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라이트의 천국관과 지옥관 / 호세아가 '好世兒'에게 2011-11-17 20:08:21 톰 라이트의 천국관과 지옥관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를 중심으로 톰 라이트의 천국관 자, 그렇다면 그의 천국관은 어떠한가? 톰 라이트의 천국관은 지옥관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그의 천국관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개념 정리부터 좀 하자. '천국(天國)'은 '하늘나라'다. 영어로 하늘나라는 'the kingdom of heaven'이다. 그리고 하늘나라는 하나님나라(the kingdom of God)와 동의어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 '하늘'은 '하나님'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이나 호칭을 직접 부르는 것을 극히 꺼렸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지칭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대칭(對稱)을 만들어 냈다. 예컨대, 주인이라는 뜻의 '아도나이(the Lord)'라든지, 정관사를 붙여 만든 '그 이름(the name)'이나, 하나님의 거처로 여겨졌던 '하늘(heaven)' 등이 바로 그러한 대칭들이다. 하늘나라(天國)에서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하나님나라와 동의어다. 천국 = 하늘나라 = 하나님나라 그런데 '하늘나라'는 '하늘'이 아니다. 오랫동안 하늘나라는 하늘과 동의어로 사용돼 왔다. 하지만 하늘나라와 하늘은 다르다. 사실 하늘과 하늘나라를 억지로 구분하는 것은 다소 도식적이며, 오해의 소지도 많이 생긴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임하는 영역을 하나님나라라고 한다면, 하늘도 하나님나라고, 천국이다. 하지만 복음서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그 하나님나라는 하늘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랫동안 사람들은 하늘나라와 하늘을 동의어라고 믿어 왔는데, 그래서 하늘나라는 마치 공중에 붕 떠 있는 '구름 위의 나라'인 양 상상해 왔다. 그리고 하늘나라 대신 '천성(天城)', 혹은 '천당(天堂)'이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저변에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땅을 떠나서 어디론가 이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렸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찬송가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든지 "하늘 가는 밝은 길이"라든지 "나 이제 천성에 올라가", "우리도 그분이 가 계신 곳에 가기를!"이라고 노래해 왔는지 모른다(<마침내…>, 295쪽). 하지만 성서가 가르치는 하늘나라는 하늘도 아니고, 천성이나 천당도 아니다. 천국 = 하늘나라 = 하나님나라 ≠ 하늘, 천성, 천당 톰 라이트는 땅, 하늘, 하늘나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1) 땅(earth), 하늘(heaven), 하늘나라(the kingdom of God) 가. 땅 하늘나라를 '하늘'이나 '천성', '천당'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냥 '시적 표현'이라고 너그럽게 보아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미지 때문에 성서의 천국관은 크게 왜곡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관건은 천국이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인데, 만일 천국이 하늘 위에 있는 나라라면 천국은 '이 세상 밖'에 있는 어떤 곳이 된다. 그리고 땅은 천국과 무관해진다. 사실 이러한 관점은 '땅'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천국이 만일 하늘 위의 나라라면 땅은 쓸모없어진다. <천로역정>과 같은 문학 작품이 가정하듯이 천국이 하늘에 있다면 이 땅은 불타 없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서의 세계관과 완전히 배척된다. 왜냐하면, 성서는 이 땅이 불로 태워서 없애 버릴 정도로 추하거나, 악하다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땅이 불타 없어질 것이라는 관점은 물질세계를 악으로 규정한 플라톤-영지주의적 세계관의 복제품이거나, 이 세상을 환영(illusion)으로 규정한 힌두-불교적 세계관의 반영물이다. 아니면 이 세계를 선과 악의 혼합물로 보았던 바벨론-페르시아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 땅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철학적 관념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이 땅에서의 삶의 자세 및 방식의 문제다. 만일 천국이 저 하늘에 있다면, 이 땅은 시한폭탄이 째깍거리고 있어서 당장 탈출해야 할 낡은 건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하늘만 바라보며 죽을 날을 하루하루 준비하는 삶이 될 것이다. 이런 신앙관을 가진 신앙인은 이 땅의 구조적 악과 정치적 불의에 문제를 가질 이유가 없다. 심지어 지구가 파괴되어 가고, 생태계가 교란되어 가는데도 무관심할 뿐이다(<마침내…>, 68쪽). 심지어는 열광적인 신앙인은 주님의 재림 때를 앞당기기 위해서 아예 지구를 파괴하는 일에 앞장설 수도 있다. 성서 세계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이 땅이 완전히 선하다는 것이다. 최소한 처음 창조 시에는 그랬다. 땅은 본성상 선하고 아름답다. 처음 피조된 세계에서 악은 존재하지 않았다. 악은 피조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러한 성서의 세계관 안에서 물질세계를 근본적으로 부정적으로 보거나 평가절하하는 관점을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성서가 알려 주는 것은 완전히 선하고 아름답던 물질세계가 영적,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행위자의 그릇된 판단에 의해서 왜곡되고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현재 이 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왜곡과 끔찍한 악, 불의, 폭력 등은 이 땅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가 완성된 뒤 어느 시점엔가 일어났던 도덕적 선택의 결과다. 이것은 마치 멋진 롤스로이스 자가용을 몰고 가다가 운전을 잘못해서 벽에다 박아 버린 상황과 비슷하다. 본래는 제대로 만들어졌는데 누군가가 잘못해서 찌그러진 것이다. 만일 이 땅이 영적, 도덕적 선택의 결과라고 본다면 역으로 그것은 어떤 적절한 조치에 의해서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악은 제거될 수 있는 것이 된다. 또 만일 악이 침투해 들어온 어떤 시점이 있다면, 역으로 그 악이 제거되는 시점도 존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이 땅의 악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제거되고 땅이 회복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본래의 선하고 아름다운 속성이 회복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이 땅을 폐기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창조는 취소될 수 없다. 이러한 세계관은 악을 이 땅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여타의 세계관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들 세계관에 따르면 땅을 없애 버리지 않는 한 이 땅의 악은 영원히 제거될 수 없다. 하지만 성서는 악을 제거함으로 말미암은 땅의 회복과 구속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복음이다. 땅은 지금 왜곡되어 있다. 그래서 피조물들은 신음하며 고통 받고 있다. 또한,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롬 8:18~24). 이 왜곡은 이 땅의 본질적 특징이 아니라 영적, 도덕적 선택의 결과물이다. 그 때문에 이 왜곡은 치유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악을 제거하시고, 땅을 구속하실 때, 땅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창조될 것이다. 그때 땅은 신음과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이 땅의 피조물들이 바로 그 치유와 회복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마침내…>, 6장). 새로운 창조의 때를 말이다. 나. 하늘 그럼 하늘은 무엇인가? 여기서 문제가 되는 하늘은 스카이(sky)가 아니라 헤븐(heaven)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자. 러시아의 우주 비행사 가가린이 우주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지구로 귀환한 뒤 "우주에 나가 보니 그 어떤 곳에도 신은 보이지 않았다"고 했던 말은 헤븐과 스카이를 혼돈해서 했던 개그(gag)였다. 그런데 성서 독자들도 이런 식으로 성서를 잘못 읽곤 한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기록했을 때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께서 부활의 몸을 입고 땅에서 헤븐의 영역으로 들어가셨다는 뜻이지, 스카이로 솟아올랐다는 뜻이 아니다. 자, 그렇다면 스카이가 아닌 헤븐은 어딜 말하는 것인가? 우선 하늘(heaven)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다. 주기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렇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그리고 구약적으로 말하자면 이곳은 그룹과 스랍, 천사들이 하나님을 보위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체를 입고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곳이기도 하다(<마침내…>, 186쪽). 예수께서 부활의 몸을 입고 하늘에 계신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늘은 몸도 거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하늘은 플라톤식의 순수한 이데아 계가 아니다. 하늘은 영계나, 천상계가 아니다. 하늘은 우리가 사는 이 땅과 분리되어 존재한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전 5:2)." 전도서 기자 코헬렛의 이 말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심연의 간격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어떤 신학자는 이 간격을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질적 차이는 하늘을 땅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고, 하나님을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하늘과 땅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말은 두 세계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늘과 땅은 공간이나 물질의 동일 연속체 안에 있는 두 개의 다른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마침내…>, 186쪽). 이것은 하늘과 땅은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세계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땅의 일에 무관심한 방관자신가? 만일 하늘과 땅이 그토록 다른 차원의 세계라면 하늘의 존재는 이 땅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 아닌가?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신론자(deist)의 하나님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톰 라이트는 땅과 하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 교차하고 있으며, 접촉하고 있다고 했다. 하늘과 땅 사이는 심연의 간격이 있지만, 이것은 지리적인 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늘과 땅은 수시로 만나고, 겹치며, 동시에 존재하기도 한다. "하늘은 땅과 접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존재는 동시에 땅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마침내…>, 186쪽). 톰 라이트는 또 하늘을 '땅의 통제실'이라고 했다(<마침내…>, 186쪽). 그렇다. 하늘은 일종의 사령관실이다. 그래서 성서에서 하늘은 자주 '보좌'가 놓여 있는 곳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이 하늘 보좌에 앉아 계셔서 하늘뿐만 아니라 땅의 일까지 세심하게 살피시고, 뜻하시는 대로 이끄신다. 하늘은 하나님의 공간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집무실이다. 그 하늘에서 보좌를 정하시고 이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 계시니 그분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는 이 땅의 진정한 통치자시다. 하늘은 또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진 곳이다. 그래서 하늘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영역'이다(랍벨, <사랑이 이긴다>, 79쪽).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봤을 때 하늘도 하나님나라의 일부다. 하지만 아직 땅과 분리되어 있기에 하늘은 우리가 소망하는 그 하나님나라는 아니다. 그런데 땅은 하나님의 통치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역의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땅에는 반역자들과 불순종하는 자들이 득실거린다. 하여 주님의 뜻은 자주 벽에 부딪힌다.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마 6:10). 그리고 이 기도를 올려 드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복종하고 순종해야 한다. 다. 하늘과 땅의 결합 톰 라이트가 하늘과 땅에 대해서 했던 말을 다시 정리해 보자. 하늘과 땅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세계이다. 현재 하늘과 땅은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는 심연의 간격이 존재한다. 이 간격은 지리적, 공간적 거리가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것인 일종의 차원들(dimension)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은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해 있다. 하지만 하늘과 땅은 수시로 만나며, 교차한다. 하늘과 땅이 교차할 때 하늘과 땅은 만나며, 동시에 한 곳에 존재한다. 이를테면, 야곱의 사다리나, 예루살렘 성전, 그리스도의 성육신 같은 것이다. 켈트 전통에 따르면 하늘과 땅이 심히 가까워서 얇고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근접한 듯한 장소(thin place)가 있다고 한다. 이 장소에서는 땅과 하늘이 서로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단다(<마침내…>, 389쪽). 이러한 켈트 전통도 하늘과 땅의 만남을 가정하고 있다. 하늘과 땅의 만남, 바로 여기서 우리는 톰 라이트가 말하는 천국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늘나라, 곧 천국은 하늘과 땅이 만나 서로 결합한 상태, 혹은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을 그는 하늘과 땅의 결혼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마침내…>, 176쪽). 만일 하늘나라가 하늘과 땅의 결합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중요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다. 하늘나라, 곧 천국은 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지금의 모습 그대로의 땅은 아니다. 하늘과 결합한 땅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천국이 이 땅에 임한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굳이 은하 철도를 타거나, 구원 방주에 올라탈 필요가 없다. 즉 이 땅을 떠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저 천성으로 이동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으로 내려오는(공간적으로가 아니라) 천국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한다. 그날이 오면 땅과 분리된 하늘이 땅으로 점점 다가와 마침내 땅과 결합하게 될 것이다. 땅으로 내려오는 하늘에 대해서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묘사했다(계 21:2, 10). 하늘과 땅은 만나서 결합하고, 하나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땅에 존재하던 악은 제거될 것이며, 불의는 심판을 받고, 폭력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무저갱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 2) 톰 라이트가 생각하는 천국 하늘과 땅의 결합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의 핵심이고, 주기도의 요지다. "(하늘)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때문에 톰 라이트는 반복해서 강조한다.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이 땅으로 내려온다(<마침내…>, 177쪽). 천국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총합을 이루는 것"이다(<마침내…>, 177쪽). 그리고 하늘과 결합한 땅은 완전히 새로운 땅으로 새롭게 창조된다.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새 창조가 이루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먼저는 주기도의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하늘에서와같이 새로워진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 점에서 톰 라이트는 19세기부터 발전한 '하나님나라의 신학'의 중요한 주장을 그대로 뒤따른다. 천국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일컫는 말'이다(<마침내…>, 51쪽). 천국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로 보는 것은 톰 라이트의 구원론의 중요한 핵심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여기에서 통치는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 헌법의 통치를 받는 것과 같은 의미의 통치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 헌법의 통치를 받는 사람을 말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그리스도께 위임되어 있으니 최고 통수권자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국민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다. 아마도 톰 라이트의 이러한 천국관은 <예수의 정치학>의 존 요더나 <대통령 예수>의 쉐인 클레어본과도 통하는 부분이 많은 듯하다. 즉 천국이란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을 통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통치의 특징은 무엇인가? 여기서 톰 라이트가 천착하는 '악'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지금 이 땅은 악에 물들어 있다. 물론 이 악은 창조 세계의 본래 특징은 아니다. 그것은 창조가 완성된 이후 어느 순간에 창조 세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불순물이다. 하지만 이 악은 너무도 강력해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완전히 일그러뜨려 놓았다. 구약성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악과 싸우시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2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이 세상의 악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셨다(<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3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악은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날'이 오면 하늘과 땅이 만나고, 하늘에 계시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악을 완전히 심판하여, 제거해 내실 것이다. 그리고 땅을 구속해 내실 것이다.(<마침내…>, 164~5쪽). 악에 대한 심판과 제거는 땅 구속의 중요한 국면이다. 악이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땅이 구속될 때 이 땅의 모든 정사와 권세는 반역을 멈추고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될 것이다. 이 땅 어느 곳에도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반역은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아울러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 모든 것을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히 채우실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땅에서 악이 제거된다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의미로 정의로운 사회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의라는 이 단어는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뜻하는 약어"다(<마침내…>, 325쪽). 천국은 정의로운 세상이다. 이것은 구원 열차를 타고 구름 위의 나라에 들어가 천사들과 함께 하프를 켜고 노는 천국이 아니라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의 천국을 상상하게 한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노예제 폐지를 시도했을 때, 마틴 루터킹 목사가 인종 차별이 없는 사회를 꿈꾸었을 때,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거부했을 때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으로 천국이 아주 살짝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기독교 여행>, 1장). 포스트 아우슈비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새로운 형태로 떠오르는 악을 보고 있다. 아프리카의 인종 청소, 9.11테러와 종교적 근본주의, 세계화와 천문학적 규모의 국가 부채 등이다. 지하드(Jihad)와 맥 월드(McWorld)가 경쟁하는 양상이다(<기독교여행>, 23쪽). 최근 우리나라에서 논의되고 있는 한미 FTA도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악의 문제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천국에 대해서 상상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원한다면 이러한 가공할 만한 현대적 악의 문제를 무시하고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소망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통치하실 나라에서는 그 어떠한 악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천국에 대한 또 한 가지 이미지를 제공한다. 하늘과 결합한 땅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아름다움은 천국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다. 물론 전통적인 천국관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도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천국이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는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그렇다. 천국은 분명히 아름다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아름다운 모습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회복될 땅의 아름다움은 지금 이 땅의 아름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이 땅의 아름다움과 회복될 땅의 아름다움이라는 두 종류의 아름다움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지금 이 땅의 아름다움은 맛보기며, 그림자에 불과하다. 회복될 땅의 아름다움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연의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움이다. 만일 우리가 새 창조의 신학을 가지고 지금 이 땅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본다면, 우리는 이중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지금 이 땅의 아름다움과 장차 이루어질 약속된 아름다움을 말이다. 톰 라이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유비를 들었다. 성배, 바이올린, 약혼반지가 그것이다. 성찬의 포도주를 담고 있는 성배를 생각해 보자. 성배도 아름답지만, 그 속의 성찬 포도주는 성배를 더욱 아름답게 한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도 아름답지만, 그것이 연주될 때 더욱 아름답다. 약혼반지도 아름답지만, 그 속에 담긴 약속 때문에 반지는 더욱 아름답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땅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이 땅이 온전히 회복되리라는 새 창조가 약속되어 있기에 아름다움은 더욱 커진다(<마침내…>, 338쪽). 사실 이러한 톰 라이트의 천국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부활관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부활은 몸의 변화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몸이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톰 라이트는 현재의 몸과 새로 입을 몸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현재의 몸과 부활체 사이의 관계는 지금 이 땅과 회복될 땅의 관계와도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이 땅의 모습과 새 창조를 입은 땅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하나님나라의 씨앗이요, 천국의 시작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를 원한다. 이상의 톰 라이트의 천국관은 놀라울 정도로 실천적인 함의를 가진다. 전통적인 천국관에 기초한 신앙생활이란 죽어서 천국 갈 날만 기다리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톰 라이트의 천국관에 기초해서 신앙생활을 할 때 신앙인은 필연적으로 천국이 이 땅에 임하도록 실천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우선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실천하게 된다. 아울러서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사함으로 누리며 회복될 땅의 아름다움을 상상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주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즉 천국을 소망한다는 뜻은 최소한 그리스도인이 정의, 예술, 복음 전도,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실제로 실천하며 산다는 것을 뜻한다(<마침내…>, 13장). 3) 낙원은 어디인가 이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이 남아 있다. 크리스천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중간 상태에 관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회는 이에 대해서 통상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영혼 수면설이다. 사람이 죽으면 몸과 함께 영혼도 잠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수면 상태에 있게 된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잠에서 깨어나 선악 간에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영혼 수면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상태를 가정하는 것이 지나치게 헬라적 영혼-육체 이원론의 성격이 짙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혼 수면설 자들은 히브리적 영혼-육체의 일원론을 고수하기를 원한다. 실제로 신약성서는 죽음을 자주 잠에 비유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신자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의식이 없이 잠만 잔다고 하는 주장은 신약성서의 다른 여러 부분과 충돌한다. 한편, 또 다른 입장은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땅에 묻히고 영혼은 육체를 빠져나와 어디론가 간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은 죽으면 영혼은 육체를 빠져나와서 천국이나 지옥, 둘 중 한 곳으로 가게 된다고 믿어 왔다. 즉 천국과 지옥은 죽음 이후 얼마 안 있어서 판결이 난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죽자마자 심판을 받게 되는 셈이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를 향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도 지지를 받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입장은 천국을 지구 밖에 있는 영혼들의 집합소로 상정하기 때문에 이 땅의 폐기를 주장하게 된다. 또한, 육체 없이 영혼만으로 천국에 이미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도 무의미해지게 된다. 또 죽자마자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도 약화한다. 톰 라이트는 영혼 수면설을 지지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잠시 어디론가 가 있는 곳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예컨대, 그는 바울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했을 때, 이는 죽음 이후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지복의 상태를 말한다고 본다(<마침내…>, 90쪽). 그는 이러한 지복의 상태가 아마도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하신 '낙원'일 것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톰 라이트는 전통적인 내세관과 상당히 유사한 내세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전통적인 내세관과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어디론가 가게 되고, 크리스천이라면 '지극히 행복한 동산' 곧 '낙원'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낙원은 결코 우리의 종착역이 아니다. 낙원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잠깐 거쳐 가는 임시 처소(monē)일 뿐이다(<마침내…>, 90쪽). 영혼과 육체의 분리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온전한 상태는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결합한 상태다. 즉 낙원에서의 영혼은 플라톤이 말하듯 해방된 상태가 아니라 온전하지 못한 상태다. 그 때문에 낙원에서의 영혼은 부활의 때를 기다리며, 사모한다. 그날이 오면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여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며, 하늘은 땅과 결합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이다. 맺는 글 이상에서 우리는 간단하게 톰 라이트의 천국관과 지옥관을 살펴봤다. 필자는 왜 하필 그의 천국관과 지옥관에 주목하는 것인가? 만일 톰 라이트의 말이 맞다면, 그래서 교회가 그의 견해를 따라 성서를 읽고, 가르치기 시작한다면, 기독교는 반드시 거대한 변화를 맞게 되리라는 것이 필자의 예상이다. 교회는 더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와 함께 사후 천국행과 지옥행에 기초해서 가르쳐 왔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대폭 수정이 불가피하다. 교회는 이제 신자들에게 더는 죽어서 천국 가야 한다고 가르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신에 이 땅에 임할 하나님나라를 맞이하라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만일 교회가 톰 라이트의 천국관과 지옥관을 받아들인다면 교회는 복음 전도 및 선교의 방식, 설교, 기독교 교육, 기독교 윤리, 사회참여 등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것이 복음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해서 도미노처럼 차례로 번져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전통적인 복음주의의 도식, 즉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로잔언약은 교회가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라는 두 가지 책무를 모두 붙들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선언이기는 하지만 톰 라이트의 관점에 따르면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는 근본적으로 둘이 아니라 하나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 새로운 복음 전도를 요청하게 된다. 교회가 만일 "형제자매님, 오늘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는 확신이 있으세요?"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갑시다. 예수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는 식으로 전도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전도할 수 있을까? (톰 라이트는 이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기독교 여행>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현대 교회에 안겨진 실로 막중한 과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필자가 톰 라이트에게, 그리고 특히 그의 천국관과 지옥관에 주목하는 이유다. 신광은 / 열음터교회 목사 ======================================== 바른 영성이란 무엇인가 김북경 '영성'이란 한국인에게 친숙한 단어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의 세계와 가까운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조상들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보고 자랐고 동네에서 무당이 굿을 하는 것을 '신기하게' 보며 자라 왔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어떤 영적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국 우주과학자들이 로켓을 쏘아 올리기 전에 돼지머리를 놓고 예배(?)를 드렸다는 일화는 한국인으로서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시무하고 있는 영국교회에 케냐 사람이 있다. 한국 인삼을 소개하면서 산삼은 효력도 뛰어나고 산삼을 발견하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어떤 사람은 밤에 꿈을 꾸었는데(대개는 여자다) 어느 산 어디에 가면 산삼이 있다는 정보를 얻고 꿈대로 가 봤더니 정말 산삼이 있었다는 일화를 얘기해 주었다. 그랬더니 자기도 질세라 케냐의 여자 점쟁이 얘기를 한다. 등산하다가 실종된 사람을 찾는 중, 이 여자가 꿈을 꾸었는데 산 어디어디에 가면 있을 거라고 해서 따라가 봤더니 정말 시체가 있었다지 않은가? 이런 영의 세계에 친숙한 마음 바탕에 서양 선교사들이 천지창조의 하나님을 전했을 때 그런 하나님을 믿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전에 믿었던 영적 존재의 이해와 관계가 새로 받아들인 신적 존재와의 관계에 이어졌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서 신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보다 세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그런 힘센 영적 존재에게 사람이 못 하는 일을 청탁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이것은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청탁하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법도 지극히 당연하다. 그래서 점을 치러 간다든지 무당에게 굿을 부탁하러 갈 때는 두둑한 돈 봉투를 지참해야 한다. 이런 관습은 교회에서도 그대로 실행되고 있다. 목사가 심방 오면 심방비 혹은 감사 헌금을 건네게 마련이다. 이것은 목사의 특별 기도에 대한 대가이고 예언(상담 내지는 점침)에 대한 비용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목사는 이런 심방비 조로 받은 수억 원을 모았다가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좋은 일에 썼다는 얘기도 있다. 필자도 이런 일로 재미 본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문제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미신적 존재로 보고 관계를 맺는 데 있다. 첫째로 하나님에게 무엇을 바쳐야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생각이 있다. 그것도 소원의 비중이 클수록 더 많이 바쳐야 한다. 주고 받는 관계이다. 슬롯머신에 돈을 넣어야 돈이 나온다는 생각이다. 이런 인과응보의 믿음은 효녀 심청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한국 교인들의 마음에 이런 인과응보의 믿음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돈으로 매수한다고 할까? 그래서 봉헌기도에는 헌금 낸 자의 이름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목사가 기도한다. 헌금한 자의 정성을 잊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그러면 가난해서 큰돈을 못 바치는 성도는 속으로 가슴을 치며 한탄의 기도를 할 것이다. 그래서 가난하면 교회도 못 간다는 말이 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런 심리는 한국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세의 천주교에서 이런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서 성도들로부터 돈을 끌어모은 이야기는 교회사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16세기 초 교황 리오 10세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개축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에 텟츨 신부를 파견했다. 그는 돈 걷는 방법으로 교회에서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다. 면죄부를 사면 어떤 죄든지 용서받는다는 보증서다. 그리고 연옥에서 고생하는 조상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틴 루터는 이런 비성경적인 상업 행위에 반박하고 나섰고 이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잘못 안 데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서 영성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다. 이사야 58장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보여 주고 있고 믿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준다. 즉 참된 믿음(참된 영성)이란 교회 안에서 요구하는 예식만 열심히 따르면 되는 것이 아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 그리고 전도를 열심히 하고 주초를 안 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거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원하는 참신앙생활은 더 광범위하고 기본적이어야 한다. 예배의 겉모양만 시늉하는 것이 아니고 공의와 화평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영성은 좁고도 피상적이라 할 수 있다. 경건주의의 오류 좁은 안목의 영성은 독일 경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 국교 루터교회의 지성주의에 반대하여 스펭글러가 시작하였다. 개인의 중생 체험을 강조하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선교와 전도 그리고 구제를 열심히 하는 신앙이다. 그리고 세상과의 구별을 강조하여 세속적인 학문과 오락을 멸시하였다. 이런 신앙이 영국 요한 웨슬레의 성결 운동(Holiness Movement)으로 이어졌고 미국의 감리교와 성결교를 통하여 한국에 소개된 것 같다. 한국교회 대부분이 경건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경건주의가 한국교회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면도 없지는 않다. 전도를 열심히 하여 교회가 성장했고 십일조를 고집하여 교회가 재정적으로 풍성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구제도 하고 선교사도 보낸다. 그리고 이단도 잘 판단해서 정죄한다. 그러나 경건주의 신앙의 영성은 속(俗)과 성(聖)을 구분하여 성(聖)은 천국행, 속(俗)은 지옥행으로 판단함으로 해서(이것은 진실이다)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다. 세상은 단지 영혼 구원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음은 이 세상의 문화와는 상관이 없는 영혼 구원에만 관심이 있는 복음으로 전락했다. 플라톤의 이중구조적 세계관: 겉과 속, 형식과 내용, 정신세계와 물질세계, 영과 육체의 구별 눈에 보이는 세계를 둘로 나누어 보는 세계관은 그리스의 플라톤으로 돌아간다. 모든 물질 안(뒤)에는 보이지 않는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정신이라고 하거나 영이라고 해도 좋다. 볼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보물을 포장하는 정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포장은 영원한 가치가 없고 속에 있는 정신(영)은 영원하고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예로 사람을 보자. 육체 안에는 정신이라는 것이 있는데 죽으면 육체는 분산해 버리지만 정신은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시적인 육체보다는 영원한 정신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육체 생활 즉 모든 문화 활동은 신경 쓸 가치가 없고 정신세계를 도모하는 활동만이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사람의 정신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니 정신을 육체에서 해방시키는 일이 고상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정신세계에 속한 일들, 이를테면 예언자나 시인들의 일을 높이 평가하였다. 영지주의 이런 생각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영지주의로 연결이 된다. 영지주의 신앙은 경악할 만한 결과를 초래한다. 즉 영혼의 구원은 받았으니(이신득의) 세상에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회사 사장이 탈세를 해서 번 돈으로 교회에 십일조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예는 기독교인 사장이 회사원들에게 매일 아침 예배를 참석시키지만 회사원들의 복지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회사원들의 영혼 구원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들의 육체 생활은 소홀히 해도 된다는 생각이다. 한국 성도들이 웟치먼 니 를 좋아하는 이유를 좀 이해할 수 있겠다. 그의 영성 이해가 대단히 '영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인간 이해는 플라톤의 이원론에 기초해 있고 영지주의에 가깝다는 것이다(이에 대한 깊은 연구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 래널드 맥콜리, 제람바즈 공저 IVP를 참조하라). 문화 명령과 선교 명령 이런 영성은 창세기 1장에 결혼해서 애들을 낳고 하나님이 지어 준 세상을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을 잊고 영혼 구원하라는 선교 명령에만 전념하는 영성이다. 우리는 문화 명령과 선교 명령의 두 기둥을 다 잡고 살아야 한다. 문화 명령을 선교 명령의 앞잡이로 써서는 안 된다. 목마른 자에게 물 한 모금을 줄 때 전도하기 위해서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그 인간 자체가 귀해서 물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모든 생각과 삶이 영혼 구원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은 전도도 포함하지만 전도가 주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손님 대접할 때 전도를 주 목적으로 하면 비인간적 관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는 주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과 교제하며 그의 아름다움과 은사를 서로 나누며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좋은 선물(사람이든 자연이든)을 인정하고 즐기는 방법일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지어 준 목적일 것이다. 더 넓게는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만든 이유일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인간관계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어진다. 아니,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과도 '인간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제람 바즈 교수는(미국 카비난트 신학교 변증학 교수) 오랫동안 사귄 친구가 있는데 그는 테니스를 치다가 만났고, 그로 인해서 오랫동안 친구로 교제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이 잘 드러나는 사람으로서 그와의 교제가 즐겁다는 것이다(물론 속으로는 항상, 언젠가는 그 친구가 하나님을 믿기를 희망하지만 말이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봤을 때 무엇을 했을까 상상해 본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드리자고 했을까? 그렇지 않으면 성경 공부를 하자고 했을까? 아니다. 아담이 하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환호성을 질렀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에 감탄했다는 말이다. 그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요 기도일 것이다. 하와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위일 것이다. 부부가 성행위를 하기 전에 기도하자고 하면(대개 믿음 좋은 여자가 그렇다) 남자는 김샌다. 부부 성관계에 왜 하나님이 끼어들어야 하느냐는 말이다(물론 이 불평도 성(性)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다). 여자는 이렇게 좋은 남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서 기도하자는데 남편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을 만끽하는 것으로 만족하잔다. 이런 경우에 여자는 경건주의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고 남편은 일반 은혜를 이해하는 쪽이리라. 또 목사 남편을 목사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침실에서 남편을 목사라고 부르면 성행위가 더 성스러워지는가? 최근 서울에서 오랜만에 한 친구를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요새 어느 교회에 다니냐고 물었다. 그 친구의 대답,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교회에 나가라고 하지 않기 때문인데…"라고 하였다. 그 순간 내 머리에 스쳐 가는 탄성, "아차, 또 목사가 저지르는 실수를 했구나!" 문화 명령 산하에 선교 명령이 있다 문화 명령에 따라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그래서 삶을 감사함으로 살고 삶 순간순간을 축제처럼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다. 소요리 문답 제 일에 "사람의 제일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고 한 것같이 믿는 자의 인생 목적은 하나님을 즐기는 것인데, 하나님을 즐기는 것은 우리의 삶을 감사함으로 받고 사는 것이다. 사실 선교 명령도 문화 명령의 일부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 삶 전체가 선교 명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고 문화 명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삶 자체가 선교적이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열심히 살아라. 그리고 정 필요하면 말로 (전도)하라"는 프란시스의 말과 같이 말이다. 기독교 문화란 무엇인가 기독교 문화란 복음송만 부르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가 들어 있는 것만이 기독교 미술이 아니다. 기독교 문화란 아름다운 모든 것, 진리의 모든 것, 악과 거짓이 없는 모든 창조 행위를 포함한다. 이렇게 본다면, 구태여 '기독교'란 전치사를 붙일 필요가 없게 된다. 일반 은혜에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 대학에 진학할 때 믿는 학생들의 고민은 어떤 전공이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일까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기본이 잘못된 것이다. 일반 은혜에 기초한 통전적 세계관으로 볼 때 학생이 해야 할 옳은 질문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는 무엇일까'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자기의 은사를 발견하여 전공을 선택하면 된다. 이렇게 선택한 길로 간다면 즐거운 인생이 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특별히 부르는 길이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을 시키실 때도 있다(요나의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학생이 해야 할 둘째 질문은 그가 받은 은사를 어떻게 이웃을 위해서 쓸 것인가이다. 이 경우에는 자기의 선호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은 아니다. 한때는 목사직이 사회에서 존경받는 때가 있었고 그래서 목사라는 직업이 여성들 간에 인기 있었던 때가 있었다. 이것은 세속적인 생각에서 나온 유행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목사직이 땅에 떨어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유행을 타고 신학교에 간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는지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얼마 전에 자기가 하는 목회가 양심상 부담스럽다고 해서 목사직을 내려놓은 사람을 보았다. 참으로 솔직하고 양심적이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싶다. 나는 그렇게 못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직한 사람이 많이 나온다면 한국교회의 문제가 줄어들 것이다. 이제 문제의 화살은 나에게로 날아온다. G. K. 체스터튼이 영국 사회가 혼란스러운 이유를 신문에 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투고한 것같이 말이다. "선생님, 문제는 저입니다." 성직을 찾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목사 되는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직업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목사가 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자기가 성직자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말씀 전하는 일을 가장 기쁘게 여긴다는 믿음 때문이다. 복음 전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영과 육체의 삶을 이원화하는 영지주의에 가깝다. 이런 이론은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에 위계질서를 만들어 냈다. 즉 교회 안에서 가장 귀한 일을 하는 사람은 선교사, 다음은 목사 등이다. 이런 위계질서가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우주의 하나님, 교회와 세상 주님은 교회의 머리만 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통치자이다. 그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고 살아야 한다. 초대교회 때 세상이 썩어 간다고 세상을 버리고 사막에 들어가서 살거나 장대 위에 높이 앉아서 살던 신앙의 조상들의 오류를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하지만 교회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통치와 교회의 통치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주님은 사람을 통해서 교회를(보이는 하나님 나라) 통치하지만 세상도 통치하신다. 그런데 죄인들이 모인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펼쳐야 하는데 대단히 서투르다는 것이 교회사에서 드러났다. 중세 교회에서 보았고 현재 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주님의 통치권을 탈하는 예는 성경에서도 볼 수 있다(사울왕). 그래서 인간은 주님이 교회의 머리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통치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이 문제이다. 교부 씨프리안이 "구원은 교회 밖에서는 없다"라고 단정지은 이후에 천주교는 교권주의로 흘렀고 교황 이하 교회의 지도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못살게 굴므로 해서 마틴 루터가 성경을 가지고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문제는 지금도 개혁주의 교회들이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하에 권력 체제를 쌓아 놓고 성도들을 들볶는 것은 중세 교회로 돌아가는 현상이라고 보아야겠다(필자도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을 믿지만 이 말이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의미로 믿는다). 교회의 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무교회주의가 나오지 않았는가? 통전적 기독교 영성 바른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이 지은 물질세계를 포함한 영의 세계를 인정하고 영이신 하나님이 물질세계를 지으시고 참 좋았다고 선언하셨다. 타락한 자연과 인간이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에 관심을 쏟아붓는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왔고 그를 믿는 육체를 가진 자에게 영을 부어 준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부활했고 승천했다. 다시 올 때도 육체를 가지고 올 것이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생명의 영을 받은 사람은 제 육을 벗어나서 영적인(비물질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지음받았던 인간(영과 육이 합쳐진)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 지음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이, 그래서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교제가 끊어졌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속죄와 성령을 받고 원래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믿는 자의 삶이고 최종 목표인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서도 부활한 몸으로(어떤 육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살 것이다. 이것이 통전적 기독교 영성이다. 한국교회 개혁을 위해서 기도하는 독자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평신도의 글은 더욱 환영합니다)의 교회 개혁을 위한 생각을 보내 주면 모아서 책 부록에 실을 것입니다. 성명과 연락처를 꼭 첨부해 주세요. 김북경 / 국제장로교 영국교회 장로 ============================================ 호세아가 '好世兒'에게 호세아, 우리의 자화상 ![]() 한국 교회에 유행했던 일천번제 헌금.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얼마간 다르기는 하겠지만 한국 교회의 현재 모습이 그렇게 자랑스럽거나 바람직하지 않음에는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교회가 좋은 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는 드문 예외에 속한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담당해야 할 교회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했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회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일들이 교회 내에서는 거리낌 없이 자행된다. 정체성을 상실하고 권력기관으로 변질된 교회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탈법과 폭력에 손을 내밀기도 한다. 사회는 정도를 넘은 교회의 윤리적 타락과 이기적 탐욕에 우려를 표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교회는 추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에 무관심하다. 종교개혁자들이 오늘의 한국 교회를 보았다면 아마도 그 가운데서 벌어지는 ‘무섭고 놀라운 일’(렘 5:30)에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의 부패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지난 이천 년의 교회사가 증거하듯 교회의 발전은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세속화 또는 오염을 초래했다. 어찌 보면 교회의 부패는 교회가 이 땅 위에서 짊어져야 할 [부정적인] 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느냐이다. 타인의 충고와 비판을 귀담아 듣고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수 있다면 부패는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다. 환자가 유능한 의사의 진단과 처방에 따라 치료를 받고 병에서 회복하는 것처럼, 비판적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는 낮아짐의 겸손이 아직 남아있다면 밝은 미래가 한국 교회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비판과 경고를 신앙적 박해로 오도하면서 귀를 막고 자기 의를 주장한다면 예언자들의 선포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제 길을 가다 멸망당한 하나님 백성의 비극적 운명이 한국 교회를 뒤덮는 짙은 어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예언서들은 교회에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는 책들이다. 메시아적 예언으로 간주되는 일부 구절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읽혀지지 않는다. 예언자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거절당했던 것처럼, 예언서들은 후대의 독자들에 의해 마찬가지로 버림을 받는다. 예언서들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과 냉대는 물론 이유가 없지 않다.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와 사회를 고발한 예언자들의 선포는 주로 개 교회와 개인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오늘의 교회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성전에 대한 비판과 공동체와 관련된 높은 윤리적 요구와 역사의식은 교회중심적인 삶에 차라리 비판적이다. 절대화된 목사의 권위와 유일한 목표로서의 교회성장을 포기하지 않는 한 예언서는 먼지에 싸인 책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언자의 선포는 예나 지금이나 묵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로 남겨진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은 예언서를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신다는 점이다. 예언자의 선포에 귀를 막았던 이스라엘이 멸망의 심판에 떨어졌다면, 예언서에 계속 눈을 감는 한국 교회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이제 기원전 8세기 후반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로 활동했던 호세아를 통해 한국 교회에 주는 하나님의 경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공적 삶의 두 중심축인 정치와 종교를 한 묶음으로 고발했지만, 여기서는 주로 종교와 관련된 내용만 선택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또는 종교적 혼합주의 호세아를 포함한 예언자들이 신랄하게 고발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개종과 같은 고백적 배교행위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이 바알과 같은 주변의 다른 신들을 섬기기 위해 야웨를 부정한 경우는 없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야웨종교 안에 주변 종교들의 신학과 세계관을 수용하려는 태도로, 요즘의 표현을 빌자면 종교적 혼합주의에 해당한다. 야웨만 섬기지 않고 다른 신들과 함께, 또는 야웨를 가나안의 신 바알처럼 섬기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였다. ▲ 고대 바알신을 상징하는 신상. (출처 : 위키피디아) 다양한 종류의 우상숭배가 있었지만 우기에 식물이 성장하고 건기에 시드는 자연계의 주기적 현상을 신화의 도움을 받아 제의화시킨 가나안의 풍요다산제의가 특히 위협적이었다. 바알이 주관하는 풍요제의가 산당예배를 통해 야웨종교 안에 자리를 잡자,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와 가나안의 신 바알의 구별이 희미해지면서 뒤섞여버렸다. 이스라엘은 서서히 야웨신앙의 독창성을 잃어버리고 야웨와 바알을 일치시키거나 또는 바알을 숭배하듯 야웨를 섬겼다. 호세아는 겉으로만 야웨께 드려지는, 바알화된 이스라엘의 제의를 음행 또는 간음으로 고발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떤 연유에서 출애굽의 하나님께 만족하지 못하고 바알의 유혹에 넘어갔을까? 간단히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라고 말한다면 이는 너무 막연하다. 가나안의 바알종교와 야웨종교를 비교해보면 이스라엘이 ‘바알과 같은 야웨’를 선호한 이유가 분명해진다. 바알종교는 숭배자들에게 제의적 의무를 제외하고, 윤리나 공동체의 의무를 요구하지 않았다. 제의가 모든 것이었기에 역사적-사회적 역할을 주장하는 야웨종교와 달리 계명 준수의 부담이 거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바알종교는 그 근본에 있어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풍요제의에 속했다. 제의를 통해 인간의 기본적 관심과 욕망에 속하는 풍요와 번성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또 제사를 통해 풍요를 주관하는 바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바알과 바알숭배자들은 상호의존적인데 반하여, 야웨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후자가 전자에 일방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야웨신앙에서 축복과 구원은 숭배자들의 제의적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야웨의 주권적 은총에 속한다. 은총이란 점에서 야웨의 행위는 독단적이고 임의적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사람들이 야웨를 경외하는 것과 바알을 숭배하는 것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비교적 자명해진다. 이스라엘은 바알을 숭배하듯 야웨를 섬겼다. 이스라엘은 야웨를 숭배한다고 주장하지만, 예언자의 눈에는 바알숭배에 불과할 뿐이었다. 바알은 사라졌어도 풍요제의는 여전히 가나안의 풍요제의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야웨와 바알의 구별은 부차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2:5) 주느냐였다. ‘누구에 의해서’와 ‘어떻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숭배자들에게 풍요로움과 안전을 가져다준다면 그가 참된 신이 된다. 풍요를 허락해주는 신은 누구나 야웨가 될 수 있었다. 물질적 풍요와 번영의 보장이 예배의 일차적 기능이자 유일한 목적이 된다. 신앙을 물질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평가하기에 눈에 보이는 축복이 유일한 목표가 된다. 물질적-세속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 좋은 신이며, 축복을 받은 사람이 좋은 신앙인이다. 야웨신앙의 핵심에 속하는 ‘하나님 말씀에의 순종’은 관심사에서 완전히 탈락한다. 출애굽의 하나님과 풍요제의의 바알을 구별하지 못할 때 결국 야웨신앙도 없어진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가나안의 신 바알은 성경에서나 만날 수 있는 역사적 유물에 속한다.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상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은 우리 가운데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멸망에 빠뜨렸던 바알의 풍요제의의 위험으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벗어났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바알은 사라졌어도 풍요제의는 없어지지 않았다. 풍요제의는 축복의 옷을 빌려 입고 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여전히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살펴본다면 물질적 풍요가 신앙생활의 큰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잘 살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회적 성공과 명성을 위해 교회 일에 열심을 낸다면, 양적 기준에 따라 성령의 역사를 평가한다면 이는 풍요제의의 변형에 속한다. 물론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2:8)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물질을 주니 순종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축복은 예배에 참석하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라, 말씀 순종에 따른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다.(cf. 신 11:13-15)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 이외에 그분 손에서 축복을 받아낼 수 있는 남다른 비결은 없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한다면, 그러한 믿음은 기복신앙(祈福信仰)에 속한다. 무엇인가 그분께서 주실 것을 기대하며 그분을 찾거나 예배드리는 행위는 경건을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는 거짓 믿음이다. 백성의 죄를 즐기는 제사장들 하나님 말씀과 신학적 전통이 있었는데 어떻게 야웨와 바알을 구별할 수 없었을까?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일부 본문이 불확실하지만 호세아 4장 4-10절은 이스라엘이 야웨를 바알처럼 섬기게 된 무지의 원인을 제사장의 부패와 무능력에서 찾는다. 제사장은 제의 규정의 준수뿐만 아니라 윤리적 가르침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안내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성실해야 할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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