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 2002-05-21 14:35:36 성경구절 히브리서 11:13~16 설교날짜 2002/02/10 월요일부터 3일 동안 설날 연휴가 시작됩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벌써 토요일 부터 연휴는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날은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고향을 찾아 일가친척들과 함께 만남의 기쁨과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설날은 그래서 민족대축제라고도 합니다. '설' 또는 '설날'을 가리키는 한자어는 무척 많습니다. "정초(正初), 세수(歲 首), 세시(歲時), 세초(歲初), 신정(新正), 연두(年頭), 연수(年首), 연시(年 始)" 등이 그것입니다. 어릴 때 이야기지만 설날을 맞아 세뱃돈을 누가 더 많이 받았느냐 하는 것으 로 자기를 과시했던 즐거운 추억도 있습니다. 차례는 떡국으로 지내는데 떡국을 먹었다는 것은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의 미가 됩니다. 또한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자치기, 제기차기 등 의 놀이를 즐깁니다. 이와 같은 설날은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이 많지만 그렇다 고 우리나라의 긴 역사 속에서 문화가 되어버린 고유 명절을 계속해서 터부할 수 만은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오히려 보다 유익하고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위 한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즉 건강한 가정문화는 부모와 자녀관계를 성숙시킨다는 점에서 본다면 설날을 굳이 나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 정립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설날의 세배문화를 기독교적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는데 요셉이 자녀들 을 데리고 야곱에게로 와서 축복 기도를 받았던 것을 상기하며, 세뱃돈을 주는 것보다는 축복 기도를 해 줄 수 있는 설 문화로 바꾸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뱃돈을 줄 수 있다면 예쁜 봉투를 준비해서 성구를 적어 돈에 관심 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된 말씀에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바람직한 설문화 의 하나로 바꾸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제사 문제로 인해 가족들 간에 대립하 고 경원시 하는 것인데 이런 명절기간에 오히려 더 극진히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기독교적 효도의 의미를 제사의 의미보다 더 강하게 연출할 수 있는 것도 설문화의 보다 더 좋은 변화의 방법이 되는 것입 니다. 물론 전 가족이 신앙으로 하나된 가정에서는 예배를 통한 감격과 가정의 소중 함을 경험할 수 있는 더 없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전 가족이 기독교인이지 못한 짝 믿음 가정에서는 예수를 믿는 가족이 불신 가족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설날을 통해 그 담을 헐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하며, 구체적인 내용의 하나로 형제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담아 선물을 보 내고 받음으로 가족 개념을 굳건히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이런 설날을 맞아 고향을 찾아 민족 대이동이라 불려지는 3천만 백성의 대이동 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우리는 가슴이 설렙니다. 누나와 장독대 뒤에서 소꿉장난하던 일. 친구들과 딱지치기, 자치기, 땅따먹 기, 팽이 돌리기, 연날리기는 어른이 되어도 잊혀지지 않는 고향의 정취입니다. 눈 내린 언덕에 비료 포대를 움켜쥐고 미끄럼을 타던 일, 수박 서리, 콩서리 를 하다가 주인에게 들켜 36계 줄행랑을 놓고 밤이 되면 혹시 주인이 잡으러 오 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던 일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 소먹이 풀 베러 가기 싫어 거짓말로 아프다고 아랫목에 이불 뒤 집어쓰고 드러누우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대신 지게를 지고 풀 베러 가신 아버 지에 대한 기억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입니다. 소먹이러 산골로 들어가 산골 입구에서 소를 산골로 몰아넣고 책을 읽으면서 시를 읊었던 것도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그래서 이원수 선생님이 작사하고 홍난파 선생님이 작곡하신 고향의 봄은 불러 도 불러도 싫지 않은 가곡입니다. 1.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고향 가는 사람들!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얼굴에 기쁨과 감격으로 출렁 이지만 어떤 이유로든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쓸쓸함과 외로움이 서려지게 됩니다. 오늘 분문 14절 말씀은 설날을 맞아 고향을 찾는 인간의 본성을 잘 나타낸 말 씀입니다.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그리고 이같이 본향을 찾는 사람들은 13절 말씀을 보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나그네 인생임을 고백했고, 15절과 16절에서는 더 나은 본향을 이야기하 고 있습니다. 나그네 인생 13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 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우리 인생을 나그네라고 표현한 것은 아주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이후의 생활은 나그네 인생길이었으며, 본향에 이르기까지는 외국인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여기의 외국인은 '크세노이'(xevnoi)로서 언어, 풍습, 습관, 가치관 등 모든 것이 본국 사람과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본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현재 여기의 사람들과 근본을 달리하고 있 다는 의미입니다. 또 '나그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파레피데모스' (parepivdhmo")로서 헬 라어에서는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그네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목적지가 있는 나그네가 있고 목적지가 없는 나그네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러나 목적 없 는 나그네가 아니고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임시로 살아가는 나그 네입니다. 그러기에 야곱이 창세기 47:9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이 130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역대기상 29:15절 말씀입니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 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베드로전서 1:17절 말씀입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 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이와 같이 나그네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 야 하는가?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나그네 인생을 어 떻게 행보해야 하는지를 잘 성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름이 열거되는데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초대교회 성도들까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본향을 사모하면서 나그네 인생을 믿음으로 살았다 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나그네 인생을 알았기에 본향을 향하여 나그네로서의 삶을 더 럽고 추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연주자가 되어서 그들의 나그네 인생 길을 연주해 주셨기에 최고의 믿음의 삶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악기라도 훌륭한 연주자에 의하여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 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나를 연주하실 때 나는 최고의 인생의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 있는 나그네의 삶입니다. 본향을 찾는 사람들 14절 말씀입니다.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같이 말하는 자들'이란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의미합니 다. '본향'이란 말은 '파트리다'(patrivda)인데 이 말은 '선조의 당' 곧 고향을 의 미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선조들이 바라보고 나아갔던 하나님의 나라였습니 다. 즉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는 이 세상이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가 본향임을 깨달아 살았습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아무리 아름답지 못한 추억이 있을지라도 고향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고향에 가는 사람이 있고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 니다. 고향으로 가는 사람은 그 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일상 생활의 모든 것을 훌훌 벗고 설렘으로 고향을 찾지만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은 슬픔과 외로움 으로 가득찬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하늘 나라 본향으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나그네 인생을 살아야 즐겁고 감격으로 본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영원한 본향 하늘 나라를 찾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합니까? 14절, 15절에서 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본향을 향해 나아갔습니까? 단 하나 약속을 믿고 그 믿음으로 나그네 인생 길을 걸어 본향을 향해 나아갔 습니다. 오늘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본향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들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머물 사람들이 아니기에 세상이 전부인 양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근본을 달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고, 권력을 좋아하 고, 명예를 좋아하고, 세상의 것을 좋아하지만 본향을 생각하는 성도는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섬기고 베풀고 덕을 행하며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갑니 다. 힘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을 위해 자기 힘을 사용하면 서 살아갑니다. 육신의 소욕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본향을 찾을 때 부끄럽지 않을 의 와 진리로 살아갑니다.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며 잠시 받는 환 난을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음을 알기에 기쁨으로 고난을 이겨내면서 살 아갑니다. 가인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벨처럼 살다가 순교하는 삶이 본향을 향해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내가 죽고 주님이 사는 삶이 본향을 향해 가는 성도의 삶이지만 내가 살고 주 님이 또 죽어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본향을 생각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 나라로 올라간 에 녹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시는 삶의 축복을 생각합니다. 심판이 있을 줄 알고 조롱을 받으면서도 방주를 지었던 노아를 통하여서는 준 비하는 신앙생활을 배우게 됩니다. 갈 바를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그네 인생길을 걸었던 아브라함을 통하여 우리는 믿음의 위대함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도 분토처럼 버리고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나그네 인생길을 걸었던 바울을 통하여 진정한 성도의 헌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선진들은 악기에 비유하면 명기(名器)들이었습니다. 그 명기를 누가 연주했는가? 하나님이 연주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하나 같이 인생의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입니 다. 그 삶은 하나님이 연주하시는 명악기(名樂器)의 소리를 내는 삶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 '펠릭스 멘델스존'이 유럽의 어느 한 성당을 찾아 아 주 좋은 파이프 오르간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사찰이 놀라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앉느냐고 대노했을 때 "나는 이 오르간 을 조금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의 그 소리가 하도 유명하다 고 해서 나의 여행길을 바꾸어서 이리로 왔습니다. 제 이름은 펠릭스 멘델스존입 니다."라고 소개했을 때 그 이름을 듣고 놀란 사찰이 사제관에 연락을 했을 때 사제관의 신부와 수녀들이 성당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왔을 때 는 이미 성당 안에서는 천국의 청아한 음성이 그 성당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습니 다. 훌륭한 오르간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소리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일생을 주님이 연주해 주신다면 나를 통하여 발하는 삶의 소리 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 나은 본향 16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 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고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더 나은 본향이 있다 고 했습니다. 그것이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이라는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 그 본향에 가기 위하여 오늘도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곳은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은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은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그것은 통곡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은 아픔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이 우리 성도가 갈 더 나은 본향입니다. 그곳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믿으며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서 영원히 살 곳입니다. 설 명절을 맞아 고향에 가는 사람들! 더 나은 본향을 향해 가는 삶을 잊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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