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이라도
2002-05-31 23:46:56



- 성경구절 : 요한 21:15-17
- 설 교 자 : 주승중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셨을 때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 바로 3년 전에 베드로는 꿈을 가지고 갈릴리 바다를 떠났습니다. 평생을 잔뼈가 굵은 곳, 삶의 터전으로 살았던 그 정든 바다를 뒤에 두고 베드로는 3년 전에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자기의 분신과도 같았던 배를 버리고 그렇게도 손에 익숙하던 그물도 버리고 사랑하는 부모와 고향을 뒤로한 채, 베드로는 커다란 꿈을 가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믿고 따랐던 스승 예수가 맥없이 십자가에서 죽어갈 때, 그의 꿈은 마치 유리병이 깨지듯이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그는 이제 새로운 살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허탈과 좌절과 실의에 빠진 그가 이제 다시 새로운 삶을 출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졌고, 결국 그는 자신의 잔뼈가 굵은 갈릴리 바다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3년 이상이나 손 놓았던 그물을 다시 손에 잡게 되었을 때에, 그물이 손에 제대로 잡힐 리가 없었습니다. 그 날 따라 갈릴리 바다의 고기들마저도 그의 실패를 비웃고 조롱이라도 하는 듯 한 마리도 그물에 걸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깊은 실의와 탄식 가운데 빠져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지쳐있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위하여 숯불을 지피시고 고기를 구워서 초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때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유명한 말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그 동안 여러 번에 걸쳐서 자기가 다른 제자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또 실제로 베드로는 주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을 하며, 주님께 충성을 맹세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원수의 무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한 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내리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다른 제자들이 다 무서워 도망쳤을 때에도 홀로 가야바의 법정까지 따라 들어갔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거기서, 그렇게도 사랑하던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야 말았습니다. 아니 주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였지요. 그리고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귓전을 때리는 순간, 처절한 패배감에 떨어야 했던 베드로는, 그 길로 가야바의 법정을 뛰어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심히 통곡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눅 22:62) 그 이후로 베드로는 정신없이 어떻게 지냈는지 모릅니다. 실패감, 자괴감, 후회, 수치스러움, 이 모든 것들이 그로 하여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미 두 번씩이나 그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러웠던 그는, 너무나도 부끄러웠던 그는,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가 없어 갈릴리 바다로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거기까지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유명한 질문을 베드로에게 던지셨습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도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예수님께서 하신 세 번의 질문들을 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로 번역을 하였고,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대답도 다 “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원문에는, 주님께서 하신 첫 번째, 두 번째 질문과 세 번째 질문에서 사용하신 “사랑”이라는 단어가 다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헬라 말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여럿 있습니다. 이성간의 사랑, 남녀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 쓰는 “에로스”와, 친구간의 사랑 즉, 친구간에 주고받는 우정을 말하는 “스톨게”, 그리고 가장 높고 고귀한 희생적인 사랑을 말하는 “아가페”가 있습니다.

자,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을 하실 때, 바로 이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즉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너는 나를 이 아가페의 사랑, 나를 위하여 네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괴로웠습니다. 이전 같으면, “네, 주님, 제 목숨뿐이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라면 저의 모든 것 다 바쳐 사랑을 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런 무모한 대답을 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앞서도 소개했듯이 그는 지금까지 여러 번에 걸쳐서 얼마나 큰 소리를 치고 장담을 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큰소리를 하나도 지키지 못했고, 오히려 주님을 저주하며 세 번씩이나 부인을 했습니다. 결국 이제 그는 감히 “네, 주님, 제가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두 번 다 대답하기를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어찌 주님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을 필리아의 사랑으로 밖에 사랑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요약하자면 주님은 첫 두 번의 질문을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지만, 베드로는 두 번 다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으로서가 아니라, 필리아의 사랑,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제 세 번째 질문을 하시는데, “필레이스 메?”라고 물으셨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세 번째 질문에서는 “아가페”라는 단어 대신에 “필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여전히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이 작은 사랑, 인간적인 사랑,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좀 더 자세히 묵상하는 가운데, 이 대화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귀한 메시지를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질문 속에 나타난 주님의 음성을 들어 봅시다. 첫번째 질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아가파스 메 플레온 투톤)?” 고 물어보시되,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첫 번째 질문은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시면서,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이 사람들보다 더”라는 비교급을 쓰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사람들보다(플레온 투톤)”라고 번역된 말은 사실은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말입니다. 하나는 “투톤”을 사물로 해석하여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배와 그물과 장비와 잡은 고기 등을 가리키면서 “시몬아, 네가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투톤”을 오늘 우리 개역 성경처럼 “사람들”이라고 해석하여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원문에 의하면 이 두 가지 번역은 다 가능한 번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들 가운데 어떤 해석을 택하든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는 비교급을 사용하시어, 최상급의 사랑을 요구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 질문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배와 그물과 장비와 잡은 고기 등, 이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가? 또는 지금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던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결국 이 질문은 지금 예수님께서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질문입니다. 아가페의 희생적인 사랑 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나를 제일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느 누구보다도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최상급의 사랑을 요구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랑을 받을 때에 어떤 사랑을 원합니까? 우리는 항상 최고의 사랑을 받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항상 최상급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를 사랑하거나, 내가 사랑하는 이로부터 사랑을 받기를 원할 때에, 두 번째 가는 사랑, 차선의 사랑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그를 최고로 여기고, 사랑하듯이, 그(녀)가 나를 최고로 여기고, 나만을 사랑해 주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모습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이 첫 번째 질문은 바로 그 최상급의 사랑을 말씀하심입니다. 이 모든 것들 가운데서,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최고로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최고의 사랑을 가지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랑을 가지고,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당황했습니다. 이전에는 당장 “네”하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하지 못하였고, 그것도 그 분을 저주하면서 부인하였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손에는 과거 그의 삶을 보여주는 그물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겨우 대답합니다. “오, 주님,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주님을 아가페의 사랑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제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도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이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 부족하지만 저는 여전히 주님을 사랑합니다. 만일 주님께서 저의 필리아의 사랑, 형제를 돌보아주며 사랑하는 정도의 그 부족한 사랑이라도 받아 주신다면, 제가 주님을 그 사랑으로라도 사랑합니다”

이런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또 다시 같은 말로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데 여기 16절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똑 같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으나, “보다 더”라는 비교급은 빼신 채 물으셨습니다. 즉 첫 번째 질문에서는 비교급을 통하여 최상급의 사랑을 요구하셨으나, 베드로가 힘없이 “아닙니다. 주님. 제가 어찌 감히 아가페의 사랑으로, 그것도 무엇보다도, 어느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저 제가 친구를 사랑하는 정도, 형제를 사랑하는 정도로 사랑할 수 있을 뿐임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하였을 때, 이제 주님께서는 비교급을 통한 최상의 사랑에서 한 보 양보하셔서, 그러면 “네가 그냥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베드로는 이전과는 달리 진실되게 대답을 합니다. “주님, 제가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못함을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오니, 제가 주님을 친구의 사랑 정도로는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이제 세 번째 주님의 질문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필레이스 메?” 즉, 주님께서 이번에는 “베드로야, 그러면 너는 그 필리아의 사랑, 즉 친구의 사랑, 형제의 사랑으로라도 나를 진정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세 번째 질문은 ‘그래 시몬아, 실망하고 부끄러워할 것 없다. 비록 네가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도망을 쳤으나, 이제라도 네가 나를 작은 사랑으로라도 사랑하겠느냐? 나는 그러한 작은 사랑, 인간적인 사랑, 친구간에 사랑하는 사랑이라도 원한단다. 너는 그런 작은 사랑, 인간적인 사랑으로라도 나를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은총으로 양보하고 또 양보하셔서 시몬의 차원으로까지 내려오셨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는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진실해진 베드로가 “주님, 제가 어찌 감히 그 최상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인간적인 사랑, 필리아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자, 두 번째는 비교급을 없애고 그냥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양보하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도 베드로는 감히 아가페의 사랑을 언급할 수 없어, 있는 그대로 다시 고백합니다.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이제 주님께서는 양보하시고, 또 양보하시어, “그래, 베드로야. 그렇다면 네가 진정 그 필리아의 사랑으로라도 나를 사랑하니? 그러면 그 사랑을 나에게 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제 베드로는 감격스럽게 대답을 합니다. “오, 주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주님께서 이 작은 인간적인 사랑이라도 좋으시다면, 저는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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