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활 의 은 혜 2002-01-14 17:25:25 갈라디아서 2:20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대의 사건은 지금부터 2천년 전 유대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삼일만에 부활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모두 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음으로 끝장이 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도 죽음으로 그들의 종말을 고했고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다 죽음을 향해 가는 슬픈 나그네들이고 모두 다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는 비극의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 죽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사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고 인류 전체의 사건이며 이것은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하나님의 큰 은총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죽음 앞에서 모두 다 두려워하고 떨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죽는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절망하게 되고, 그리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시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주님, 그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로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친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께서 주신 영적인 생명이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죽는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덤에 잠드는데 산 자만이 잠을 잡니다. 산 자만이 잠을 자고 또 잠을 잤다가 깨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모든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된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가 죽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지금도 미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물론 공자나 석가도 인류에게 큰 희망과 의미를 주었지만 석가도 죽어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고 공자도 죽어서 무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을 남기지 않고 살아계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은 지금도 이 지구상에서 수많은 인류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국가가 발전했습니다. 미개한 사회가 문명국이 되었습니다. 노예들이 해방을 얻고 자유의 종소리를 들었으며 결박을 당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결박을 풀고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 땅에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새 역사를 창조해 갔습니다. 악한 자들이 변하여 선한 사람들이 되었고, 어두움에 처해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빛을 보았으며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사도가 되었고 그리고 섬김의 위대한 인격을 실현해 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믿은 후에 얼마나 많이 변화되었습니까 얼마나 삶의 보람과 행복을 얻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인데 이것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북한에 평양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300명이 부활절 예배를 드렸는데 부활절 메시지로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전했습니다. 저들은 너무 감격했고 모두 일어서서 통일의 노래를 불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민족의 희망을 선언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땅에서 최초로 복음을 받은 곳이 평양 땅이요, 최초의 순교자가 나온 곳이 토마스 목사가 복음을 들고 온 대동강 양각도 섬이었습니다.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서 1907년는 평양에 부흥 운동이 일어나서 한국 민족 전체가 복음의 새 역사를이루었고, 관서지방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지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옛날 이 민족에 희망을 주었던 복음으로 이 땅에 다시 희망을 일으키자"고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 종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큰 은혜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이 민족이 여기까지 된 것은 기독교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므로 말미암아 미신과 우상에 젖어있던 이 나라가 이 정도의 문명국이 되었고, 해방 후 사상적으로 혼란했을 때 교회가 이 민족을 지켜주었고, 6·25의 민족 전쟁에서 이 나라를 지켜 온 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였으며, 오늘날 이 땅에 민주화가 이루어 진 것은 교회가 바로 하나님 말씀 위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축복인지, 얼마나 우리 가정에 은혜인지,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계 역사를 AD와 BC로 나눕니다. AD(Anno Domini)를 기원전이라고 말하고 BC(Before Christ)를 기원후라고 말하는데 기원전과 기원후 역사의 시점을 예수 그리스도를 기점으로 해서 이 땅에 오시기 전과 오신 후로 나누는 것입니다. 사망을 패하시고 승리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역사의 연대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심하고 모든 역사가 이루어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의 시점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은 AD와 BC의 한 시점이 되어야 합니다. 믿기 전, 다시 말하면 부활생명이 내게 있기 전에는 절망이요, 죽음이요, 지옥 인생이요, 어두움의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가진 이후에는 영생이요, 천국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이천년 전 오늘 아침 많은 여인들이 슬픔에 잠겨 있었는데 그 중에서 몇 명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희망이요, 또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로 기대를 걸었던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었을 때 저들은 좌절하고 낙심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알았는데 예수님께서 힘없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 저들은 절망과 비통한 생각으로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덤의 돌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원래 유대땅은 시체를 땅에 매장하는 것이 아니고 돌무덤 속에 시체를 안장하고 무덤 문을 돌로 막는데 이 돌문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깜짝 놀라서 무덤 안에 들어갔을 때 시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찾는구나! 그는 살아나셨느니라 너희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가서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가둘 수가 없습니다.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왜 부활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것은 곧 나를 살리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받아야 할 은혜는 생명이요, 영광이요, 천국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부활은 반드시 내게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활의 은혜를 종말에 받으려고 합니다. 종말에 받는다는 말은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실 때 종말적으로 나도 무덤을 열고 부활하는 은혜를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역사적인 부활, 종말적인 부활, 현재의 부활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부활은 이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무덤 가운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부활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인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또 종말에 부활합니다. 우리는 친히 주님 말씀대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마지막 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부활의 생명으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는 날 땅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다 무덤 문을 열고 일어난다는 확신, 이것이 종말적 부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현재 부활로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현재 나의 부활로 살아가는 은혜를 구체적으로 고백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흔히 선하게 살고, 기도하고, 헌신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주님이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원하시는 것은 나와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진 소원입니다. 인생이 가장 큰 문제가 뭡니까? 사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혼자 못삽니다. 같이 살아야 합니다. 같이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자간에도 함께 살기가 힘들어서 그저 자식들은 가출하고 아버지는 자식을 내쫓고, 또 고부간에도 함께 살지 못해서 서로 이별하고 한 집에 있으면서도 살기 힘들어서 눈 흘기고 고개 돌리고 안쳐다보고 살지 않습니까 살기가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한 집에 살지 않으면서도 마음으로 함께 살지 못해서 원수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 아닙니까 더군다나 부부가 함께 살겠다고 결혼했는데도 함께 살기가 힘들어서 산다 안산다 그러면서 살아가고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동안 맺힌 한을 풀지 못해서 50이 넘어가지고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나라는 젊어서 이혼하는데 우리나라는 50이 넘어서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동안 살아준 것만으로도 넉넉하니 이제는 자식 길러서 결혼했으니까 따로 살자고 해서 남자들이 홀아비 되는 사람들 많습니다. 우리가 함께 산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산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더군다나 영생한다고 하니 이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영생을 어떻게 합니까 이게 보통 문제입니까? 예수님께서 안방에 계신다면 모시고 살겠습니까 잠깐 계시다가 가시라고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나같은 죄인과 하나님의 의로우신 아들이 어떻게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같은 죄인과 함께 예수님이 죽습니다. 나를 예수 안에서 의롭게 만들어서 함께 영생하려고요.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혼자 죽고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죽게 만들고 나도 살려서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부활의 은혜를 그가 받았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내가 예수 안에서 죽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의 부활을 보면서 '내가 부활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부활의 은혜를 현재 누리면서 살게 된 것입니다. 현재 부활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영원히 그의 생명은 부활생명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현재 부활생명을 가진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부활생명을 가진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생명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 생명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의 아침 나를 부활생명의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나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랑 가운데 최고의 사랑은 나와 함께 죽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이 땅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 죽을 때 같이 죽겠습니까 못합니다. 또 죽어봤자 다시 사는 것이 아니니까 그 죽음은 헛된 것입니다. 아내가 죽는다고 할 때 같이 죽는 남편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식이 죽었을 때 "아들아, 네가 가면 내가 어떻게 사냐" 하면서 흙을 쥐어 뜯으면서 금방 무덤 속에 들어갈 것 같은 어머니도 장례 치루고 나서 저녁 식사 잘 하십니다. 가는 사람은 가는 사람입니다. 또 같이 죽을 수 없고 같이 죽을 수 있는 사랑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와 함께 죽으려고 하늘을 버리고 오십니다. 십자가에 죽는 사건은 그냥 혼자 못박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형선고 받은 나의 죽음과 함께 죽으러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죽느냐? 부활하시기 위해서 죽습니다. 나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나를 안고 죽으므로 예수님이 살 때 나도 삽니다. 이것이 부활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은혜를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살려주셨으므로 나는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는 목적이 주에게 있고 죽는 목적도 주에게 있고 모든 목적이 주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변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은혜입니다. 부활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이런 자기 존재의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초등학생 아이를 예수를 믿지 않는 어떤 담임 선생님이 이 아이가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항상 헐뜯고 비난했습니다. 하루는 선생님이 이 아이에게 "네가 믿는 천당이 어디에 있니 한번 내놓아봐라" 하고 놀려댑니다. 그때 교회에 잘 다니는 학생이 자기 담임 선생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제가 알려드릴까요?" "알려줘라 그러면 내가 믿겠다." "제가 가는 길로 쭉 가면 천당이 있고 선생님 가는 길로 쭉 가면 지옥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내가 가는 길, 이것은 천국 길입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이것은 영생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갖지 않는 자는 그가 이 땅에서 부요를 누리고 이 땅에서 어떤 환경에 살았을지라도 그 길은 멸망의 길이요, 절망입니다. 부활의 은혜는 바로 이것입니다. 부활의 은혜를 받은 자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분명한 부활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부활의 은혜는 이 땅에서 모든 가치와 삶의 의미가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그리스도로 행복을 노래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저는 이번에 놀라운 것을 봤습니다. 제가 평양에 가서 지하철도 타보고 전부 돌아다녀 봤는데 그들이 사는 것과 우리의 사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우리가 입은 옷은 대단히 좋은 옷입니다. 그 사람들은 머리도 간단합니다. 저들의 사는 집은 모두 단조롭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저들보다 몇 십배의 물질의 부요를 누리면서도 불평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고 저들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황금 우상을 섬기는 온갖 불신의 모습이 들어있고 저들은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진실한지 거짓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물건을 놓아두어도 가져가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저들은 사는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조국의 지상 건설을 위해서 산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00m를 내려갑니다. 위에서 보면 아찔합니다. 지하철을 타니까 사람들이 붐벼요. 나는 지하철이 사람 안타는 지하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모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밝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웃고 얼싸안고 무슨 말을 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체제에 관한 얘기만 안하면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저들이 가난하게 살면서도 웃고 살고, 행복하고, 남녀가 만나면 연애를 해요. 거기나 여기나 사랑하면 좋아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행복을 고백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왜 부활하셨습니까? 우리를 행복하게 살라고, 온갖 불평과, 불만과, 갈등과, 불협화음과 우리 안에 있는 탄식을 무덤 속에 매장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자유하고, 행복하고, 어떤 경우에도 기뻐하는, 이것이 바로 부활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는 마음 속에서 마음껏 노래하고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그러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주님의 부활이 헛된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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