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도 요한의 축복 2001-12-28 13:49:44 요한계시록 1:4-8 일시: 4/22/01(주일 낮) ------------------- 오늘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읽은 본문 말씀은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에 보내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축복을 특별히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내리고 있습니다. 4절 상반 절에 보면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는 당시 로마의 행정구로서 소아시아 서편의 주명을 가리킵니다. 아시아 주에는 일곱 교회 외에도 밀레도, 아드라뭇데노, 앗소, 드로아 및 골로새와 히에라폴리스 등의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번에 우리 교회 제 1차 성지순례에 참여하면서 그곳을 가 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특별히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축복을 한 것은 그 일곱 교회들이 모두 밧모 섬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며, 사도 요한은 그 교회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에 대한 감독권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 중에 왜 하필이면 일곱 교회를 축복하였을까요? 여기서는 숫자 7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7은 정결한 헌신의 숫자입니다. 빈센트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7은 이스라엘 위에 부어진 모든 은혜와 축복의 숫자이다. 여리고를 7일간 에워쌌고, 제 7일에는 일곱 번 돌아 이 城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손에 주신 바요, 그 승리는 그들과의 언약의 직접적인 결과였음을 알게 하셨다. 나아만에게는 요단강에 일곱 번 목욕함으로 그를 낫게 하신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셨다. 모든 절기는 7이거나 7의 7배인 더 많은 숫자를 주셨다. 예컨대 안식일과 유월절과 주간절이 그랬고, 장막절과 안식년과 희년이 그랬다." 여기서 7은 성수요, 완전수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에는 그대로 모든 시대 모든 교회의 대표로 볼 수 있습니다. 베데라는 사람은 "일곱 교회를 통하여 그는 모든 교회에 쓰신다. 세계의 모든 시기가 7일에 순환하는 것처럼 7이란 숫자는 우주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 요한이 축복을 내리는 일곱 교회에는 오늘날 모든 교회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교회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복을 주시고 교회를 풍성케 하실때에 성도들의 삶도 복되고, 풍성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진정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는 <포도원>과 같습니다. 포도원에 포도가 풍성해야 거기서 싱싱한 포도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은혜가 충만하고 풍성해야 성도가 신령한 복을 교회를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교회를 아껴야 합니다. 교회를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가 더욱 안정되고 부흥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힘을 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교회를 축복해 주십니다. 시들고 메마른 사람, 사는 것이 무의미하고, 모든 것이 시들해 진 사람들이 교회라는 그릇에 들어오면 그 삶이 풍성해 지고 늘 건강하고 기쁘고 감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교회를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사도 요한이 축복한 일곱 교회에 포함되어 있음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 교회에 들어오는 자 마다 풍성한 꼴을 얻고 신령한 포도주와 젖을 얻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목마른 자, 돈 없는 자도 와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은혜를 얻을 수 있고, 얼마든지 좋은 것을 먹을 수 있고, 기름진 것으로 마음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자마다 영혼이 사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축복한 교회를 통해 성도가 받는 아름답고 귀한 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문을 보면 사도 요한은 성삼위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4-5)고 했습니다. 우선,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이고,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령을 일곱 신이라고 부른 것은 그의 완전성을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7이란 숫자의 상징성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한 것은 聖子에 관한 설명입니다. 저에겐 이 구절이 큰 은혜가 됩니다. 여러분은 교회 올 때마다 성 삼위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지금 축복에 메말라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축복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축복해 주기는커녕 원수처럼 미워하고, 저주하고, 판단합니다. 여러분이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보다 잘 안되기를 바라는 자들이 세상에는 더 많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를 통하여 여러분은 성삼위의 이름으로 매일 마다 축복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니, 목회자가 여러분을 축복할 때, 여러분은 "그 복이 나한테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이 시간 저는 여러분을 축복하고자 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민 6:24-26). 그러면 이제부터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를 축복한 내용을 살펴봅시다. 1. "은혜와 평강(평화)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먼저,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성도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인식을 하며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은 이런 확고한 인식과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그러면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 은혜 받으면 감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은혜 받지 못하면 감사는커녕 자꾸 불평이 나오고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은혜 받으면 어떤 조건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② 은혜를 받으면 강건해 지기 때문입니다. 은혜받지 못하면 시들시들하고, 사는 게 피곤하고 힘들기만 합니다. 그러나 은헤받으면 영과 육이 강건해 집니다. 은혜받으면 몸도 건강하고, 영도 튼튼해 집니다. 은헤받으면 삶의 기쁨과 활력도 생깁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라고 축복할 때 은혜를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평화(또는 평안)가 있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평화(또는 평안)입니다. 다니엘 10장 19절을 보면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은혜와 평화는 병행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평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하면 늘 불안과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에 짓눌려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서 말하는 평안이 있고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세상에서 마음의 평안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며칠 전에는 일본의 어떤 11살 된 소년이 자기 어머니를 흉기로 죽였습니다. 자살을 하려고 하다가 어머니에게 발각되자 어머니가 말리니까 어머니를 죽인 것입니다. 어머니를 죽이고는 경찰서에 자수를 했는데 왜 자살하려고 했느냐고 하니까 이사를 해서 전에 있던 친구들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서 자살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스웨덴은 유일하게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한 나라인데 요즘에는 사는 것이 힘든 사람들에게 자살 약을 처방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부유해도 마음의 평안이 없으면 이렇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질병에 걸리고, 결국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안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 삼위의 이름으로 평강이 있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기를 원하시면 이렇게 찬송하십시오.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 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찬송 469장). 2. 사랑이 충만하기를 축복했습니다. 5절 뒷부분에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했고, 6절 상반 절에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 성자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세상을 연결시키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삶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신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면 사는게 너무 힘들 것입니다. 예언자 엘리아는 갈멜산에서 크게 승리한 후 이세벨 왕비의 살해 위협을 받고, 광야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 어떤 로뎀 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간청하며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라고 한탄하고 푸념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그를 어루만졌습니다(touched him). 그리고 "일어나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두 번이나 그렇게 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 광야 한 가운데서도 그를 돌보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새 힘을 얻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낙심이 되고, 힘들어하고, 우울 상태에 떨어지는 것은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이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따뜻하게 돌보시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금 이 시간에도 부드럽게 어루만지시는 손길을 여러분은 느낄 수 있습니까? 마더 데레사는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폭탄이나 총을 사용하지 말고 사랑과 자비심을 이용하자"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저는 지간 주간을 보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슴에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늘 자신감 있고,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이란 다른 말로 돌봄, 배려, 따뜻한 관심, 지지, 위로, 축하입니다. 찬송 410장 후렴이 참 좋습니다. 부를 때마다 새 힘이 솟는 걸 느낍니다. 주님이 돌보아 주심을 믿고 고백하는 찬송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주님이 날 돌보아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산다면, 그게 행복입니다. 부활 후, 당신을 배반하고 고기잡이 하러 간 제자들을 친히 찾아가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 주님의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읽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특히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떼를 돌보라(사랑하라)고 부탁하십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수천 번, 수만 번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하고 주님으로부터 돌아선 우리를 이제까지 따뜻하게 돌보아 주시고, 친절히 대해 주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놀라워, 그 사랑으로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서 인생을 좀더 유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서로에게 미소 지으세요. 당신의 아내에게, 당신의 남편에게, 당신의 자녀에게 미소를 지으세요. 매일 매일 당신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자라나게 하세요."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미소 짓는 것부터 시작하여 사랑을 실천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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