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2002-05-31 18:58:46





사도행전15:22-35


신앙생활하면서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 석연치 않은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의 분열상입니다. 캐토릭과 개신교의 분열은 물론 개신교안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제가 목사이지만 감리교를 제외하고는 도대체 종파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지를 못합니다. 제가 다른 교단을 비난할 의도는 추호도 없지만 어떤 교단은 도대체 같은 이름가진 교단이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같은 교단의 한 교회 안에서도 분열의 아픔이 있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교회가 하나 더 생긴다고 좋아할 지 모르겠지만 한교회가 두 교회로 나뉘어지는 아픔도 많습니다. 좋은 의미로 분가(分家)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분열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보면 극복 못할 것도 없습니다. 모두다 교역자와 성도들이 자기 아집과 이익에만 사로잡힌 탓 아닙니까? 이교단, 저 교단이 믿는 하나님, 이 교회와 갈라져 나간 교회가 믿는 예수님이 각각 다른 분이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이 분열의 모습은 선교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은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불신자들에게 심어줌으로써 전도에 악영향을 가져오게 됩니다.

"너희끼리 머리 터지게 싸우면서 우리보고 믿으라 하느냐? 싸움구경이나 하라고?"



성도 여러분.

교회 내의 일치, 교회와 교회와의 일치, 교단간의 일치는 선교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초대교회는 그러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간에 분열의 위기가 있었지만 슬기롭게 극복하여 '하나의 교회'가 되는 전통을 이미 우리에게 전해 주었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본문은 사도행전 15장의 제1회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론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은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단지 야고보 사도의 권면대로 29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먹는 것은 조심하도록 당부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23절 "그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에서부터 29절에 하였더라 바로 앞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까지는 야고보가 쓴 편지 내용입니다. 편지를 누구에게 보냈습니까? 23절에 보면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보냈습니다. 누구 편에 이 편지를 보냈습니까? 25-27절을 살펴보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유다와 실라를 통해 보냈습니다. 콩나물 사러 보내는 사람과 약국에 약 사러 심부름 보내는 사람이 다르지요?중요한 임무일수록 신뢰받는 사람에게 맡기지요.



편지와 사람을 함께 보냈다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편지만 보냈다면 어찌되었을까요? 글로 쓴다는 것은 분명하기는 합니다. 글로 쓰여진 것은 후에 딴소리를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10%, 어떤 사람은 50%밖에 표현할수 없다고 합니다. 만일 편지 없이 사람만 보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말이란 한사람 건널때마다 내용이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사람 일렬로 세워놓고 말 전하기 하면 끝이 많이 달라지지요? 그러므로 편지(글)와 함께 사람을 같이 보낸다는 것은 당시로 서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었습니다.



안디옥에 가서 편지를 전했더니 듣고 기뻐했습니다. 유다와 실라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교회에서 열심히 말씀가르치고 전파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이러한 내용 속에서 몇가지 문제해결의 원칙을 찾아보면서 교훈과 신앙생활의 방향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일치가결했습니다.

"25-26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一致)가결(可決)하였노라"



15장 전체를 보면 회의 모습과 내용이 있습니다. 7절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변론도 많았습니다. 베드로의 이야기,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도 있었고 야고보의 권면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 단순한 ○. × 형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대단한 논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일치가결하였노라"했습니다. 이 회의 오래했을 것입니다. 오래하다 보니까 큰 소리도 있었을 것이고 이런 저런 의견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일치가결하였노라"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일치가결을 위해서는 상반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한 발작씩 물러섰다는 것입니다.

한쪽 주장만 받아들여진다면 반대쪽에서 일치가결해 주겠습니까? 100%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사람이 있다면 일치가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일치가결을 위해서는 한발자국씩 물러서야 합니다. 나라고 가정이고 사회고 하나가 되려면 서로가 양보해야 합니다. 양보하는 사람을 우리는 '모자르다' '바보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의도 사람들이 들어야 합니다.



또 하나 '일치가결하였노라' 이 이야기 뒤에는 회의 결과에 대하여 모두 승복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끝난 결과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반대해서 일이 그리되었다든지 두고 보자든지 말이 많으면 문제입니다. 회의과정에서는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과에는 모두 승복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기획위원회를 제가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점입니다. 회의과정에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을 수 있지만 결정된 다음에는 뒷소리가 없어요. 뒷소리 많으면 잘못된 것, 평균이하의 집단입니다. 교회건축하면서 무리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충분한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결정된 것은 승복하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치가결의 결정'은 단순한 인간생각의 반영이 아니었습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성령과 우리는"이란 말씀이 중요합니다. 일치가결한 것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일치가결했다는 말씀입니다. 동의하고 합의하는데 있어서 열심히 함께 기도했고, 성령께서 함께 하셨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뜻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개인의 주장이나 의견이 앞서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심이 되어야지 목회자나 성도의 뜻을 펴는 곳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배워야겠지요? 일치가결을 위해서는 양보도 있어야 합니다. 일치가결된 뒤에는 뒷소리도 없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도 일치가결은 성령과 함께 되어져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면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순복시키는 신앙적 결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내 뜻을 이루기 위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한 곳이 아닙니까? 깊이 유념하시고 그대로 행하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2.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29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29절 후반절 참 중요한 귀절이 있습니다.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앞서 네 가지 멀리 할 것을 말했습니다.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 그런데 이 네 가지에 대하여 스스로 삼가하면 잘하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합니다.



1) 자발적으로 잘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명령을/말씀을 지킬 때 - 안지키면 벌 받을까봐 벌벌 떨면서 억지로 지키지 말고 자발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참 잘 지켰습니다. 왜 지켰습니까? 복받으려고 지켰습니다. 지켰다고 자랑했습니다. 못지키는 사람을 비난했습니다. 혹시라도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 경우에는 벌 받을까봐 벌벌 떨었습니다. 예수님은 뭐라 하셨습니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냐? 사람이 안식을 위하여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사람에게 안식일을 주셨을까요? 안식일 지키지 않는 사람을 벌 주시려구요? 아니지요? 안식일에 편히 쉬고, 피곤한 영혼이 소생함을 받고 새로운 용기를 얻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게 하시려고 사람을 위해,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감사함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안지키면 벌 받을까봐 지키고, 주일 지키지 않아서 감기가 걸렸네 하는 식으로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도 하나님이 주신 것 감사해서 기쁨으로 드리는 것이지 '십일조 안하면 사업 망할 것이다- 겁이 나서 드리는 식으로 지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알려진 죤 와나메이커(J.Wanamaker)는 후에 체신부 장관까지 했습니다. 체신부 장관 수락의 조건은 주일에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교사를 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봉사하는 것이 내 본업이고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일하는 것이 부업이다" 사업시작 60년만에 기념하는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성공비결이 무엇입니까?" 와나메이커는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바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법을 지키지 않으면 벌 받을까봐 겁나서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법도대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2)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율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때로 주일아침 눈을 뜨면 토요일이 아니라 주일이라서 더 부담스럽게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예배 드리면서 설교시간이 길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주일 예배 빠지면 한 주일의 생활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같아 가슴이 불안하고 답답해 질 때도 있지 않습니까? 주일예배가 한 달에 한번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이런 경우는 다 율법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은혜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이 기다려져요. 설교가 기다려져요. 성전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열려요. 무슨 말씀을 들어도 내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들으니 신이 나고 기쁘기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

남편이니까 내가 말 듣지 남편만 아니라면 쳐다보기나 하겠느냐고 생각하며 사는 아내는 불행합니다. 사랑하니까 주고 싶고 사랑하니까 위해 주는 것이지 남편이기 때문에 위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백성이 되었으면 은혜로 사셔야 합니다. 율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배에 참석해도 성경을 읽어도 봉사를 해도, 찬양을 해도, 하나님께 감사해서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해야 -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도 감사해서,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 성숙한 것이지 축복받으려는 조건으로 드린다면 축복이야 해주시겠지만 하나님께 흥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감사의 대상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우상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되 그런데 율법처럼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기뻐함으로 행하면 잘 될 것이라고 평안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율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사시기 바랍니다. 해야 되기 때문에 주일이기 때문에 예배드리고, 장로, 권사, 집사이기 때문에 봉사하고, 하라고 하니까 하는 피곤하고 부담스러운 신앙생활에서 생각해 보니까 하나니 은혜가 너무너무 감사해서 감격 속에 예배드리고 뜨거운 기쁨으로 봉사하고 더 드리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헌금드리고 - 이것이 은혜 속에 사는 모습입니다.



오늘 제3차 건축헌금에 대한 광고가 게재되었습니다. 어쩌면 1,2차 헌금도 완납하지 못한 성도들에게는 또 하나의 부담이 되기도 하겠지만, 요즘 제 마음 속에 목사로서 참 무거운 것이 있는데 바로 건축헌금에 관한 것입니다. 건축하면서 평소에 건축헌금 얘기하지 않아도 성도들이 힘껏 해 주니 저는 감사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건축이 마무리되어져 가니까 또 헌금이 필요합니다. 다음 주에 자세한 건축현황에 대한 보고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만 하여간 헌금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헌금하는 자세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의무감에서 하는 것입니다. 성전건축하는데 나도 당연히 이만큼의 헌금은 해야 한다. - 이런 마음으로 하는 경우입니다. 안하는 것보다는 귀하지만 자세로서는 좀 모자랍니다. 하나는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성전건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 하나님 축복해 주시면 헌금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주신 하나님 은혜가 너무 커요. 받은바 은혜가 넘쳐요. 그러니까 바치고 싶어요. 많이 바치고 싶어요. 더 바치고 싶어요 - 이것이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전건축헌금도 은혜로 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는 넘치는 겁니다. 한 식구 한 구좌하라 그러면 꼭 한 구좌만 합니다. 한 가족이 넷이니까 네 구좌 만 합니다. 이건 율법입니다. 은혜는 넘치는 겁니다.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율적으로 은혜로 살라는 말씀 우리 마음에도 새기십시다.



3. 합력하는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35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머물면서 일했는데 두 가지 우리가 관심을 가져봅니다.



하나는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함께 일하는 "다수의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이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일할 수 있을 정도의 소양이 있고 훈련이 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다양한 일군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다양한 재주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세우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진정한 일군입니다. 교회는 목회자가 잘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반드시 꼭 있게 마련입니다. 목회자가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목회자라서 교회 일하기에 좋은 점도 많지만 그러나 목회자이기에 성도들과 갖는 벽과 거리감도 있습니다. 정말 좋은 교회는, 성숙한 교회는 구경꾼이 있는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 모두가 자기 역할을 찾아 스스로 감당하는 교회가 성숙한 교회, 좋은 교회입니다.



특별히 좋은 일군은 합력할 줄 아는 일군입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서는 잘하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면 갈등을 일으키거나, 경쟁적으로 다툼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한 몸의 많은 지체'라는 성경말씀을 아시지요? 손, 발, 입, 귀가 서로서로 제구실을 다하고 서로서로 세워주면 되는데 그게 안됩니다. 문제가 많지요. 손, 발, 입, 귀가 따로따로 놀면 넘어집니다. 다칩니다. 장애자가 됩니다. 신앙정도도 다르고, 성품도 다르고, 은사가 다르다 하더라도 함께 일 잘하는 사람이 좋은 일군이 아니겠습니까?



안디옥에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일하는 '다수의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는 될 수밖에 없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함께 일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목회자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많은 일할 수 있는 성도들에게 할 일을 찾아주어 함께 일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장로님들 - 일대일 양육지도자반을 많이 신청하세요. 장로님으로서 새 신자 신앙생활을 위해 양육하는 것보다 보람있는 일 있겟어요?) 목회자와 협력하여 일하는 일군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권사님 이 일 좀 해 주세요' '장로님 이 일 좀 부탁합니다' '집사님 이 일 합시다'할 때 '예' '아멘'만 있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는 되는 교회요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모르면 부족하면 배워서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요 교회 밖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는 하지만 그러나 체계적인 공부도 꼭 필요합니다. 지금 세례교육에서도 꼭 필요한 것 배웁니다. 일대일 양육, 중보기도 학교, 은사교육, 단기성경공부 등 기회있을 때마다 배워야 합니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공부와 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교회성장과 함께 꼭 필요한 것이 교육과 훈련입니다. 군인이 많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중에 땀 한방울이 전쟁터에서 피한방울과 같다고 말합니다. 훈련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라 하지 않았습니까? 군사가 훈련받지 않으면 용맹스럽게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적 그리스도와 싸워야 하고 세상유혹과 싸워야 하는데 이기기 위해 훈련받아야 지요. 안디옥 교회는 교육과 훈련에 열심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의 성도들은 기회있을 때마다 열심히 배우고 훈련받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부지런하게 불신자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특정기간-총동원전도 주일에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도 믿지 않는 식구들에게, 믿지 않는 친지들에게, 직장동료들에게, 이웃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전도해야 내 신앙도 자라고 교회도 성장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가르치며 전하는 많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있었기에 교회도 안정되어 성장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춘천중앙교회도 '다수의 다른 사람들'-일군이 많은 교회여야 합니다. 목회자가 여러분에게 찾아가 ' 이 일 좀 해 주시겠습니까?' 할 때 거절하지 마시고 더 적극적으로 말씀드리면 기다리지 마세요. '목사님 일거리 좀 주세요,' 적극적이 되세요. 특별히 다른 교회 다닐 때는 일 잘 하다가 가만히 쉬면서 구경만 하는 성도들, 너무 쉬면 근육 무기력증이 생겨 굳어 버립니다. 일하세요. 전도하세요. 봉사하세요. 양육하세요. 안디옥 교회 이야기가 아니라 춘천중앙교회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정리>

● 초대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회의를 통해 일치가결했습니다. 양보도 할 줄 알아야지요. 하나가 되는 것 - 양보 없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인간적인 양보만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심 속에서 결정되었습니다.

● 신앙생활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예배도, 봉사도, 헌금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로(아멘) 감사해서(아멘)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 교회는 교역자와 함께 가르치고 전하는 다수의 일군이 있어야 합니다.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회있을 때 열심히 훈련받으세요. 쓰임 받는 기쁨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전하세요. 복음을 전하세요. 새 천년 새 성전에서 아름다운 교회 거듭나기 위해 기도하면서 은혜로 가르치고 전하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성도가 되기 위해 땀흘려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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