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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에 오셔서 역사하신 예수님 2002-10-16 09:36:11 read : 42024
2002. 9. 29 // 요한복음11:38-44절
비행기를 타본 사람은 누구나 경험했던 일입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반드시 방송을 통하여 여승무원의 이런 이야기가 들립니다“여러분, 비행기가 곧 이륙합니다. 안전벨트를 꼭 착용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승무원들이 확인을 하며 다녀본 다음에 승객들이 틀림없이 안전벨트를 다 착용한 다음에 비행기는 드디어 괭음을 내며 이륙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륙하고부터 5분에서 10분 사이가 제일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비행기 사고의 90%가 그 시간 대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 후에 자기 항로에 진입하게 되면 참으로 평안하게 되면 그때는 안전벨트를 풀어도 됩니다. 막 뜨려고 할 때, 올라갈 때. 땅에서 분리될 때 그때가 위험한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통해서 귀한 진리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만남이 있기까지가 문제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찬송가 462장 기억하십니까?“나 두렴없네 두렴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주님께만 나아가면 안전합니다. 이제는 완전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주님이 다 알아서 할 것입니다. 도와주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품안에만 평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기가 위험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던 사람도 거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안전합니다.
어떤 성도님들을 보면 아직까지 주님의 품을 멀리 하고 이륙 직전에 있는 비행기 승객과 같이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하고 의지하고 염려하는 것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영혼, 나의 육체, 내 모든 삶의 안식은 우리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베다니’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남쪽으로 한오리쯤 되는 보통의 마을로서 거기에‘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그처럼 유명해 진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곳에 다니신 후부터 특히 죽은 나사로를 주님이 살리신 후부터 베다니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해서 전 유대에 소문난 마을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평범한 것도, 주님께서 나타내주시고 높여 주시면 유명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베다니에 ‘나사로’그의 누인인‘마르다’와‘마리아’가 살았는데 그때 그 집안의 가장이였던 ‘나사로’가 갑자기 중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누이들은 주님께 급히 사람을 보냈으나 예수님이 지체하는 동안‘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고 소식을 듣고 주님께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사로의 장사는 끝남.
오라비를 보내고 시름에 잠겨있던‘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자 “만일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했을 것인데요”라고 푸념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네가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하시고는 무덤 앞에 가로막힌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는데“아버지여--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요11:41.42) 그리고는 무덤을 향하여 큰소리로“나사로야 나오라”(요11:43)부르시자, 죽은 나사로가 베로 동인채 겅둥겅둥 서서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름도 없던 무명의 마을인 베다니에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오셨고, 그리고 이곳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베다니에 오신 주님은 나사로의 누이들을 위로해 주셨 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를 눈이 빠지도록 고대하던 누이들의 기대를 외면하고, 나사로가 죽어서 나흘이나 되었을 때 주님이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그 오라비의 죽음으로 실망했던“마르다”는 너무도 아쉬워서 하는 말이“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21)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요11:23)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이 말을 들은 ‘마르다’는 짐시동안 대답을 못했습니다. 왜냐 하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 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도둑맞은 집에 가서 도둑놈을 잡았다는 그래서 잃어버린 물건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얼마나 위로가 될까요?. 취업 시험에 떨어진 사람에게 그 시험에 다시 붙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하물며 이미 죽어서 장사지낸 사람이 다시 살아나겠다고 하니“마르다”는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와같이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세상 살이에 지치고 실망했을 때 참으로 우리에겐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위로자를 찾고 받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진작 남을 위로해 주는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위로를 주님으로부터 찾아야 합니다.
스위스의 높은 산 알프스에 가면 높은 봉우리옆에 흰 대리석으로 된 십자가가 서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대리석 십자가 위에는“오직 예수”란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함그 유래를 보면 어떤 부호가 여름철에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피서를 왔습니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딸의 발이 미끄러져 깊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결국 사랑하는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어찌나 낙심하고 실망이 큰지, 세상 살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는데 주위의 권고로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세상에는 그를 위로할 아무것도 없었으나 오직 예수만이 참 위로를 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알프스 산봉 옆에“오직 예수”란 흰 대리석 십자가를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참된 위로가 없습니다. 위로받을 자는 많아도 위로해 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안에 위로가 있습니다. 어느때 든지 가리지 말고 예수만 바라보십시요. 세상이나 사람을 보지 맙시다, 아무리 객지 생활이 힘들어도 예수만 바라보고 의지하면 그것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어차피 본향을 떠나 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의 타향살이에는 고생도, 슬픔도, 외로움도 많은 것인데 오늘도 예수안에서 위로 받고 주어진 생활에 승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베다니에 오신 주님은 마르다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살겠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르다’는 말하기를
“예, 주님 내 오라비가 마지막 날 부활때는 다시 살 것을 저도 압니다”(요11:24).‘마르다’의 이 말은 오라비 나사로가 방금 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일반적인 사상으로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 ‘착한 일을 한자는 생명의 부활로 그리고 악한 일을 한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간다’(요5:29)고 하는 생각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시고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1)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를 믿는 자는 죽은 후에야 산다는 말이 아니라 비록 죽을 지라도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세상의 유일한 생명이시며 부활이시기 때문입니다.
2)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여기서 살아서란 말은 육이 산다는 말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이 살아서란 말입니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서 참 생명과 부활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믿으며 힘 있게 살아가는 자를 말하는데 그런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내가 곧“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 하신 후‘마르다’에게‘이것을 믿는냐’고 물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주님을 믿고 있으며 또 그분만이 우리의 의지할 바위시며 반석이심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믿음은 때때로 약해지고 어떤 때는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주기적으로 믿음을 회복시키는 일이 필요합니다. 나의 믿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기도회로 모이고, 구역예배로 모이고, 금요기도회로 모이고, 이웃에 전도하고 봉사하는 일들은 실제는 모두가 우리의 믿음을 회복시키는 행위들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시간 시간마다 매주, 매월 믿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베다니에 오신 주님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습 니다.
실망했던 저들에게 위로와 믿음을 허락해 주신 예수님은 그 누이들에게 무덤을 막았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돌이 옮겨지자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아버지여--감사하나이다-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1-42).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나사로야 나오라’(요11:43)부르실 때 죽은 나사로가 베로 묶인채 서서 겅둥겅둥 뛰어 나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로서 학문, 과학,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이루었지만, 그러나 생명을 창조하거나 혹은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생명의 창조와 부활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나사로’속에 생명을 넣고 부활을 이룩한 것은 예수님께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진 구주라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있고 능력있는 성도의 삶은 오직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불변의 생명을 가질 때에 이루어 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속에 있는 생명이나 힘은 너무나도 약하고 보잘것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루종일 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일에 시달리다 나면 우리의 힘은 소진되고 곧 무력해 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를 믿고 끊임없이 내속에 성령으로 가득 채울때 우리에게는 또다시 생명과 힘이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 매일 12시만 되면 초라한 차림의 한 노인이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교회에 오래 머물지도 않고 3분정도 지나면 항상 나오는 것입니다. 관리인이 그 노인에게 교회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이 하는 말이“나요?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하지요” 관리인은 계속해서 묻기를“아니 당신은 기도할만큼 오래있지 않고 금방 나오던데요?” 그러자 노인은 답답한 듯이“나 참, 난 오래 기도할 줄 모른단 말이요, 그저 나는 ”무릎꿇자 마자 “예수님 나요 스미스라우”그리고 나온단 말이요. 뭐 잘못되었소이까?
그런데 얼마후 스미스 노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가 입원한 외과 병동은 환자들이 모두 시무룩해 있고 서로 인사도 잘안하고 분위기가 좋지않았습니다. 그러자 스미스 노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여보게! 짐, 좀 어떤가, 자네 오늘 좋아 보이네” ‘다니엘은 아픈게 어떤가 자네 다리는 나을걸세’ 그러면서 이리 저리 다니면서 이야기를 건넸더니 병실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졌습니다.
어느날 간호사가 스미스 노인에게 와서“모두들 그러는데병실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진 것은 할아버지 때문이래요, 의사 선생님도 기뻐하고 있고 우리 모두 참 좋습니다” 그러자 스미스 노인은 “간호사, 아가씨 그것은 나때문이 아니라 날마다 나를 찾아오는 손님 때문이라우”
“예? 우리는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방문객을 본일이 없는데요”“아니요, 날마다 12시만 되면 그분은 내게로 오신다우, 그리고 내 침대 옆에 서서”“여보게 스미스! 나 예수”그런다우. 그렇습니다. 매일 12시가 되면 교회에 찾아가 “예수님, 나요 나 스미스라우”라며 기도했던 스미스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 그가 병실에 누워있자 직접 그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매일 잊지 않고 성전을 찾아가 “예수님! 나요 나 스미스라우”라고 기도했던 ‘스미스’라는 노인에게 용기와 힘을 주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힘과 위로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가 주는 생명과 힘을 너무 희미하게 믿기 때문에 연약하고 힘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능력을 덧입어 더욱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새생명을 얻는 즐거움 속에서 복되게 살아가시기를 이루어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베다니에 오신 주님은 나사로에게는 자유를 주셨다.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은 아직‘나사로’의 몸이 베로 또 얼굴은 수건으로 싸여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즉‘나사로’는 생명을 얻었지만 아직은 그 묶임 때문에 자유로운 몸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하여“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요11:44)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난‘나사로’에게 온전한 자유를 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비록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인치심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자유를 알고 그 자유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성도님들이 이런 세상적인 묶음속에서 오늘도 허우적 거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이성의 유혹에 묶이고, 세상의 돈에 묶이고, 자기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일에 묶이고, 감정에 묶이고, 불신앙에 묶여서 마치 베로 싸인 나사로처럼 살고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구원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생명이 그에게 이미 심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죄의 사슬에 매여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는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갈5:1)고 하셨으며“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스스로 불필요한 멍에를 메고 고통하며 괴로워 해야 합니까? 주님이 이미 우리의 멍에를 가볍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능력을 힘임고 이 멍에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는 주님만을 따라가기 위해 더욱 힘써서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안에서 참 자유하는 삶이 분명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 웹스터’는“하나님은 자유를 사랑하고 그것을 감사하며 그것을 옹호할 용기가 있는 자에게 더욱 자유를 부여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5. 베다니에 오신 주님을 만남으로 생활이 변해졌습니다.
누가복음19:11절 이하에 나오는 삭개오라는 사람은 그의 꿈은 오직 돈이고 소원은 물질의 풍족함이였으며 그의 보람은 돈을 모으는 일이였습니다, 심지어 밤에 잠자리에서나 공무를 수행할 때나 오직 그의 일념은 돈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 세상에는 삭개오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족보다 돈이 더 중요하고, 양심보다 돈이 좋고, 자식보다 돈이 더 사랑스럽고, 인생의 전부를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돈 이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돈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들은 곧 삭개오입니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더니 그의 생활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 원칙은 변화된 생활입니다. 옛 사람과 신앙의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찾고 새 삶의 용기와 결단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세계관, 물질관,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인생이란 돈만이 아님을 알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사업가 ‘페니’(J.C. Penny)는 부자로 이름난 사람이었으나 그가 58세 때 기업이 망했는데 신앙적으로 깨닫고“사람이 계획할지라도 일을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신앙으로 새 출발을 하면서 자기 소득을 주의 이름으로 활용하겠다고 결심하고 그가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하여 사회 사업을 하게 하고 플로디다의 은퇴목사들을 위해 주택 100동을 지어 제공했는데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딴 J,C체인스토아는 미국에 2,000개나 된다고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쓰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더 했고, 그의 도움을 받은 은퇴목사님들과 사모님 200여명이 기도후원자가 되더니 사업이 20배로 성장한 5병2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페니의 고백은“전에는 내가 돈을 벌었으니 내 맘대로 쓰려 했으나 믿음 안에서는 주는 기쁨이 움켜 쥐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임을 알았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그 방향을 전환하는 순간부터 시작이 됩니다. 잘 먹는 것, 잘 입는 것, 순간적인 쾌락보다 인간이 인감됨을 깨닫고 참다운 삶의 가치를 찾을 때 비로서 인간은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 변화된 자기를 고백합니다.
지금까지는 움켜 쥐기만 하던 자가 이제는 내 놓겠다고 선언합니다“내가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고 가난한 사람을 구하겠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그는 돈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를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이와같이 주는 삶을 통해서 삶의 모든 것이 변화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도 베다니에 오신 주님을 만남으로 저들의 삶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저는 오늘“베다니”에 오셔서 죽은‘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왜 ‘베다니’에 오셨는가?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베다니에 오신 주님은
1) 나사로의 누이들에게는 위로를
2) 마르다에게는 믿음을 주기 위해
3) 나사로에게는 생명을 주기 위해
4) 나사로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5) 베다니에 주님이 찾아 오심으로 생활이 변했다.
베다니의 작은 마을 슬픔과 실의에 빠져 있던“나사로”의 누이들에게 주님이 오심으로 저들의 오라비가 살아나는 놀라운 새 생명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힘들고 고달픈 삶이지만 한 주간도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 사업과 개인의 삶에 찾아오신 주님을 만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맺힌 실의와 답답함을 씻고, 기도와 말씀 안에서 모두가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믿음, 그리고 생명과 자유함, 생활의 풍성함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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