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 자마다
2002-05-03 17:50:45




요한일서 5:1-5



오늘은 요한일서 5장 1절에서 5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자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 5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라는 말씀을 그대로 제목을 정하여 "예수를 믿는 자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1장 12절을 통하여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라고 하여 믿음과 영접함을 같은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곧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내가 나의 주인입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대로 합니다. 나의 멋대로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게 됩니다. 내 주장이 아닌 예수님의 주장이요,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처녀와 총각 시절의 생활과 결혼 한 후의 생활은 달라져야 합니다. 총각으로 있을 때에야 10시에 일어나든, 12시에 일어나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처녀로 있을 때에야 밤 12시에 들어온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주인이 없기에 제멋대로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보호자요, 절대로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이 없어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처녀가 어느 총각을 만나서 남편으로 영접을 하게 됩니다. 총각은 아가씨를 만나 아내로 영접을 하게 됩니다. 또 그 다음부터는 생활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처녀 적에는 밤 12시에 들어와도 괜찮았지만 결혼한 여자가 밤 12시에 들어올 수 있습니까? 총각 적에는 10시, 12시에 일어나도 되었지만 결혼한 남자가 10시에 일어나고, 12시에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생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전혀 생활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달라지지 않으면 그 결혼은 파탄이 납니다. 우리가 내 멋대로 살 때의 생활과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했을 때의 생활은 전혀 달라져야 합니다. 달라지지 않는 생활이라면 우리의 믿음은 파탄이 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제목을 "예수를 믿는 자마다"라고 정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예수를 믿는 자는 어떻게 되며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1상-)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영접하기 이전에는 본래 죄의 종이었습니다(롬 6:17). 그리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엡 2:3). 우리는 죄의 종이요, 마귀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영접하고 난 다음에 의의 종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완전히 신분이 뒤바뀌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첫째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통하여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자녀론을 말했습니다.
이 말씀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들이 되었으면 되었지 뭘 또 성령을 주어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느냐는 말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아들이 되는데 아들인고로 성령을 주셨다니 이상하지 않느냐? 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진리입니다.
예를 들면 김창인 목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너는 내 아들이라'고 선택을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입니다. 누구와 의논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김창인 목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선택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히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루 아침에 태어났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어머니 태중에 임신이 되는데 처음에는 뭐가 뭔지도 분간할 수 없는 존재로 잉태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 후에 열 달이 되어 해산을 하고 태어날 적에 비로소 아들이 되고 딸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데도 이런 과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하면 아들로 잉태가 되듯이 하나님의 아들 되고 구원이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을 '아버지'하고 거침없이 부르는 것입니다. 딱 부러지게 신앙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라는 말은 친아버지라는 말입니다. 내 딸은 나를 보고 '아빠'라고 하지만 며느리는 나를 보고 '아빠'라고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귀엽고 사랑스러워도 며느리지 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친아들이요, 친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예수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은 최고의 복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 상반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냥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사도요한이 요한일서를 쓸 때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그노시스라고 하는 영지주의 이단이 극성을 부릴 때입니다. 그네들의 주장은 '예수는 예수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로서 예수와 그리스도는 별개'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절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육체로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지주의의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그럴 때 사도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 자마다 즉 예수가 나의 구주요, 온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가 여러분들의 구주로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벌써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권세가 주어집니다. 본문을 기록한 사도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자녀가 되면 무슨 권세가 있습니까? 후사라고 하는 후사권 다시 말하면 상속권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너희 집이 어디냐?"고 하면 아들 녀석이 당당하게 저것은 내 집이라고 합니다. 그 집이 아버지의 집이지 어떻게 자기의 집입니까? 아버지의 것은 곧 내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후사권입니다. 이것이 상속권입니다. 그러기에 자녀의 권세는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팔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습니다. 공로를 세워서 받아 오는 것도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받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 8장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의 후사권을 말합니다. 후사권이 얼마나 귀한 축복입니까?
한달 조금 전에 이름 있는 정씨 아들 형제가 법원에 나타났다는 기사가 신문에 살짝 게재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고 '저 형제가 무슨 법정 싸움이 일어났나?'하고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그 사실의 내용이 밝혀졌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20살 난 아가씨와 그 동생 19살 난 아가씨가 얼마 전에 죽은 큰 재벌의 총수의 딸이라고 하면서 친자확인 소송을 냈습니다. 총수가 세상을 떠났기에 아들 형제들을 오라고 하고 두 아가씨도 오라고 하여 피를 뽑아서 DNA 유전자 검사를 했습니다. 검사 결과가 꼭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틀림없는 딸이라는 판결이 났습니다.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해도 두 아가씨가 호적에 올라가는 것을 말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재벌 총수가 죽을 때 즉 죽는 그 시간에 가졌던 재산에 대한 상속권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한 사람이 25억씩 받게 된다는 뉴스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자녀의 권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후사는 하늘나라를 그대로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25억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영원히 살고 없는 것 없이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그 세계가 여러분들의 것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자마다 갖게 되는 자녀의 신분입니다.

둘째, 계명을 준수해야 합니다 (1하-3)
내가 어떤 사람의 아들이 되고 싶어서 그 집에 찾아가 한 달, 두 달 효도를 했습니다. 효도한다고 아들이 됩니까? 아무리 효도를 해도 아들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들이 되었으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효도를 해야 합니다. 아들이 되었으니 효도를 하는 것이지 아들이 되기 위해서 효도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기에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의 의무요, 또한 아들 노릇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 하반절에서 3절을 보면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한번은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선생님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둘째는 사람 즉 나와 너와의 관계입니다. 율법에 얼마나 많은 법조항이 있습니까? 그것을 축소시킨 골자가 십계명입니다. 그 십계명을 성경 단 두절로 좁혀 놓은 것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흔히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이 되고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윤리 혹은 도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으로 나와 너와의 관계는 윤리요, 도덕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믿듯이 믿음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율법의 요지가 십계명이고, 십계명의 핵심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을 모아 놓은 것이 사랑이라는 두 글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나를 낳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해 볼 것도 없고 나와 똑 같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너를 사랑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라면 부모도 사랑해야 하지만 형제도 사랑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집안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의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 사람에게는 사랑의 계명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이 두 수레바퀴를 달고 달릴 때 갈 곳 까지 가는 것입니다. 하나는 믿음이라고 하는 수레바퀴요, 하나는 윤리 혹은 도덕이라는 수레바퀴입니다. 그래야 갈 곳 까지 가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도덕은 의미가 없습니다. 공자의 도덕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행함 즉 도덕이 없는 믿음은 욕을 혼자서 먹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맙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윤리가 한데 어우러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도 따지고 보면 이웃입니다. 아내를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앞집의 사람만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 된 우리는 이처럼 사랑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무엇으로 표현하시겠습니까? 예배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배한다고 하는데 참석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예배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사람으로 향할 때에는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한 계명이요, 성경이 말하는 새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으면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실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세상을 이깁니다 (4-5)
예수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는 신분을 갖게 됩니다. 그 신분을 가진 자에게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는 승리의 영광과 축복이 있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블레셋 백성들에게 총 동원령이 내려지고 서로 대진하여 전쟁 일보 직전의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무서워하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무서워합니다. 서로 무서워하기에 섣불리 대들지를 못합니다.
내가 어느 곳을 지나가다가 사자를 만났다고 합시다. 사자가 무섭습니까? 무섭지 않습니까? 무섭습니다. 사자는 우리를 무서워합니까? 안 무서워합니까? 사자에게 가서 무서운지 안 무서운지 물어 보십시오. 동물학자들은 사람이 사자를 무서워하는 것만큼 사자도 사람을 무서워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그렇게 서로 무서워합니다. 그 때 블레셋의 대장 하나가 나타나더니 "백성들까지 싸움을 붙일 필요가 있느냐? 너희 중에서도 대장이 하나 나와 나랑 둘이서 일대 일로 싸워 끝내고 말자"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대장은 사울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보니까 '너무 너무 커서 나는 감당 못하겠다'고 하면서 벌벌 떨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보고 '너무 커서 감당 못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어린 꼬마 대장 다윗이 달려 나왔습니다. 골리앗을 본 다윗도 '야 너무 크다, 너무 커서 물 맷돌이 비켜 나갈 데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겁 없이 달려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물 맷돌을 아무렇게나 던져도 다 맞게 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똑 같은 사람을 보았는데 생각이 왜 이렇게 다릅니까? 그것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때문입니다. 다윗이 보기 좋게 승리했습니다. 싸움에서 진 블레셋 사람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스라엘은 뒤쫓아가면서 전부 챙기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대장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에서 5절을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까닭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기 까닭에 그 예수와 함께 승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 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어떤 역경과 불행을 당해도 그것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주 만물을 가리킵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쓴 사도요한은 요한복음도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세상, 혹은 세상 임금은 마귀를 가리킵니다. 마귀라는 놈이 나타났다고 하면 온갖 불행을 다 갖다 주는 것입니다. 믿음을 다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때로는 병을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인생을 망쳐 놓습니다. 그러기에 마귀만 이겨 놓으면 그 나머지 환란은 시간문제로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귀를 예수님이 벌써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고 예수 편에만 서면 예수와 함께 따 놓은 당상처럼 승리는 이미 결정이 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라빈슨 목사에게 한번은 그 교회 젊은이가 찾아와서 "목사님,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자꾸 마귀를 말씀하시는데 마귀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마귀라는 것을 본 일도 없고 만난 적도 없고 느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어디에 있습니까? 마귀는 없는데 왜 자꾸 있는 것처럼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라빈슨 목사님은 "그런게 당연하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 청년에게 마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목사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귀는 자기편에서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라네. 교회에 다니면서도 마귀 편에 선 사람은 마귀가 절대 건드지 않지만 하나님 편에서 서서 하나님의 코스를 달려가는 사람에게는 못 가게 하고 실패하게 하려고 나타나기도 하고 온갖 훼방을 다 놓는 것이라네. 자네야 마귀 편이니까 그런 것이지"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경남 하동 어느 교회에 아들 딸을 데리고 사는 과부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남편에게로부터 받은 재산도 있고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저축해 모으고 모아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나아가는 그 교회 예배당을 짓는다고 하니 거의 혼자서 다 감당할 정도로 헌금을 받쳤습니다. 그 교인들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온 성도들이 기뻐하면서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어느날 그 여집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 예배당 초석에 아무 아무 집사 기념 예배당이라고 몇 자만 써넣어 주시지요. 내가 죽은 다음에 내 아들 딸과 손자들이 보고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또 열심을 내고 믿음 생활을 잘 하겠습니까? 좀 넣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큰 변이 났습니다. '아무 집사의 기념 예배당이다. 주춧돌에 그것을 새겨 넣는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 졌습니다. 일주일 동안을 금식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여집사님이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또 그 글자를 써넣으면 교회가 뭐가 됩니까? 그렇게 기도를 하고 일주일만에 여집사를 찾아갔습니다. "집사님, 이다음에 하늘 나라에 갔을 때 네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왔느냐? 라고 물으시면 예배당을 내가 혼자 지어 바쳤습니다 라고 하시겠지요? 그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실는지 아십니까? 나는 그것을 도무지 모르는데? 라고 하시면 집사님의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목사님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예배당 다 짓고 거기에 이름을 새겨 넣고 영광은 네가 다 받았는데 내가 받은 영광이 어디에 있느냐?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시면 집사님 뭐가 되는지 아시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자 그 여집사님이 깨닫고 "목사님, 내가 뭐한테 씌웠었나 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귀가 와서 '네가 그렇게 하고도 네 이름하나 못 새겨 넣느냐?'하고 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게 말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 놓고 내 이름이 나면 큰 변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귀는 제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유다 마음속에 마귀가 예수를 팔 생각을 넣었더니 라고 성경은 말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사탄을 이미 이겼기 까닭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면 반드시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 승리는 성도의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예수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복된 신분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인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가졌다면 반드시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셋째 예수를 믿는 자마다 세상을 이깁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예수님과 함께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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