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기도 2002-01-30 12:44:23 요한복음 17 : 1-5 ( 2001년 4월 8일 ) 요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한 스티븐 코비는 또 하나의 책 "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 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앞부분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스티븐 코비와 그의 결혼한 딸과의 대화입니다. 아이를 낳고 난 다음에 아이들 뒤치닥 거리를 하느라 자신의 일을 거의 하지 못하는 출가한 딸이 아버지께 푸념을 합니다. " 아버지 이 어린 아이 하나를 키우느라고 내 할 일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활용할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일종의 시간 낭비가 아닌가요? " 그 때 스티븐 코비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 시간관리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말아라. 달력을 없애 버려라. 그리고 지금 네가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를 돌보고 있는 것을 인하여 감사하고 그것을 즐기도록 하여라. 명심하기를 바란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을 . 너의 내면에 있는 나침반을 따르고 벽에 걸린 시계를 따르지 말라. " 시계는 시간을 가리키지만 반면에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킨단다. "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무엇인가 열심을 품고 일을 합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무엇입니까? 진정한 인생의 의미입니다. 생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쾌락에 대한 팀닉은 있지만 진정한 기쁨이 없고, 흥분은 있지만 감격이 없고, 성취욕은 있지만 만족감이 없이 살아갑니다. 우리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분명한 생의 목표를 가지고 사셨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의 가치가 바로 거기에 있었고, 예수님의 능력의 근원이 거기에 있었고, 예수님의 진리 되심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의 궁정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말구유에 오셨고,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것도 아버지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예수님은 결코 자신을 영화롭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영광을 버려 두셨습니다. 그것은 그 모든 일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생의 목적이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십자가 앞에 서 있습니다. 죽음 앞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죽음 앞에서, 이 십자가 앞에서 마지막 기도를 합니다. 마지막 기도를 하는데 우리 주님의 첫 번째 기도, 일성으로 간구하는 기도는 한마디로 아버지의 영광이었습니다. "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마지막을 기도로 보내고 있는데 그 기도 속에서 우리 주님의 오직 한가지 관심은 아버지의 영광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드리는 이 기도, 공생애의 사역을 다 완수하고, 마지막 그의 사역의 클라이막스에서 드리는 그의 기도가 얼마나 위엄이 있고, 장엄하며, 고귀한 기도이겠습니까? 그래서 개혁자 루터는 " 이 주님의 기도야말로 너무나 정직하고, 너무나 순전하고, 너무나 깊고, 너무나 부유하고, 너무나 넓어서 아무라도 그 밑을 잴 수 없다 " 고 했습니다. 루터의 친구이자 함께 일을 했던 그의 동료 멜랑히톤은 " 이제 까지 하늘에서도 땅에서 성자께서 하나님께 직접 드린 이 기도만큼 고차원적이고 그만큼 거룩하고 열매있고, 그 만큼 고상하게 들렸던 기도는 없다. " 고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는 병들어 마지막 삶을 살 때 매일 이 기도문을 읽고 그의 삶이 다 끝나 가는 순간 속에서 그는 이 기도의 말씀들이 큰 위로가 되었고, 갈등을 겪을 때에 큰 힘의 원천이 되어 왔음을 증거하였다고 할 정도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위엄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기도는 세 부분으로 나우어 집니다. 1절에서 5절까지는 주님 자신을 위한 기도요, 6절에서 19절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요, 20절에서 26절까지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믿을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주님 자신을 위한 기도인데 최후의 만찬을 하였던 다락방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긴 고별 설교를 다 마친 다음에 주님은 십자가 앞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시간을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사로부터 시작해서 기도로 그의 생을 마무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우선 무엇을 하겠습니까? 좋은 옷을 사겠습니까? 좋은 음식을 먹겠습니까? 또는 보고 싶은 사람을 부르겠습니까?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을 때 나는 무엇을 서둘러야 하는지 거기에 그 사람의 삶의 질이 있고, 가치관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숨질 때 하는 날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 숨을 거두면서도 이렇게 찬송할 수 있다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 분은 정말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지막 순간에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가장 피하고 싶고, 뛰어넘고 싶은 죽음을 앞에 놓고 왜 주님에게 고통이 없겠으며, 두려움이 없겠으며, 아픔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기도의 내용은 그 모든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이 죽음으로부터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길--십자가 그러면 이 아버지의 영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먼저 주님은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아들을 영화롭게 해야 아버지가 영화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영광이라는 말은 찬미, 칭찬, 존귀, 숭상이라는 뜻입니다. "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 이 말을 그대로 해석을 하면 아들에게 죽음도 없고 고통도 없고 오직 존귀과 칭찬과 찬미만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자신의 영화를 벗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간구 하는 "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 의 기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생각하는 영광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존귀함을 얻고, 찬미를 얻는 것이라면 자신이 십자가위에 달리는 것도 영광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 : 23절에서도 말씀합니다. "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 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으로 받아들이고 믿었습니다. 얼마나 수준 높은 사상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 아버지여 십자가를 감당하게 하옵소서. ' ' 십자가의 죽음을 담당하게 하소서.' 사도 바울을 생각합니다. 교회가 아름답고, 교회가 능력있고, 생명력이 있는 교회가 된다면 자신은 어떤 대우를 받아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영광으로 알겠다고 하였습니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주님의 남은 고난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바울이 처한 상황을 보십시오. 고전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 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교회가 존귀하게 되기를 위해서 자신은 비천하게 되었고 교회가 강하게 되기 위해서 자신은 약한 자가 되었고, 교회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 자신을 후욕을 당했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대우를 받을 수 없는 바울이 말입니다. 전혀 그 상황에 대해서 바울이 갈등이나 아픔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교회가 잘되고, 성도가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가 존귀함을 받는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그것은 정말 기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조금만 무시당해도 기분이 나쁩니다. 조금이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당장 항의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을 실 수 있다면 자신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시고 멸망당하시는 것도 영광이라고 믿었습니다. 교회의 영광, 성도의 영광, 여기 모여 함께 공동체를 이룬 덕일의 지체들의 진정한 영광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복음이 증거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이웃이 구원을 받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라도, 내가 멸시를 받고, 침 뱉음을 당해서 낮아지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처럼 바울처럼 그것을 나의 영광으로 알고 내가 영화롭게 되는 길로 생각하십시다. 거기에 우리들의 존재의 가치가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되는 하나님의 능력 " 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영광은 어디에 있습니까? 복음 때문에 미련하게 보이는 것, 주님을 위해서는 좀 어리석게 보이는 것, 손해를 보는 것, 내 자존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리게 될 영화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 첫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아들의 심판 아래 두고 최종적인 심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결과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주 예수의 이름에 복종하고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거부하고 자기 욕심대로 삶으로 최종적인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3 : 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임 당하심과 부활하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거룩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신 자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믿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은 이 감격적인 사실을 등한히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귀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안 믿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기회가 없어서 안믿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그들의 문밖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시지만 경제적 고통 속에서, 질병 속에서, 환난과 시련 속에서 마음을 두드리지만 반응하지 않고 주님을 영접할 수많은 기회들을 외면한 사람들 그들은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주님의 심판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우리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 할 수 없고,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기억나는 것은 우리도 한 때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으려고 무지하게 노력한 것도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손에 이끌려서 이렇게 신앙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예정이고 말로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영생을 얻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얻은 그 구원과 영생으로 인하여 하늘에서는 기뻐하십니다. 영생이란? 그러면 성도들이 영생을 얻게 될 때 하나님이 영광을 얻게 된다고 하였는데 도대체 영생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 그 어느 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두 종류로 인생이 나뉜다고 말합니다. 한 종류는 영생을 얻는 자요, 또 다른 종류는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입니다. 무궁히 부끄럽다는 말은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오래 오래 사는 것이 영생 아닙니다. 못 죽는 것이 영생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 가면 정문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 예수 믿으면 영원히 삽니다. " 그 말씀은 반절 밖에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미안하지만 예수 믿지 않아도 영원히 삽니다. 여기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다시 깨어서 영생을 얻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부활하는 것 믿습니까? 그런데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부활하는 것 믿습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부활합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은 "선한 일 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고 합니다. 똑같이 부활합니다. 단지 종류만 다를 뿐입니다. 오래 오래 사는 것이 영생의 참 뜻이 아니라면 영생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요? 어느 날 목사님과 목수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 어제 주일 설교 잘못하셨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 믿는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말했지요." "아니,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 만들었지 않습니까?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이지, 왜 꼭 예수 믿는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그 때 목사님이 목수 형제에게 질문합니다. "형제여, 1년에 몇 개나 책상을 만드십니까?" "올해는 한 천개 정도 만들었습니다." "의자는요?" "의자는 그 보다 조금 못하게 한 팔백개 정도 만들었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올 해 천 팔백 개의 자녀를 생산하셨구려?" "목사님 말이나 됩니까? 어떻게 의자가 내 생명이란 말입니까?" "당신이 만들었으니 당신 자녀 아닙니까?" "내 생명이 분여가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 자식입니까?" 그 때 목사님께서 그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당신 말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만드셨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부여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 영생은 예수 안에서 우리가 얻은 새 생명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은 자는 예수님의 특성이 그의 삶과 인격과 언어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생을 어떻게 얻는가? 그것이 요한복음 17장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 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두 가지 아는 것입니다. 첫째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한번 외워볼까요? 두 가지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 굉장히 소중합니다.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도 무척 소중합니다. 그런데 그 끈이 하나 있다면 '안다' 라는 단어입니다. 안다는 단어는 우리가 지식적으로 안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냥 피상적으로 아! 저 집 아들, 그렇게 아는 것도 아닙니다. 안다는 말이 가장 잘 표현된 곳이 있다면 누가복음 1장 34절입니다. 누가복음 1장 34절은 처녀인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네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아이를 낳겠다"고 수태를 고지합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가 깜짝 놀라면서 하는 말이 바로 34절입니다. 누가복음 1: 34절인데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여기 안다는 말이 같은 단어입니다. 여러분, 마리아가 남자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여성인 마리아가 남성을 모른다는 뜻입니까? 그건 아니 쟎아요?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니', 남자와 성적으로 깊은 교제가 없었으니 내가 어떻게 아이를 낳겠는가? 그래서 보통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이 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처럼 안다는 단어를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운 단어로 많이 씁니다. 그 중의 하나,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그렇게 우리 성경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원문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고 하니 "아담이 하와를 알매" 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동침이라는 단어가 안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깊이 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알아 아이를 낳는 그 만큼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체험적인 앎입니다. 둘이 한 몸이 되어서 한 생명을 이루는 신비로운 관계를 안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앎은 듣거나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니고, 책을 통해서 이성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전인적으로 체험적으로 생명이 생산되는 앎에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생을 언제 얻습니까? 우리 찬송가에는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앞으로 받겠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사는 "영생은 지금 받았고 면류관은 나중 받을 것이다."로 바뀌어야 됩니다. 어디 그런 말이 있습니까? 요한복음 5장 24절,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 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도 똑같습니다. 영생의 본질을 요한복음 17장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뭐라고 말했는고 하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예수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7장 3절이나 같은 말씀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은 많이 압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하나님을 알았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나는 예수님은 아는데,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두 개가 다 안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 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알고 그를 보내신 유일하신 하나님도 알아야 영생이 경험됩니다. 그러면 그 영생이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을 믿고 그의 보내 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 이라고요? 성경본문을 보세요. '영생 을 얻었고'입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장차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이다?' 아닙니다. 완료로 써 있습니다. '이미 옮겨졌느니라.'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 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이미 얻었습니다. 그리고 내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죽은 다음에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영생은 이미 내가 소유한 것입니다. 사망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내게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죽음이 정복할 수 없는 놀라운 생명을 우리 속에 이미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우리가 영생을 얻고, 하나님이 영광을 얻게 되기까지 우리 주님은 처절한 죽음의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사람도 없는 뼈아픈 고독의 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부르짖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반응이 없는 침묵밖에 없었습니다. 사단은 승리한 것처럼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던 제자들은 다 도망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마저도 예수님을 변호해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정녕 실패자였습니다. 예수께서 누리는 영광 그러나 주님은 다시 부활하시고 사단은 심판을 받습니다. 이제 영광을 받으신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것을 미리 바라보며 주님은 또한 번 기도합니다. 5절입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창세 전에 가졌던 영화가 회복될 것을 확신하며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비웃고 조롱하던 사단을 완전히 짓밟았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장 높여 주셨습니다. 원래의 자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혀주셨습니다. 하늘 위에 있는 자들과 땅위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 천사들과 사람들과 귀신들이 다 주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였습니다. 창세 전에 가졌던 영화를 되찾았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님은 교회를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님만을 증거하고 영화롭게 합니다. "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심판하실 주님으로, 만왕의 왕으로 오십니다. 만물을 통치하는 권세를 가지시고 아버지의 영화와 권세를 위임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을 순종했던 예수님에 대한 아버지의 배려요 영광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주님의 순종의 십자가,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기도하신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며 나도 주님 앞에 복종하고 나를 철저하게 감추고 주님의 이름만을 존귀하게 하는 삶이 되어 하늘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참된 영광을 누리는 축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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