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적 논지는 성경에서 나온다. 성경 읽다가, 또는 어떤 사건이나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찾다가 얻는다. 심방이나 상담 중에도 어떤 문제에 답을 주다가 신비한 경험을 한다. 전혀 상상치도 않았던 기발한 대답이 나오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이다. 이 내용을 적어 놓으면 영감 있는 논지가 된다.
그러려면 설교자는 성경을 늘 읽어야 한다. 그래서 의식구조를 성경적으로 해야 한다. “성경적”이란 말이 무엇인지 조금 뒤에 논하겠지만 성경적이지 않은 설교는 전혀 설교가 아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이 주고자 하는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성경적이다.
무릎 꿇고 듣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라. 이것이 설교는 물론 신학전체의 출발점이다. 마구간이 사람 눈에는 초라하게 보인다. 그러나 거기 말구유에 그리스도가 담겨 있다. 성경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만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이 담겨 있다. 다른데서는 절대 찾을 수 없다.
겸손히 성경을 보면 첫 눈에도 다른 책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위를 느낀다. 구원에 필요한 지식의 범위와 내용이 완전하다. 인간의 언어를 빌어서 초자연적이고 영원한 구원을 설명하고 있기에 반드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이해가 분명히 온다. 겸손한 마음에 성령은 일하신다.
성령의 증거가 이성을 초월해 구원의 실재를 믿게 만든다. 여기서 나오는 권능은 엄청나다. 이 권능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중생하고 성장하게 만든다. 바꾸어 말하자면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 곧 성경을 통해서 일어난다. 다른 방법으로 성령이 일하신다고 믿으면 미신이다.
성경만을 구원의 내용으로 삼으라. 개신교의 신앙원리 중 하나이다. 성경만이 신앙의 기초이다. 그 외에는 없다. 성령은 성경의 내용이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신다. 성령이 성경의 내용을 떠나서 일하신다고 믿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아무리 엄청난 기적이 벌어져도 이미 기독교는 아닌 것이다.
흔히들 성경적으로 설교한다고 한다. 자신은 성경밖에 모르고 성경만을 설교하겠다고들 선언한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의 본문을 가지고 설명하는 식으로 설교한다. 또한 설교 도중에 성경 구절을 찾으라고 해서 읽힌다. 그런다고 그것이 성경적인 설교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외형적인 모습일 뿐이다.
성경이 주려는 것을 이해 못하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사용해서 말해도 인간의 말일뿐이다. 바리새인들이 성경에 능통했다지만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다.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눈앞에 보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었으니 쓸데없이 읽은 성경이다.
그리스도를 모른다면 성경전체를 다 사용해 설교한다는 일조차 무색해진다. 사실 누가 그리스도를 모르겠는가! 신자가 왜 예수를 모르겠는가. 하지만 실제의 경우 그리스도로부터 별 혜택을 받아 누리지 못했다면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구원의 능력이 나를 움직여가지 못한다면 모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강해설교라고 무조건 성경적 설교로 볼 수 없다. 또한 제목설교라고 덜 성경적이지도 않다. 강해 설교의 많은 경우는 전혀 비성서적인 해석으로 일관하는 걸 본다. 성경을 놓고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해석의 기준이 복음적이지 않다면 그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성경읽기일 뿐이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해석이 너무도 다르다. 이단들도 열심히 성경을 신도들에게 가르친다. 여호와의 증인이 성경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 놀라울 정도이다. 그러한 성경공부가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던가? 아니요. 오직 파멸뿐이다. 가정이 파괴되고 다른 신자들이 유혹된다.
그렇다면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방법이 중요하다. 성경을 높이 생각하고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첫 번 째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성경이 말하고자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것 없이 성경의 각부분은 인간의 도덕 교훈과 크게 다르지 않을 뿐이다.
2. 복음적인 논지
성경전체가 가르치는 것을 한 마디로 하자면 “그리스도의 하신 모든 일이 나를 위함인 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이다. 신자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 덕분에 사는 존재들이다. 탄생부터 승천까지 모든 과정이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 유익을 누릴 수 있어야 구원은 실제적인 경험으로 나타나게 된다.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복을 받겠다는 생각은 종교심일 뿐이다. 기도건 선행이건 내 수고로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 대가로 바뀐다. 그래서 열심히 하는 만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율법적 믿음이다.
율법 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다. 단지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잘못된 믿음을 가지기에 율법적인 믿음이라고 한다. 이 믿음대로 하면 온통 보상심리에 잡혀 살게 된다. 기도했으니 봉사했으니 바쳤으니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공로는 의미가 퇴색된다. 그의 공로로만 구원 얻는 것인데.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의 삶은 누구도 살 수 없다. 자기 힘을 다하더라도 겉모습이요 순전히 육신이다. 예배까지도 순전히 육신으로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신다. 영의 세계와 영의 일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다.
여기서 개신교 신앙원리 두 번 째 면에 들어간다. 성경 내용이 곧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며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 죄의 사함과 성화의 권능을 받는 일, 매일의 삶 속에서 승리와 능력을 경험하는 일, 모두가 다 그리스도가 해주신 것들을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 주신 일들에 관한 지식”에서 출발한다. 그 지식이 믿을 내용이다. 그 지식을 많이 알고 믿는다면 엄청난 능력이 수반된다.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일을 알면 내가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지도 알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사람들은 믿음과 행위를 구분하여 둘 다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행위가 곧 믿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주위에서 믿음 좋은 사람이 누구인가? 열심히 교회 나오고 봉사 잘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 믿음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니 행위가 좋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그러므로 믿음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나 행동하라는 말을 강조하게 된다. “열심히 하십시오. 봉사 잘하십시오. 기도 많이 하십시오. 성령충만 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는 안 가르쳐 주고 그저 하라는 설교만 계속한다. 이런 식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인용해도 율법적인 설교이다.
행위만 보고서는 절대로 믿음을 판단할 수 없다. 행위가 곧 믿음이라고 한다면 간디나 공자 같은 분들은 구원을 받았어야 한다. 실제로 그렇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영적인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인간의 눈에 행위가 아무리 완전해도 단지 육신의 일일 뿐이다. 영적 세상은 믿음으로만 본다.
바울은 성경의 차원 높은 윤리를 자신의 힘으로는 행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선을 원해도 행할 힘이 없다고 탄식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인데 선행하라고 설교한다고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선행은 영적인 활동이다.
우리는 본성부터 수준 이하이다. 겉으로 간음 안하고 살인 안할 수 있다. 하지만 이성을 참으로 자매처럼 형제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가? 원수를 향해 순수한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가? 이 수준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럴 수 있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바로 이러한 죄성이다. 악하기에 그리고 하나님을 떠났기에 괴로운 것이다. 세상에 올바로 되어 스스로 복받을 인간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선포한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런 상황에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자기 힘으로 선행을 해서 구원이나 복을 받겠는가!
그래서 복음이 필요한 것이다. 복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한 의를 행해주었으니 그 사실을 믿으란다. 또한 그 분을 받아들여 한 몸을 이루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공로가 다 내 것 되고 그의 능력이 다 내 힘으로 된다는 기가 막힌 소식이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믿으라지만 말고 이러한 믿을 내용을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 믿음이 곧 행동으로 나타난다. 누가 멋진 의복을 두고 누더기를 입을 것인가? 누가 정갈한 음식을 두고 쓰레기통 뒤지겠는가? 믿을 내용을 주자. 그러면 믿는다. 그냥 믿으라고 외치는 것도 율법이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3.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믿음으로 성화한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하늘에서 온다. 인간 것과는 완전히 구분이 된다. 건강이나 재산 같은 것도 그 시발점이 하늘이다. 비록 운동하고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으로부터 그 힘이 넘쳐온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모두가 영적이다.
칼빈은 말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외에는 어떤 복도 원하지 않고 받지 않겠다.” 그래야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가 있다. 영적 선물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다. 하나님 방법으로 하나님이 주신다. 인간 차원이 아니다. 그저 잘 먹고 잘사는 정도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 못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가 받을 구원을 예시해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그 구원의 차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점점 더 이해를 넓혀가게 된다. 믿음은 무조건 믿거나 경건한 느낌을 갖는 것 아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믿을 내용이 있다. 그리스도가 성취하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의가 무엇인가? 어떤 의로 하나님 앞에 서는가? 인간의 의? 천만에! 그런 걸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겠는가! 하나님 앞에는 “하나님의 의”로만 설 수 있다. 이 새로운 의는 세상에는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해 못한다. 신자들도 잘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가진 의이다.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의여야 한다. 정말로 이성을 보고 음욕을 가지지 않고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의이다. 이런 의가 열심 낸다고 도 닦는다고 인간이 얻을 수 있는가? 그저 선행 좀 하고 가난한 사람 좀 돕는다고 의롭다고 생각하면 크게 착각하고 있다.
천국은 절대로 인간의 의로는 얻을 수 없다. 수준 미달의 영혼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지옥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공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가 이루신 모든 의가 나를 위한 것이라고 믿으면 그 믿음을 보고 나를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내것으로 믿는 방법이다.
이 방법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려는 모든 복은 얻어진다. 믿음으로 얻는다. 믿음으로 얻음은 공짜로 얻는다는 말이다. 선물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선물을 내 선행이나 재물로 사려 한다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냥 감사하게 받아누려야만 한다. 쉽지만 복음을 믿어야만 이해가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복은 단지 믿음으로만 얻는다. 영적인 은사도 기도의 응답도 말씀을 믿어야만 가능하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중풍병자가 노력을 많이 하면 일어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고쳐졌음을 믿어야 한다. 다음에는 그 믿음대로 행동해야만 나음이 경험된다.
성화는 이러한 과정이다. 내 노력으로 하는 게 아니다. 열심내고 기도 많이 한다고 차원 높은 삶을 살아지지 않는다. 주께서 죄를 가져가셨고 또한 성령으로 들어와 새 힘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존재로 변했음을 깨닫는다. 이제 믿음으로 행동하면 성화는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설교는 무조건 행동할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을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믿기에 행동하는 게 아니라 행동하면 그런 존재가 되리라고 가르친다. 행동 많이 하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아니 그 반대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해 복을 받았기에 그 힘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적 설교는 일단 복된 소식의 내용을 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하여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깨닫게 해준다. 다음으로 거기 해당되는 삶을 살도록 가르쳐 준다. 즉 1) 믿을 내용, 2) 그 내용을 믿은 사람의 변화, 3) 그리고 변화된 사람이 살 수 있는 능력의 삶 등을 포함 시켜야한다.
4. 율법을 복음으로
그러면 여기에 앞서 말한 내용을 가지고 적용해 보자. 학생의 논지와 대지를 바꾸어 보자.
<학생의 설교요지 1>
제목: 약할 때
논지: 약할 때 더욱 강해진다.
1. 약할 때 겸손해 진다.
2. 약할 때 생각이 깊어진다.
3. 약할 때 더욱 기도하게 된다.
4. 약할 때 하나님께 나아와 은혜 받고 강해진다.
평: 이 설교는 복음의 내용이 빠져있다. 얼핏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의 내용대로 따른다고 약한 사람이 강해질수는 없다.
<고쳐본 내용>
제목: 약할 때 강하다 (부정적인 내용은 복음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복음적 제목은 긍정적이어야 한다)
논지: 약할 때 자신 대신 그리스도 하신 일을 의지해 강해진다.(약할 때 더욱 강해진다는 논지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모순의 말이다)
1. 약할 때 그리스도 앞에 서면 겸손해 진다.
2. 약할 때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된다.
3. 약할 때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기도한다.
4. 약할 때 그리스도가 내게 해주신 일을 의지한다.
결론: 그러므로 약한 것이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힘으로 바꾸는 복 받은 상태이며 믿음으로 강하진다.
<학생의 설교요지 2>
재목: 여호와를 구하는 자
논지: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되다
1.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감사한다
2.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찬양한다
3.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겁다
4.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능력있는 삶을 산다
이 요지의 문제는 “복”의 내용을 주지 않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즐겁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설교를 풀어가기가 쉽다. 감사하라고 하지 전에 감사할 내용을 말해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일을 설명해야만 복음적 설교이다.
<고쳐본 내용>
제목: 여호와를 구하는 자
논지: 어효와를 구하는 자는 그가 주신 복의 내용을 구한다
1. 그가 용서하심을 감사한다
2. 그가 은사주심을 찬양한다
3. 영으로 함께 하심을 알기에 즐겁다
4. 함께 행하심을 알기에 능력있는 삶을 산다
<학생의 요지 3>
제목: 예수의 증인
논지: 예수님의 증인에게는 증인으로서 누리는 복이 있다.
1. 예수님의 증인에게는 예수님을 더욱 많이 알게 하신다
2. 예수님의 증인에게는 예수님을 더욱 체험하게 하신다
3. 예수님의 증인에게는 예수님을 증거할 많은 능력을 행케하신다
이 설교도 앞의 것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예수가 주시는 복의 내용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증인이 가지는 능력이나 특권의 내용을 말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요 믿을 것이다.
<고쳐본 요지>
제목: 예수의 증인
논지: 예수의 증인이 일하는 동안 예수는 그와 함께 일하고 계신다
1. 예수에 관해 들은 내용이 확실하게 경험되게 하신다
2. 듣는 이를 감동시키는 예수의 일을 체험하게 하신다
3. 예수의 일을 많이 할수록 그의 능력은 흘러나온다.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예수가 내게 해주신 일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복음 곧 예수가 나를 위해서 하신 일의 내용을 말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더 고쳐보자.
<한 번 더 고쳐본 요지>
제목: 예수의 증인
논지: 예수의 증인은 예수가 해주신 일을 말하는 이다
1. 예수의 죽음이 우리 저주의 죽음임을 선포한다
2. 예수의 사심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주심을 선포한다
3. 예수와 하나됨으로 작은 예수가 됨을 선포한다
4. 이렇게 예수의 일을 할수록 더욱 그를 닮아감을 선포한다
이번에는 다시 복음의 내용을 논지로 삼아서 요지와 본문을 만드는 연습을 해보자. 간단하게 한 것이므로 살을 붙여서 사용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예수께서 내게 해 주신 일이 무엇인지 선포해야 한다는 점이다.
<1단계>
제목: 불멸의 몸
논지: 그리스도와 하나된 신자는 불멸의 몸이다.
1.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모든 시험에서 구하신다.
2. 지체된 신자는 그리스도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3. 그리스도의 지체는 멸망치 않고 영원히 일어난다
<2단계>
도입부문: 인간의 천함.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됨
1. 선인장가시, 옷가지 태우는 예화, 내 몸의 소중함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소중함
2. 그리스도의 죽음의 내 죄와 저주의 죽음, 그의 사심은 우리의 영원한 삶, 한결음 더 나아가 그가 남긴 고난을 신자의 몸에 채운다.
3. 그리스도의 뼈는 꺾이지 않음, 세상왕국의 허무함과 교회의 영원함, 무궁한 생명, 그것의 적용
<3단계>
불멸의 몸
고전 12:12-27
인간은 경우에 따라서 값이 극에서 極으로 매겨진다. 자신이나 가족은 하늘보다도 귀하다. 그 외에는 강아지만큼도 가치가 없다. 중국 천안문 사태 때에는 5천명이 탱크에 깔리고 기관총으로 집단사살을 당했다. 이라크에서도 쿠르드 족은 독가스탄으로 수천수만이 비참하게 희생되었다. 자기가 아니고 자기 가족이 아니라고 파리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보는 사람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그렇게 인간은 서로들 천대하면서 지내지만 결국에는 자신도 지옥에서 영원한 賤待를 받게 된다. 사람들은 나를 무시하고 무관심하고 멸시, 혐오까지 한다.
그러나 단 한 분, 그리스도만은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 그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한 가족이 되게 하고 나를 자신과 똑같이 대해준다. 아니 자신과 똑같이 만들어준다. 이 말은 영적 사실이다. 이 사실을 연구하고 적용할수록 그 내용대로 나의 삶도 만들어진다. 무엇보다 여기 집중해야 한다.
그가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 살고 고난 받고 죽고 부활하고 영으로 우리 속에 들어와 함께 계시는 그 모든 일이 바로 나를 자신과 똑같이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은 이론이나 상상이 아니다. 분명한 현실이요 사실이다. 이 영적 사실을 그대로 받아 믿는 이들에게 복이 있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리스도는 두 방법으로 우리와 한 몸이 되었다. 첫째는 우리 안에 영으로 들어오심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었다. 둘째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그 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가 한 몸이 되게 하셨다. 이 한 몸 됨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이다. 마치 우리 속에 심장과 오장육부가 있듯이 그리스도는 우리 속에 계시다. 또한 몸의 여러 부분이 있듯이 교회원도 각자 하는 일이 있다.
이 한 몸 됨을 깨닫지 못할 때 그리스도의 모든 은사는 우리 밖에 머물러 있다. 자신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 하면서 그와 우리가 한 몸 되었음을 강조하고 계시다. 그와 우리는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는 능력이 넘친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해 지체된 우리를 사랑하신다.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 의식 속에 들어오시는 것이요 성찬은 한 몸됨이 눈에 보이도록 나타난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다.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서 믿어질 때 성령은 강하게 그 말씀대로 일을 하신다. 항상 의식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으며 그와 한 몸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모든 신비한 힘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자 모두 확인해 보라. 내가 그리스도와 정말로 하나 되었는가? 대답해 보라. 내가 손을 들 때 그도 드시고 내가 걸을 때 그도 내속에서 같이 걸으시는가? 이것만 확실하다면 우리는 복된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놀라운 특권을 가지고 살게 된다. 듣고 적용하라.
1.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을 돌보신다 . 손에 선인장 가시가 박혔을 때 눈이 도저히 찾아낼 수 없을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다른 지체는 편히 쉬고 손만 고통 받는 것이 아니다. 온 몸이 함께 고통스러워하며 잠들지 못한다. 우리가 괴로울 때 그리스도 역시 괴로워하신다. 자기 몸의 고통을 원치 않는다.
어떠한 불시험 가운데서도 건져 내신다. 머리털도 타지 않게 하신다. 더러운 옷가지를 사람들은 불에 던진다. 하지만 바보라도 던진 뒤에는 빨리 손을 빼낸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을 불 속에 그냥 남겨두겠는가? 그의 몸 된 신자가 느끼는 확신이다. 현재 일이나 미래 일이나 무엇을 두려워하랴!
그리스도의 몸 중 소중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어느 부분이건 없어서는 안 된다. 손, 발, 보이는 부분, 안 보이는 부분 모두 다 귀하기만하다. 누가 돈을 많이 준다고 내 몸을 한 부분 떼어내 팔겠는가. 절대로 안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 하나쯤 빠져도 되겠지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 될 자격이 없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이 얼마나 고통하며 제 구실을 못하는지 관심이 없어선 안 된다. 아무리 건물이 커도 작은 벽돌 하나라도 빼어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깨닫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긍지로 넘친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를 따른다. 몸이 전쟁터에 나갈 때 손발만 가고 머리는 남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렇게 따로 따로 논다면 죽은 사람이다. 언제나 그 몸은 머리의 명령을 따라서 움직인다. 발이 가는대로 온 몸이 같이 움직인다. 그리스도는 신자의 머리요 교회의 머리이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서 더러운 장소에 있을 수 없다. 또한 악한 일을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일을 한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그리스도처럼 살며 그리스도처럼 사랑한다. 그리스도가 이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지체는 그리스도의 경험을 나눈다. 몸의 한 부분이 영광을 받을 때 다른 부분도 그러하다. 몸의 한 부분이 저주를 받을 때 다른 부분도 역시 저주 속에 있다. 머리가 죽으면 온 몸이 다 죽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경험을 그대로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 양보하지 않고 주장한다,
그의 죽음은 지체인 우리가 죽은 것이요 그가 저주와 형벌을 당함은 지체인 우리가 당한 것이다. 믿으면 죄의 무서운 벌로부터 제외된다. 이미 죄의 모든 대가를 완전히 지불했다. 그뿐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지체 곧 우리가 부활한 것이다. 그가 사탄의 본거지요 저주의 본부인 죽음을 파괴한 것은 곧 그의 지체인 우리가 한 것이다. 믿음으로 주장해 능력을 얻으라.
사망의 쏘는 힘은 우리를 떠났다. 율법의 권세도 그쳤다. 그의 부활은 자기의 지체 속에 영원한 생명을 넣은 것이다. 그 생명이 내 속에서 넘쳐나온다. 그것은 기쁨이요 평안이요 건강이요 창조력의 충만이다. 그리스도와 상관 없는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체된 나를 본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음으로 끝까지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믿음이 나의 삶 전체를 주관한다.
그리스도의 지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 남은 고난이 무엇인가? 복음 전하기 위해 어려움 당하는 것이다. 이 일은 신자들의 몫으로 주어졌다.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았다. 우리는 교회의 일원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 일을 위해서 고난을 자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일이 신자들 자신의 힘으로만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 교회에 권세를 주고 신자 개개인에게 놀라운 경험을 하도록 하신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은 참된 기쁨을 맛보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신자들을 통해서 말하고 사랑하고 복음 전하게 한다.
3. 그리스도의 지체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 . 유월절 양은 뼈를 꺾지 않는다.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뼈가 상하지 않았다. 옆의 강도들은 다리뼈를 꺾어 죽였다. 그러나 뼈는 권능을 의미하기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뼈를 꺾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몸은 절대로 꺾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위대한 인물들과 나라들이 일어나고 망했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았다. 지하에서도 감옥에서도 꾸준히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리스도의 지체,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혹시 핍박받고 멸시와 천대가 있다 해도 그리스도의 몸은 망하지 않는다. 영원하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전도도 많이 하지만 결국은 그리스도를 배반한다. 그의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갑은 손과 꼭 같이 몸을 위해서 일하지만 마지막에는 불에 던져지고 만다. 그리스도의 의복은 수십 년을 함께 다니며 몸을 보호했지만 끝에는 찢겨 원수들의 손에 들어갔다. 가룟 유다도 그리스도와 권능을 행했지만 급기야는 마귀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찢겨 그리스도에 붙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고 믿는 이들은 영원히 그와 하나이다. 아무리 상하는 것 같아도 다시 일어나고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서 영광스럽게 피어오른다. 마치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처럼 지옥의 저주라도 밟고 다시 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근원이 하나님이듯 우리의 근원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낳았다. 우리는 그의 확실한 자녀요 가족이다.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 되어 그리스도로 아버지를 만나고 있다. 기도할 때도 역시 우리는 그리스도로 필요한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웃을 만날 때도 일을 할 때도 우리는 그리스도로서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대하신다. 그리스도처럼 귀히 여기시고 모든 특권을 주신다. 우리의 복종과 헌신이 아주 적은 것이라도 그리스도의 분량만큼이나 완전한 것으로 받아 주신다. 그리고 영원한 기업을 상으로 주신다.
그리스도의 몸 된 확신을 날마다 시간마다 새롭게 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보화를 내가 공유하고 있음을 믿으라. 그러면 그의 피가 내 속에 용솟음치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살이 내 육체를 강하게 하고 그의 마음이 내 얼굴을 빛나게 한다. 그리스도는 나를 통해서 지상의 삶을 계속하신다.
내 안에는 그의 생명이 있다. 그의 마음과 꿈 그리고 사랑이 넘쳐난다. 나는 이것을 느끼지 않고 믿으리라. 느끼기 전에 먼저 믿으리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처럼 어둔 세상을 비취고 그리스도처럼 새 세계를 창조하리라! 세상 사람들이 어디서 그리스도를 만나랴? 바로 나를 통해서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