망 그 자체이시다.
구출된 목사는 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 무려 세 시간을 기어왔던 것이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구원할 사람을 보냈는가? 더 빨리 할 수는 없었는가? 그는 알았다. 이 시간 동안 그는 지난 어느 때 보다 더 깊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할 때 참된 소망은 일어나는 것이다. 참된 소망은 연기처럼 늘 변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각도 마음도 아닌 실제 인격체였다. 바로 하나님이 그 참된 소망이었다.
다른 소원들은 그 소망의 잔 가지들일뿐이었다. 교육시키고 성장시키며 내게 최선을 주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 바른 소망이었다. 이제 내 작은 소원들이 이루어지던 않던 내 삶 전체는 소망이었다.
본문에서 다윗이 이 영감 넘치는 시를 쓸 때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왕과 원수된 사이였다. 왕은 모든 힘을 다 동원해 죽이려고 따라왔다. 다윗은 두렵고 억울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웠다. 한 두 그런 게 아니다. 이 도망자의 생활은 끝이 없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소망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뭐하는 분이냐?” 이 비슷한 경험을 우리도 할 수 있다. 살다보면 주일 도 일을 해야 한다. 일에 치우치고 돈에 휘둘리고 사람에게 시달리고 몸도 아프고 짜증 난다. “도대체 이렇게 살아서 뭐하는가?”
다윗은 말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해서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느냐.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어라. 나는 내 구원자 하나님을 어떤 일이 있어도 찬양하겠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교육하시는 손, 성장시키는 손에 순응했다. 소망은 언제나 그의 속에 있었다. 하나님이 소망이었다.
4. 참 소망 하나님 때문에 다른 잔 소망들도 의미를 갖는다.
그 안에 바라는 모든 것이 있었다. 씨앗처럼 그의 속에 있었다. 그것은 장차 완전한 모습으로 펼쳐질 것이었다. 그 모습은 상상하던 것과는 다를지도 몰랐다. 내가 간절히 얻기를 소원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가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으로 펼쳐질 것이다.
나는 이 소망 속에서 최상의 모습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내 삶은 하나님의 손으로 교육되고 만들어져서 영광스런 모습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는 부활하여 영원히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삶은 이미 성공을 기약받고 참된 복락을 소유하고 있다. 여기에 비추어 현실이 조명되어야 한다.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소망의 힘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단지 바라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소망으로 가지고 있다. 그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 안에 모든 좋은 것이 있다. 그 안에 내 삶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앞으로 나타난다. 마치 미술가가 그리듯 신비한 아름다움이 나의 삶을 통해서 펼쳐질 것이다.
이 힘이, 이 실재하고 살아있는 소망의 힘이 현재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세상 사람이 모르는 힘을 공급한다. 앞의 그 목사도 다윗 왕도 그 힘으로 투쟁하였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신비한 힘, 그것은 이미 소망의 하나님 그 자체로 주어졌다. 믿음으로 찾아보라. 내 속의 그 소망과 힘을 의지하라.
우리는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늘 소망의 하나님을 누리자. 그는 고통 중에도 기쁨을 주고 찬양할 힘을 공급하고 계시다. 믿음으로 느끼고 그 힘을 발하여 찬양하라. 그리고 장차 나를 통해 펼쳐지는 하나님의 삶을 기대하자. 내 속의 살아있는 이 소망으로 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