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한 영혼
2002-03-04 13:08:38

(눅 19:1-10) // 2002년 3월 3일




지난 번 미국 솔트 레이크에서 있었던 동계 올림픽 소트 트랙 종목에서 우리나라 김 동성 선수가 다 이긴 게임을 심판의 잘못된 판정으로 잃어버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반미(反美)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이것도 미국이라고 하는 초강대국의 오만과 횡포 때문에 생긴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약한 자는 죽으란 말이냐"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 힘없는 자, 가진 게 없는 이들은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크고 웅장하고 굉장하게 보여야 하고, 많아야만 된다는 생각이 오늘날의 시대정신(時代精神)입니다. '95년도에 제가 스위스에 처음 가서 취리히 대학과 바젤 대학을 방문했습니다. 특히 취리히 대학은 그로스 뮌스터 교회에서 유명한 종교개혁자 쯔빙글리 로(路)를 따라가니까 있었습니다. 신학부 건물을 찾아봤더니 손바닥만한 표시가 되어 있어서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바젤에 가서 유명한 바젤 대학교 신학부를 들어가 봤더니 작은 3층인가 4층 건물이었습니다. 미국의 거대한 대학 건물을 상상했던 저는 내심 조금 실망했습니다. 제 자신이 거대주의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닫게 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겉모습하고 그 내용하고는 틀린 것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현대인들은 거대한 것을 좋아하고 많은 것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강력하고 크고, 많은 것을 얻으려고 애쓰다보면 삶이 고단하게 느껴집니다. 열등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 엄청나게 보이는 것, 거대한 것, 큰 것, 많은 것을 얻으려고 지나치게 애씁니다. 일종의 보상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참으로 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작은 새처럼 연약합니다. 상처받은 인간은 누군가가 자기를 돌보아 주기를 원하고, 주의를 기울여 줄 것을 바라고, 지도해 주며, 지지해 주기를 바랍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와 죽음이 임박한 노인은 우리에게 생명의 존귀함을 상기시켜 줍니다"(헨리 나웬).



며칠 전, 교회 뜰 안에 서 있는 꽃나무에 꽃망울이 맺힌 것을 보았습니다. 차가운 겨울을 견디고 새 생명을 봄과 함께 꽃 피우려고 잔뜩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잃어버린 영혼들도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기 위하여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잃어버린 한 영혼이 다시 사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영혼이 꽃처럼 피어나는 구원의 드라마가 오늘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 삭개오라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만나 구원을 얻었는지를 살펴봅시다.



1. 주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려고 찾아오십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미리 아시고 그를 만나러 찾아가셨습니다. 그에게 삶의 만족이 없다는 걸 아셨습니다. 떳떳치 못하게 쌓은 부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도 아셨습니다. 그에게 삶의 기쁨이나 보람도 없음을 아셨습니다. 또한 그가 변화 받아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렸다 찾은 양 한 마리를 안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 그림에 그려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만약 화가라면 예수님이 그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애쓰시다가 가시 나무에 긁히시고 찔리신 흔적이 얼굴에도 손에도 나 있는 것을 그리겠습니다. 그 만큼 예수님은 고통받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는 분이십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 상처받은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고 고쳐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어쩌면 모두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도 잃고, 삶의 기쁨도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습니다. 너무 바쁘게 이것저것 하느라고 정신 없이 살다가 훌쩍 중년(中年)을 넘기면, "아, 난 이제 늙는 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이게 다 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고, 삶의 의욕이 떨어지고, 멍∼ 하게 있게 되는 순간이 자주 생깁니다. 사람들 얘기를 듣다 보면, 외롭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외로움이 현대인에게 가장 많은 '증상'입니다. 그래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이것저것을 해 봅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습니다. 마음이 늘 공허하고, 답답하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다고 느낍니다.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마음이 허전하다고 합니다. 영혼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삭개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참다운 삶의 의미도 기쁨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웃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외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그가 들은 것입니다. 자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가 거리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 도무지 그 많은 사람들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나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물론 키가 작은 것도 한 이유가 되었겠지만 군중들 틈을 헤치고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무에 올라갔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갔다고 했는데 이 나무는 보통 뽕나무와 다른 무화과나무의 일종으로 '애굽 무화과'라 불리는 것입니다. 기다란 가지가 낮게 뻗어 있어 쉽게 나무 위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적극적인 자세'로 주님을 만나고자 애쓸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그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9-1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가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은 물론 예수님께서 그의 사정을 아시고, 그를 찾아오심으로써 가능했던 일입니다.



만남이란 상호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찾아오시고, 그가 간절하게 예수님을 만나기 원할 때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인간관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녀가 사랑을 하게 되는 것도 서로 마음이 통하고, 서로에게 끌리고, 서로에게 '응답을 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방적(一方的)인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짝사랑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서로 적극적이어야 사랑이 성립되고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유명한 폴 투르니에 박사는『인생의 네 계절』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들은 어느 한 친구의 덕택으로 그의 한마디 말이 내 마음을 움직이고 그 말의 빛이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게 되는 그러한 친구와의 만남도 있습니다. 한 권의 책과 만나는 일도 있고, 영화나 자연 현상이나 어떤 철학과 만나는 일도 있으며, 어떤 설교자와 만나는 일도 있습니다. 특정한 만남에서 인생에 대한 전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힘이 돌연히 한 형체로 나타나기도 하며 인생에 의미와 건설적인 힘을 주기도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만남에로 이끌어주고, 그 때마다 하나님은 조금씩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해 주는 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간에 이러한 만남의 배후에는 항상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자각적(自覺的)인 만남은 인간에게는 가장 큰 사건이자 인격적(人格的)인 사건이 됩니다. 이 만남은 항상 하나님이 직접 이니셔티브를 가짐으로 실현된다는 확신을 안 가질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중년의 나이에 주님을 만나 변화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찾아오신 주님을 적극적으로 만나고자 애썼기 때문입니다.



우선, 4절에 보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 나무에 올라가니"라고 했습니다. 거리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키가 작아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앞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옆에 서 있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가 만약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구나"하고 돌아섰다면 영영 예수님을 못 만났을 것이고,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참으로 적극적인 자세로 주님을 만나고자 애썼습니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자세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그를 주님이 만나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하는 사람이 받고, 찾는 사람이 찾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번 심령부흥성회기간 동안 주님을 만나고, 성령 받고, 새로워지고, 구원의 감격을 얻으려면,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나와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또, 삭개오는 남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7절을 보면, "뭇 사람이 수근 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들이 그가 삭개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을 때 수군거리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주님의 뜻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삭개오도 자기를 보고 평소에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예수님을 모셔들일 때 수군거리는 것을 듣고도 거기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집 손님이 되신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저런 사람이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가?" 이런 소리를 듣고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누가 수군거린다고 해서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무얼 하겠는가? 그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하며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을 굳게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사랑과 은총의 빛을 우리에게 여태까지 비추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 무슨 소리를 해도 요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기를 알아주시고, 자기를 불러 주시고, "네 집으로 가자, 어서 뽕나무에서 내려 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너무나 기뻤습니다. 즉시, 즐거워하며 주님을 자기 집에 모셔들였습니다. 남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을 여유가 그에겐 없었습니다. 그들의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집에 가서도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말씀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때 그는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는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주님께만 마음을 고정하고, 주님 말씀만 들으십시오.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따라 가십시오. 남이 뭐라고 하든, 주님에게만 주의를 기울이고 나가십시오.



또, 삭개오는 주님이 부르실 때 적극적으로 응답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즉시 반응을 보였습니다. 6절을 보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부르실 때 두 가지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먼저, 급히 내려왔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부르실 때 머뭇머뭇하지 않았습니다. 급히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머뭇머뭇 하다가는 구원받을 기회를 놓칩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얼른 삭개오처럼 응답해야 합니다. 주님은 피곤에 지친 사람에게 지금도 구원의 기회를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급히 주님께 응답하십시오. 그런 사람이 구원을 얻고,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와 들으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 찾으라"고 하십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이 부르실 때, 즉시 응답하는 이에게 생수를 허락하시며, 죽은 영혼을 살려주시며, 만나 주시며, 긍휼히 여겨주시며, 널리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삭개오는 즐거워하며,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정말 주님이 자기를 불러 주시고 자기 집에 머무시겠다는 말씀을 하실 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를 깨끗케 해 주시고, 눈 먼 거지를 고쳐 주시고,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던 작은 아들(탕자)을 맞아 주시고, 한 마리 양을 잃으면 99마리를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다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예수님이라면 자기를 고쳐줄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기에 그는 예수님이 부르실 때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즐거워하며 자기 집에 모셔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뿐 아니라, 풍성한 삶을 얻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겉으로는 부자인지 모르나 내면으로는 가난한 사람이 많습니다. 삭개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셔들임으로써 예수의 생명을 호흡함으로써 새 생명을 얻게 되었고, 진정 부유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그에게는 삶의 기쁨이 생겼고, 변화를 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을 모셔들여야 주님이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이 마음에 들어오시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 내 마음에 어서 들어오시옵소서! 오셔서 나를 만나 주시고, 온전케 해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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